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같은 전망에 힘을 싣는 것은 유훈 통치를 공식화한 22일자 <노동신문> 사설이다. 1면 전면을 털어 쓴 '위대한 김정일 동지는 우리 군대와 인민의 심장 속에 영생하실 것이다'란 사설을 통해 북한은 19일 사망 발표 때 처음 언급된 '김정일의 유훈'을 2차례 반복해 내세웠다.
<노동신문>은 "김정일 동지의 유훈을 지켜 주체혁명‧선군혁명의 길을 꿋꿋이 걸어나가야 한다"면서 "장군님의 유훈을 튼튼히 틀어쥐고 이 땅, 이 하늘 아래 반드시 세계가 우러러보는 주체의 강성국가를 일떠세울 것"이라고 밝혔다.
신문은 '김정일의 유훈을 받드는 것=김정은에게 충성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강하게 내세웠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백두의 혈통'을 강조한 것이다.
사설은 "세월이 흘러도 단결의 중심, 영도의 중심을 변함없이 옹위해 나가는 (…정신으로) 백두의 혈통을 굳건히 고수해 나가야 한다"면서 "천만 군민이 존경하는 김정은 동지를 결사옹위하는 총폭탄이 되고 그이와 사상도 뜻도 운명도 미래도 함께 하는 견결한 선군혁명 동지가 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관심은 사실상 북한의 방향을 결정할 '김정일의 유훈'이 과연 무엇이냐는 데로 쏠린다. 대체적인 방향은 이날의 <노동신문> 사설과 19일 '특별보도'에 담겨 있다. 선군 노선과 강성대국 건설 노선을 계승한다는 것은 큰 전제로 제시돼 있고 △군사력 강화, △경제 재건, △남북‧대외관계 등의 방향도 포괄적으로 담고 있다.
● '유훈 통치' 정책방향 시사하는 보도 핵심 요약 1. 특별방송 '전체 당원들과 인민군장병들과 인민들에게 고함' (19일) - 선군정치 : 선군의 기치를 더욱 높이 들고 나라의 군사적 위력을 백방으로 강화해 우리의 사회주의 제도와 혁명의 전취물을 튼튼히 지켜야 한다 - 경제 : 새 세기 산업혁명의 불길을 온 나라에 지펴올려 경제 강국 건설과 인민생활 향상에서 결정적 전환을 이룩해야 한다 - 남북관계 : 조국통일 3대헌장과 북남공동선언을 철저히 이행해 온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실현한다 - 대외관계 : 자주, 평화, 친선의 이념에 기초해 세계 여러 나라 인민들과의 친선단결을 강화하며 지배와 예속, 침략과 전쟁이 없는 자주적이며 평화로운 새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투쟁한다 2. 노동신문 사설 (22일) - 선군정치 : 김정은 동지의 선군영도를 높이 받들고 나라의 자위적 국방력을 백방으로 강화해 사회주의 제도와 혁명의 전취물을 굳건히 지켜나가야 한다 - 강성대국 : 강성국가 건설을 위한 대고조 진군을 힘있게 다그쳐 나가는것은 위대한 장군님의 뜻과 염원을 빛나게 실현하기 위한 성스러운 투쟁 - 경제 : 경제강국 건설과 인민생활 향상에서 결정적 전환을 일으켜 강성부흥의 그날을 하루빨리 앞당겨와야 한다 - 남북관계 : 조국통일은 위대한 장군님의 필생의 위업이였으며 최대의 염원 - 대외노선 : '특별방송'과 동일 |
<프레시안>은 이같은 문구 속에 담긴 북한의 미래 정책 방향은 어떤 것일지에 대해 북한‧남북관계 전문가들의 분석을 들어 봤다. 다음은 전문가들의 분석을 재정리한 것이다.
■ 정창현 <민족21> 대표(국민대 교수)
김정은 시대 북한의 대내외 노선은 이미 지난해 9월 28일 김정은을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한 당 대표자회를 통해 기본방향이 확정돼 있다고 봐야 한다.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으로 이 노선은 '유훈'으로 남게 될 것이다. 따라서 김정은 체제는 당분간 지난 김정일 위원장 때의 노선을 그대로 계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북한의 정책 방향은 계획경제의 정비, 6자회담 재개, 중국과의 협력을 통한 대외개방, 남북대화 복원 노력을 동시에 진행하겠다는 것이며 이 모든 것들이 연계돼 있다는 것이다. 2009년 이후 늘어난 김정일 위원장의 현지지도, 3차례의 북중 정상회담 등은 이를 위한 적극적 행보다.
경제 면을 보면, 북한은 경제 활성화를 통해 민심 확보에 적극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과 관련해, 예를 들면 '비통한 심정을 건설 현장의 성과로 보답하자'는 식으로 선전하면서 희천발전소, 평양 만수대의 초고층아파트, 2.8 비날론 연합기업소 등 주요 전략기업의 정상화 작업을 내년 4월까지 끝내기 위해 총력을 기울일 가능성이 있다. 한국, 미국, 중국으로부터 식량 등 경제 지원을 확보해 배급 정상화에도 나설 것이다
대외 정책을 보자. 북한은 6자회담 재개에 적극 나설 것으로 보인다. 지난 15~16일 북한은 미국과 베이징에서 실무접촉을 갖고 6자회담 재개 일정 등에 의견 접근을 본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김정일 위원장 사망 전 승인됐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애도 기간이 끝나는 대로 북미대화에 다시 나오는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전략적 협력 관계를 다방면에서 확대해 나갈 것이다. 중국도 김정은 체제의 조속한 안정을 바라고 있기 때문에 북한과의 협력 강화에 적극 나설 것으로 보인다. 중국 지도부는 김정일 위원장 사후 신속하게 조전을 보내 김정은 체제를 지지한다는 뜻을 밝혔다. 애도 기간이 끝나면 북중 간 고위대표단의 상호 방문이 활발해질 가능성이 크며 김정은 자신이 적절한 시점에 방중할 가능성도 있다.
남북관계를 보면, 북한은 비핵화 회담 등 남북대화에도 응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6자회담이 재개될 경우 남이나 북이나 내부적으로 대화 수요가 발생할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조의 표명'을 하고 민간 차원의 조의문 발송을 허가한 것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다만 비료 지원이나 금강산 관광 재개 등을 이명박 정부가 수용할지가 변수가 될 수 있다.
▲북한은 당분간 '김정일의 유훈'을 앞세운 통치를 펼 것으로 관측된다. 관심은 그 내용에 쏠린다. |
■ 김창수 불교사회문화연구소 상임연구위원(전 청와대 행정관)
북한은 이미 1~2년 전부터 압축적으로 후계 체제를 준비해 왔다. '김정은 체제'를 위한 기본 틀은 지난해 당 대표자회를 계기로 이미 구축됐을 것이다. 김정은 체제의 플랫폼은 당이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당 대표자회는 공석 중인 당 주요기관 인사를 완료함으로써 당이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는 체계를 갖췄다. 김정일 부고에서도 직책 가운데 노동당 총비서를 가장 먼저 기술했고 특별방송도 '당원들과 인민군 장병들과 인민들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으로 당-군-민의 순서로 돼있다.
때문에 군부가 김정은을 지지할 것인지 의문도 있지만 북한 체제 속성상 당은 군을 지도한다. 또 북한군은 가장 철두철미하게 세습 체제를 옹호하는 집단이다. 과거 70년대부터 김정일 후계체제 구축 과정에서 만들어진 후계자론이라는 이론이 이미 있었고 김정일의 의지에 의해 노동당 시스템이 정비된 만큼 김정은은 시간을 절약하고 '김정은 체제'는 빠르게 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정은의 경험 부족은 우려되는 부분도 있다.
정책 방향을 보면, 북한은 19일 특별방송에서 정책목표로 '경제강국 건설과 인민생활 향상'을 제시했다. 이는 '김일성 유훈통치'의 재판(再版)이다. 김정일은 생전에 북한이 정치, 사상, 군사 강국은 이미 이뤘으니 이제 경제강국을 만들어서 '강성대국'을 이루자고 주장했다. 따라서 '경제강국'과 '인민생활 향상'은 김정일의 유훈통치가 시작되는 신호다.
이 목표를 위해서는 중국이 강력한 후견인이 될 것이다. 중국은 김정일 사망 이후 신속하게 김정은 후계체제를 인정하고 나섰다.
또 북한은 중국의 후견을 바탕으로 미국과 핵 협상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다만 김정은 체제가 미국과 본격적인 핵 협상을 해 나갈 지도력이 있는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러나 15~16일 접촉에서 합의된 것으로 알려진 초보적 상호 조치들을 이행할 수는 있을 것이다. 과거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지만 같은해 10월에 제네바 기본합의를 이룬 것도 이런 관측에 힘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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