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사망했다. 북한에서는 당연히 '김정일 이후' 시대가 공식화될 수밖에 없고, 남한에서도 서울시장 선거와 한미FTA 비준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여야간 대치전선이 영향을 받게 되었다. 야권에서는 현 집권세력에 대한 민심의 분노에 힘입어 2012년 총선·대선을 낙관하는 분위기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는 오판이 될 수도 있다. 당장 북한에 급변 사태가 발생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2012년에는 분단체제의 환경조건이 훨씬 강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냉전체제에서의 남북한 대결과 분단체제는 남북한 내부에 구조적 왜곡과 수구적 퇴행을 강화했던 것이 역사적 경험이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2013년체제'는 집권세력의 교체와 희망적 대안질서를 함께 추구하는 프로젝트다. 그렇다면 반드시 분단체제와 세계체제의 조건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를 토대로 한 대안으로서의 '한반도경제'를 생각해보고 싶다.
김정일 사망 전에 이미 시작된 '김정일 이후'
남북관계 악화에는 이명박정부의 역할이 컸지만, 분단체제의 또다른 축인 북한의 상황도 돌이켜보아야 한다. 김정일 위원장이 사망한 것은 2011년 12월 17일이다. 그러나 '김정일 이후'는 사실상 2008년 8월 김위원장의 뇌졸중 발병 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김위원장은 2008년 10월께 회복되기 시작하면서부터 후계자 결정을 서둘렀다. 11월에는 김정은으로의 후계 결정이 굳어졌고 김정은은 이때부터 김위원장의 현지 지도에 동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어 2009년 1월 8일 노동당 조직지도부에 후계자 결정이 통보된 것으로 전해진다(〈20대 '수습' 대장, 김정은의 모든 것〉, 《한겨레21》, 2011.12.31).
2008년말부터 시작된 김정일-김정은체제에서는 체제 유지와 후계구도 구축이 최우선 과제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후 나타난 북한의 정책기조는 군부 강경파를 앞세우는 선군정치와 경제·사회에 대한 국가의 통제 강화로 나타났다. 북한은 2009년 11월 말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이는 그간 부분적 시장화를 통해 축적된 인민의 부를 하루아침에 몰수하고 집권적 계획체제를 다시 강화하려는 시도였다. 시장이 심각하게 위축되면서 인민생활은 더욱 피폐해졌다.
북한의 집권적 계획경제 씨스템은 지속 불가능하기 때문에 개혁·개방은 불가피한 방향이다. 이 때문에 김정일시대에는 선군정치와 핵무기 개발을 통해 체제 유지를 도모하면서도 부분적 시장화와 남북관계의 통로를 일정하게 열어두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김위원장의 건강 악화로 '김정일 이후'가 앞당겨졌고, 2008년말 이후 '체제 안정'과 '통제 강화'라는 정책 방향이 강화되었다. 이 시기에 북한은 '김정일 이후'에 대한 체제 보전의 기본 방책을 중국과의 협력·의존에서 구하는 쪽으로 결단한 것으로 보인다. 김위원장은 2010년 5월, 2010년 8월, 2011년 5월 등 1년 사이에 무려 3차례나 중국을 방문한 바 있다.
세계체제의 변동과 미·중의 선택
분단체제의 강화는 세계체제의 변동 요인과 시기적으로 교묘하게 맞아떨어진 측면이 있다. 중국에서도 2008년을 전후해 대외정책에서 행동패턴의 변화가 나타난다. 중국 개혁·개방의 설계사 격이었던 덩 샤오핑(鄧小平)은 일찍이 "빛을 숨기고 어둠을 기른다"(韜光養晦)거나 "절대 우두머리로 나서서는 안된다"(絶不當頭)는 것을 중국이 100년간 고수해야 할 원칙이라고 한 바 있다. 그러나 2007~8년 미국의 금융위기로 세계경제에서 중국의 비중은 급격히 높아졌다. 중국은 이후 세계금융씨스템과 달러화·위안화 가치에 대한 발언권을 강화했으며, 남중국해와 동아시아에서 일본·미국과의 맞대결을 피하지 않고 있다.
중국은 글로벌 강대국이 되겠다는 목적을 드러내고 있다. 적어도 동아시아 역내에서는 "할 일은 하겠다"(有所作爲)는 태도를 분명히 한다. 중국은 북한의 후계체제 안정이 중국의 국익에 부합되는 것으로 판단하고 북한을 후원하는 쪽으로 전략적인 결정을 내린 것으로 판단된다. 중국은 김정일 사망 이후에도 북한 후계체제를 가장 신속하고 적극적으로 뒷받침했다.
미국의 금융위기는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오바마정부는 금융위기 속에서 정권교체를 이뤼었기 때문에 이전 부시행정부의 적극적 대외개입 정책을 재검토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경제적 부진과 중국의 부상에 따라 다시 동아시아에 대한 개입을 강화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한미FTA(자유무역협정)와 TPP(Trans-Pacific Partnership,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의 추진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의회가 한미FTA를 비준한 것은 양국 정부간 공식 서명이 이루어진 2007년 6월말로부터 4년 3개월 이상이 지난 시점이다. 그간 미국 민주당의 비판적 태도로 한미FTA는 사실상 중단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의 경제상황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재선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한미FTA 비준을 수출과 고용 확대를 위한 카드로 선택했다. 미국의 침체 속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너무 빠른 속도로 확대되는 것에 대한 경계심리도 작용했을 것이다. 미국은 한미FTA에서 더 나아가 이를 아태지역으로 확대하는 TPP를 추진하고 있다.
요동치는 동아시아를 묶어줄 '네트워크 경제' 질서
돌이켜보면 2008년 이후 동아시아에는 갈등과 카오스의 경향이 강화되었다. 미국의 금융위기, 중국의 부상, 이명박정부의 등장, '김정일 이후'의 개시 등이 원인이다. 북한·중국, 한국·미국의 전략적 결속관계는 한층 강화되고, 동아시아와 한반도 차원의 국가간 협력 가능성은 좀더 낮아졌다.
북한의 '김정일 이후'는 당분간 유훈통치와 북중협조가 기본방향이 될 것이다. 북한 당국의 2012년 신년 공동사설에서도 유일영도체계의 공고화를 강조하며 미군철수를 다시 주장하고 있다. 현대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3대 세습 후계체제를 안정화해야 하는 북한으로서는 남북관계나 북미관계 개선에 적극성을 발휘할 여력이 많지 않다.
한국도 국가 차원에서는 적극성을 발휘할 공간이 넓지 않다. 당장 한미FTA 비준에 대한 후속조치와 중국이 적극 제기할 한중FTA에 대해 면밀한 접근이 필요하다. 한미FTA를 당장 철폐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독소조항으로 판단되는 요소들도 단기간에 독성효과를 나타내지는 않는다. 한미간 국제조약의 폐기는 중국 의존의 전면화라는 신호로 해석될 수밖에 없는 현실도 감안해야 한다. 한중FTA의 경우 경제적 측면에서는 한미FTA보다 더 큰 충격을 가져올 수 있다. 중국과의 경제관계는 FTA 없이도 이미 빠른 속도로 확대되고 있다. 중국의 협상개시 요구를 마냥 피할 수는 없겠지만, 협상의 기조를 '낮은 수준, 좁은 범위'로 가져가야 한다. 중국과 한 테이블에 앉는 것을 꺼리는 일본을 설득하여 한중일FTA의 틀 속에서 실무협상을 진행하는 것도 고려해볼 수 있다.
보다 적극적인 대안은 '동아시아-한반도 네트워크 경제'를 형성하는 것이다. 현재의 조건에서 남북관계, 한미관계, 한중관계를 국가적 차원에서의 국가연합이나 경제공동체로 접근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국가 차원의 위계적 조직·관계를 결성하는 데 앞서 '네트워크'를 원리로 하는 질서를 쌓아가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다. 이때 '네트워크'는 제도와 정책 결정 과정에서 공유되는 연결망, 여러 도시들 사이에 존재하는 반복적·지속적인 연결망, 혁신적 경제조직들의 연결망 등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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