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최형락) |
물론 그는 분석 대상과 만나지 않는 제3자의 냉정한 관점을 강조한다. 그 덕분에 그는 안철수와 박원순 현상의 한계에 주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글 전반에는 새로운 흐름의 등장에 대한 분노와 불안감의 그림자가 진하게 스며들어 있다. 그가 단칼에 강남좌파 현상이나 혹은 젊은이들의 탈정치론이라 재단하는 새로운 현상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짧은 지면상 자세히 밝히긴 어렵지만 그저 나열만 해도 심상치 않은 현상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국내외적으로 기존 자본주의 패러다임의 붕괴와 이행의 시작, 기존 정당 체제의 전면 재편성의 시작, 젊은 세대의 문화적 감수성의 충격과 이들에 의한 정치 재구성의 시도, 오랜 공적 헌신과 실천적 결과물을 가진 행위자들의 등장, 시민이 주도하는 시민정치운동 패러다임의 초기 등장, 국가 대 시장의 이분법에 머물러 있는 기존 진보와 보수의 낡은 문법으로 포착되지 않는 사회적 가치, 시민경제론의 등장들…. 지금은 이를 깊이 성찰하며 이론화하고 그 명암을 냉정하게 드러낼 때이지 낡은 교과서를 펼쳐들 때가 아니다.
현재 그의 작업은 한국에서 어느 좌표에 속할까? 지금 한국에서 현재 진행중인 정치 패러다임, 나아가 지식 생태계나 사회 전체 틀의 대전환으로 이행을 바라보는 프레임들은 낡은 것의 수호론 대 새로움의 메시아론의 이분법으로 대비된다. 전자는 애써 새로운 것을 단지 아직 오염되지 않은 인물의 신선함이나 혹은 장밋빛 환상으로 매도한다. 후자는 새로운 것에 자신의 욕망을 과도하게 투사하여 빛과 그림자를 균형 있게 보기보다는 환상으로 돌변시켜 버린다. 마치 과거 오바마 후보가 등장했을 때 만연했던 이분법과도 유사하다. 나는 그 당시 선거 기간 오바마 현상의 탁월함과 숙명적 한계를 동시에 지적하였고 기대치 게임에 실패할 것을 예고한 바 있다. 강준만 교수의 문제의식은 이 이분법 중 낡은 것의 옹호론에 해당된다.
난 박원순, 안철수 현상이 있기 전에 강 교수가 신간 강남좌파론에서 나의 새로운 자유주의 주체의 등장 예고에 대해 불편함을 토로했을 때 고개를 갸우뚱 했었다. 물론 나의 용어에 대해 학문적으로 많은 논란은 있을 수 있지만 새로운 가치와 스타일의 주체들이 등장하는 것을 강남좌파라는 낡은 용어로만 색칠하는 것이 그의 탁월한 분석 능력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았다.
원래 강남좌파론이란 널리 알려져 있듯이 미국의 퇴행적 뉴라이트들이 새로운 시대 감수성의 자유주의 등장에 대해 질시와 분노, 그리고 좌절감을 교활하게 이론화한 것이다. 이 이론은 온갖 사회과학적 분석의 외관을 벗고 보다 선명히 표현한다면 다음의 보수 포퓰리즘의 문장으로 요약된다. "교사, 교수 등 자본주의의 새로운 화이트 칼라층등은 너희 민중 계급의 친구가 아니야, 우리 네오콘야말로 너희들의 진정한 대변자야"라고 말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수구적 신문들과 강 교수가 제기한 강남좌파론은 그들의 의도와 달리 젊은층들에게 매력적 아이콘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다. 즉 미국 근대 시기의 복고적 뉴라이트의 정치적 공격 어법이 오늘날 한국에서는 반대로 자신들의 발등을 찍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모든 이론은 그 맥락과 정치적 효과 속에서 해석하거나 적용하는 것이 지식인의 과제라 할 수 있다.
그의 낡은 강남좌파론은 정치적 시민운동에 대한 낡은 교과서의 공격으로 이어진다. 한 때 학계에서는 시민운동은 민주화 이행단계의 일시적 현상이며 마치 정당만이 성숙한 조직인 것처럼 주장되었다. 나는 그 왜곡과 수년 채 싸우면서 미국 무브온이나 일본 생활 정치 운동처럼 본격적인 정치적 시민운동이 태동해야한다고 주장해왔다. 이 정치적 시민운동과 비정치적 시민운동이 분화하고 상호 견제하며 함께 제도권 정치와 협력과 견제를 이루는 것이 21세기 다차원적 네트워크 정치의 주요 방식이다. 시민운동은 정치 바깥에서 중립적 시민운동으로만 남으라는 것은 근대 시기의 낡은 정당 만능론이자 실천적으로는 새로운 정치 흐름을 차단하고 싶은 기득권 체제의 이익을 대변한다.
더 안타까운 것은 안철수나 박원순처럼 용기 있게 기존 정치에 대한 근본 질문과 도전을 제기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을 환영하기보다는 정치공학적 낡은 틀로 채색하는 것이다. 박원순의 수염이 안철수에 대한 압박전술이라는 강 교수의 기묘한 해석은 기존 수구신문들도 생각해내지 못한 '창조적' 상상력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정치적 각성이 일어나는 것을 환영하기보다는 이를 탈정치적 요구라고만 단정하는 것은 그의 낡은 해석 틀을 잘 보여준다.
오히려 그의 지적과 반대로 안철수, 박원순의 한계는 너무 정치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 이는 선거 과정에서 안철수의 예측을 뛰어넘는 양보나(물론 이를 정치공학적 포석이라고 정치평론가들은 또 해석할 테지만 말이다) 박원순의 네거티브 혐오에서 잘 드러난다. 난 그들이 더 정치적으로 발전해나가길 기대하지, 강 교수처럼 자신의 정치공학적 틀로 맑은 영혼의 존재들을 재단하고 싶지 않다.
물론 새로운 정치를 제기하는 이들도 현실 구조와 관행의 제약 속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지적은 맞다. 그리고 난 지금 구체제 속에서도 여야에 빛나는 새로운 인물들도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들과 안철수, 박원순의 공통점은 구조적 제약과 관행의 진흙탕 속에서도 새로운 구조와 가치, 그리고 감수성의 문화를 만들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공감과 동행'의 정치방식은 단지 제도권 정치 외부에 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라 구체제 구조 속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모든 것을 현 구조 탓으로 돌리는 것은 정확하지도 않고 실천적으로 구체제를 존속시키는 길이다.
안철수와 박원순은 무조건 선인가? 물론 아니다. 앞으로 그들에게는 서울중심주의, 상층 엘리트 중심주의를 넘어선 분권형 네트워크 국가, 시민 주도적 정치의 모델로의 이행을 선도할 쉽지 않은 과제가 기다리고 있다. 아직 천민자본주의 패러다임과 자의적 지배에 맛을 들인 정부, 그리고 사회적 자본이 충분히 축적되지 않은 시민사회의 현실에서 이는 험난한 시행착오의 과정일 것이다.
지금 한국의 공적 지식인들은 대전환기를 맞이하여 사회적 시장 경제론, 시민 주도 정당과 정치 모델 등 수많은 새로운 이론적 정리의 과제에 직면해 있다. 이 때 가장 중요한 전제는 자신의 낡은 교과서와 감수성에 냉정하게 근본적 의문을 던지며 실사구시적으로 현실에 직면하는 것이다. 한국인의 정치심리학 이론화에 탁월한 모범을 보여온 강 교수가 앞으로도 냉정하게 새로운 이론적 지평을 열어가기를 한 사람의 팬으로서 기대한다.
* 원제 : 강준만 교수의 낡은 감수성 (☞ 한국미래발전연구원 주간논평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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