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가장 주목받는 집단은 2030세대다. 해방 이후 이 연령대에서의 사회진입이 오늘날처럼 어려웠던 적도 없다. 그만큼 마음고생이 심한 세대다. 동시에 오늘의 2030세대만큼 정치적으로 큰 잠재력을 지녔던 인구학적 집단도 없었지 싶다. 두고 보라. 올해 있을 두차례 선거에서 이들의 투표율에 목을 거는 경향이 더 심해질 것이다.
이들의 성향을 보여주는 증거와 분석들은 많이 나와 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SNS 중심의 네트워크형이고, '나는 꼼수다' 같은 위악적 카타르시스를 즐기며, 집단의 동원이 아닌 개인의 참여라는 방식으로 자기 목소리를 낸다. 현대자유주의에 가까운 정치감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들이 분노한다면 그것은 이념적 저항이라기보다는 절차적 항의에 가깝다. 이를테면 이들이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면서도 안철수현상에 열광하는 것은 자본주의 자체를 반대한다기보다, 반칙하는 자본주의에 일침을 가하는 슈퍼맨에게 환호하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옳다. 그런데 이들의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지향을 짚어내는 시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국제무대를 향한 욕구다.
청년세대의 국제무대 진출 욕구
오늘날 2030세대의 감수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키워드인 '국제무대'를 빼놓고 이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막연한 동기로 국제기구에 근무하고 싶어하든, 헌신적인 이유로 개발도상국 국제개발에 뛰어들고 싶어하든, 해외로 나가고 싶어하는 점에선 차이가 없다. 그 이유가 뭘까? 워낙 국내상황이 팍팍하다 보니 외국에서의 기회를 자연스레 갈구하게 되었다. 게다가 해외여행 기회가 늘어났고 경제적으로 운신의 여지가 생겼다.
요즘 젊은이들 중에는 이미 청소년 시기에 해외여행이나 해외연수 경험을 해본 이들이 많다. 외국어에 대한 노출 기회도 늘어났다. 60~70년대에 작가 전혜린이 젊은이들의 낭만적 서구 선호를 자극했다면, 반세기 후 구호활동가 한비야가 신세대의 인도주의적 세계의식에 불을 지르고 있다. 직장생활을 접고 무작정 떠난다는 말이 더이상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다. 네팔 산간에서, 태국의 치앙마이에서, 캄보디아에서, 아프리카의 잠비아에서 구호활동을 벌이는 한국청년을 만나는 일이 전혀 놀랍지 않게 되었다. 해외선교에 열심인 기독교 측 루트를 통한 외국 현지경험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정부가 이끌고 있는 국제발전담론의 확산이 제일 큰 몫을 했다. 최근 부산에서 열린 국제개발회의에 쏠렸던 젊은이들의 관심을 상기해보라. 코이카(KOICA, 한국국제협력단)라는 단어가 어느새 코리아(KOREA)만큼이나 친숙한 어휘가 되었다. 최근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의 대학원에서 신입생 면접을 했는데 그 중 3분의 2가 국제발전과 관련된 활동에 경험이 있거나 관심이 있었다. 굉장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개도국 경험이 가져올 정치와 사회 변화
개도국 발전지원에 대한 우리 국민의 관심은 그것 자체로도 중요하다. 그런데 이런 변화에는 또다른 함의가 있다. 개도국 발전과정을 가까이서 관찰하거나 그것에 참여해 본 경험이 있는 세대가 갖추게 될 정치의식과 사회적 문제의식이 미칠 영향력이다. 예컨대 개도국 경험을 통해 대한민국 발전모델을 찬양하는 보수 정치화의 길을 걸을 수도 있고, 전지구적 빈부격차와 자본주의의 모순적 발전양태에 의문을 품는 진보 정치화의 길을 걸을 수도 있다.
단언하건대 앞으로 몇년 내로 개도국 발전지원 현장에서 정치의식화의 세례를 받고 그 정신을 국내로 역수입하는 경우가 흔해질 것이다. 이건 결코 과장이 아니다. 필자는 십여년 전에 『NGO의 시대』(창작과비평사 2000)라는 책을 낸 적이 있다. 거기에 이런 말을 썼다. "머지않은 장래에 현재 일국적 시민운동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는 다양한 이념적·실천적 논의와 쟁점의 구도가 제3세계 개발분야에 비슷하게 옮겨가 재현될 것으로 예상한다." 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고, 다음 단계의 예상 역시 조만간 현실화될 것이다. 우리 사회의 발전경로가 그런 방향을 이미 가리키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국제발전담론에 허술한 점도 적지 않다. 우선 수단이 목적을 앞서는 경우가 허다하다. 장래 희망이 '국제기구 근무'라고 말하는 젊은이를 흔히 만날 수 있지만 '왜' 또는 '무엇을 위해'라는 기본적인 질문이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개도국 지원활동은 자기 신념을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런 길을 단순 직업상 경력으로만 접근한다면 선후가 바뀐 것이다. 또한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한반도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개도국' 발전의 문제와 인도주의 실천의 쟁점을 외면한 채 국제발전담론이 전개되고 있는 것도 기현상이 아닐 수 없다. 예컨대 발상을 전환하여 매년 남한 젊은이들 수천명을 북한에 평화봉사단원으로 파견한다면 어떨까? 이런 점까지 상상할 수 있다면 우리는 발전의 문제가 단순한 물질적 차원을 넘어 평화와 공존의 존재론적 문제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형 발전모델을 만들어갈 젊은 감수성
우리 정부가 추진중인 국제발전담론이 한국형 모델의 개도국 수출을 은연중에 전제하는 모양새도 우려를 자아낸다. 21세기형 발전모델은 선개발국이 저개발국에게 일방적으로 베풀어주는 게 아니다. 양자간의 대화, 상대방에게 배우겠다는 호혜의 정신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서구가 기존에 해오던 방식을 우리가 답습하는 식이 되어선 곤란하다. 아닌 말로 4대강사업 모델도 수출할 것인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또한 젠더와 사회적 배제 등 국내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의제를 국제발전의 과정에서도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한다. 이런 점을 간과한 접근은 기술관료적 실적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2030세대의 국제발전 참여경험과 감수성이 우리 스스로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앞으로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감수성은 박정희식 발전국가와 그것의 전면 거부, 이 둘을 모두 넘어서는 어떤 새로운 경지일 가능성이 높다. 정치든 시민사회든 학계든 이 점을 먼저 포착하는 쪽이 앞으로 한 세대의 정치적·사회적 풍향을 주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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