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도민들에게 강정 마을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시작한 작가들의 편지 연재는 처음 조정 시인이 제안하고, '제주 팸플릿 작가들'이 참여하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20년 넘는 형을 받고 파시스트들의 감옥에 있을 때, 유럽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구명 운동에 나섰습니다. 로맹 롤랑이 지속적으로 만들어 배포한 팸플릿 역시 크게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제주 팸플릿 운동'은 여기에서 연대의 힘을 발견했습니다.
쓰는 일 외에 별로 잘하는 게 없는 시인과 소설가들은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평화의 언어로 세상을 물들이고 싶습니다.
서귀포 바람, 애월의 파도, 북촌의 눈물, 위미의 수평선, 쇠소깍의 고요를 생각하며, 두려움과 연민이 어룽진 손으로 제주도민들께 편지를 씁니다. <작가, 제주와 연애하다>입니다. <필자>
'육지 것'의 고백
'육지 것'이라는 말, 처음 들었을 때 참 낯설고 불편한 단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이 단어가 친숙하지는 않습니다. 이 말을 처음 들었던 날 저는 이 불편한 말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라 잠시 생각이 정지되었습니다. 사람한테 '것'이라는 의존명사를 쓰는 것도 낯설었지만 대체 나를 무엇으로 생각하기에 이런 막말을 하는가라는 생각도 솔직히 했습니다. 그러나 그 형은 술자리 내내 제주도에서 온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육지 것'이라 명명했습니다. 어쩌다 육지 사람들은 제주도 사람들에게 '육지 것'이 되었을까요.
시곗바늘은 제주 4·3항쟁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시간을 담은 현기영의 <순이 삼촌>은 4·3의 흔적을 그려 내고 있습니다. 소설이 참혹한 현장을 모두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소설을 읽어 내려가는 내내 가슴을 짓누르는 아픔을 경험했습니다. 그날 제주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제주 토박이들은 꿈에서도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아버지가, 엄마가, 삼촌이, 조카가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가야 했습니다. '육지 것'들에 의해서 말입니다. 내 가족이 누군가에게 주검이 되었다면 그 심정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내 삼촌이, 작은아버지가 제주도에 가서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해도 그날 이후 육지 것들은 모두 죄인이었습니다. 제주도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제주도 사람들은 육지 것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섬 것'들이 되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노순택 |
'육지 것'인 저는 작년 1월 제주 강정 마을 해군 기지 건설 반대 깃발을 들고 사흘 밤 나흘 낮 동안 걸었습니다. '육지 것'에 대한 반성으로 생명의 섬, 평화의 섬 제주를 지키기 위해……. 겨울 찬바람은 익숙지 않은 발바닥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깃발은 목포를 거쳐 제주 강정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우리의 정성이 제주에 닿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저의 순진한 생각이었습니다. 제주 주민과 주민 사이의 소통을 막는 또 다른 '육지 것'들이 제주 강정 마을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더 강한 정성을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8월, 저는 또다시 제주 도청을 향해 아스팔트 열기를 느끼며 걸었습니다. 밤에는 야영을 하면서 말입니다. 이런다고 '육지 것'이 '뭍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여름휴가와 겨울휴가를 보냈는데 이 정도의 노력은 정성의 '정' 자에도 들지 않는지 비통한 소식들이 연이어 들려옵니다.
오늘도 다음 카페 '구럼비야 사랑해'에 들어가 강정 마을 소식을 듣고 안타까워합니다. 그것이 육지 것인 제가 할 수 있는 일의 다입니다. 강정 마을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아직 '뭍사람'이 될 수 없구나, 하며 스스로 책망합니다. 잠들 무렵 눈을 들어 세상을 둘러볼 때에야 내가 낮 동안 잊어버린 일들이 떠오릅니다. 비겁하고, 용기 없는 일상을 돌아봅니다.
섬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섬 것'이라는 이름과 섬을 무덤으로 만들다 '육지 것'이 된 육지 사람들을 두고 누군가를 탓해야 한다면 바로 육지 것입니다. 저는 '육지 것'이라는 말을 들어도 싸지만 제주도민들에게 섬 것이라는 말은 견딜 수 없는 아픔일 겁니다. 아직도 유족들에게는 4·3은 끝난 것이 아닌 진행형인데 정부는 제주 강정 마을에 해군 기지를 건설하겠다고 합니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지 못한 채 반복하려고 하는 정부의 모습에 답답함을 넘어 비통함에 빠져들게 합니다. 오늘 60년 전 상처를 풀지 못하고 떠난 '순이 삼촌'을 불러봅니다. 메아리는 환청처럼 귓전을 때립니다. 제주가 4·3의 상처를 씻어내고 생명의 섬, 평화의 섬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제주 해군 기지 건설 반대에 한걸음 더해, '육지 것'이라는 말보다 '뭍사람'이라는 말을 들어보고 싶은 하루입니다.
김희정 시인. 2002년 <충청일보> 신춘문예, 2003년 <시와 정신>으로 등단. 시집 <백 년이 지나도 소리는 여전하다>(한국문연 펴냄), <아고라>(도서출판심지 펴냄), <아들아, 딸아 아빠는 말이야>(화남출판사 펴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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