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정부 들어서 경색됐던 한반도 정세와 거의 모든 경협 프로젝트가 중단된 현실을 감안할 때 남·북·러 3국 정상 모두가 갑작스럽게 긍정적 신호를 보내는 가스 프로젝트가 주목을 끄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가스 프로젝트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멀어도 한참 멀다. 이 문제를 둘러싼 어떠한 형태의 합의도 과거의 합의 수준을 뛰어넘기엔 아직 준비가 덜 되어있다. 현재로선 2015년부터 한국이 러시아로부터 연산 750만 톤의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도입한다는 원칙적인 합의 외에 어떠한 것도 확정된 것이 없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합의를 해 나가야한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부터가 중요하다. 담당자들의 의지와 확고한 국가적 방향설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대북정책, 대주변국 정책 및 우리의 에너지 정책과 연동된 방향들 말이다. 그런데 이 부분과 관련해 아직 충분한 준비가 덜 되어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새롭게 조성된 분위기가 의미 없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 분위기의 동력을 살려서 새로운 전기를 만들려면 정말로 비상한 노력과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지금까지처럼 한번 각광을 받다가 다시 언제 그랬느냐는 듯 비현실적이라며 관심이 시들게 된다.
사실 남·북·러 가스 프로젝트는 새로운 이슈가 아니다. 이미 한국이 옛 소련과 수교한 직후부터 그리고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의 러시아산 가스 도입 협상과 가스협정 체결 및 동북아 공동체 형성 노력 등이 정책적으로 추진되면서 이 프로젝트는 단골 메뉴처럼 등장했다. 긴장된 지역 정세를 해소하는 데 일대 전기를 가져올 수 있고 새로운 협력의 회랑(corridor)을 에너지를 매개로 해 창출한 후 이를 철도·도로·전력망 등과 복합 연계시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매력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젝트는 아직까지 실질적인 진전을 이룩하지 못하고 있다. 남·북·러 3국간 협력위원회도 구성되지 못한 채 관심을 끌만하면 사라지고 또 완전히 사장된 듯 하면 다시 살아나는 식의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
지역 정세의 변환과 적대국간 협력 및 새로운 공동시장 창출이라는 매력 포인트, 즉 지정학과 지경학의 조합에 의한 에너지 시장 및 질서 재편이라는 요소는 대단히 유혹적인 요인들이다. 그럼에도 실질적인 진전을 이룩하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한걸음 떨어져서 상황을 살펴보자. 남·북·러 가스협력 프로젝트의 성격은 국제적으로 볼 때 중앙아시아 가스를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파키스탄까지 파이프라인으로 연결한 후 시장에 공급하자는 프로젝트와 매우 비슷하다. 이 프로젝트가 제대로만 가동된다면 여기에 천연가스의 강자 이란도 포함시킬 수 있어 이는 국제적으로 매우 매력적인 프로젝트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항상 아프가니스탄 정세에 발목이 잡힌다. 그 다음엔 항상 정치적 불안정에 휩싸이는 친중국 노선의 파키스탄에 의해 흔들린다. 그리고 그 다음엔 소위 불량국가들에 대한 의구심에 발목을 잡힌다. 즉 미래를 개척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매개로서의 프로젝트를 현실과 과거가 발목을 잡는 형국이다. 남·북·러 가스 프로젝트 또한 이러한 상황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경제적 기술적 난제들은 차지하더라도 정치적 현실과 과거의 적대적 경험이 여전히 이의 발목을 잡고 있다.
초국경적 경제협력, 특히 에너지와 같은 전략적 자원을 매개로 한 경제협력은 지정학과 지경학 모두를 뛰어넘는 절실한 현실적 필요성이 존재하지 않는 한 그 실현이 매우 어려운 일이다. 냉전기 유럽과 소련이 에너지 협력, 특히 가스 협력을 성사시켜 현재까지 이른 데에는 이러한 지정·지경학적 난제를 뛰어넘는 절실한 이유가 상호간에 존재한데다 이를 현실화 시킬 수 있는 뛰어난 외교역량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시 유럽 국가들에겐 전후의 경제 부흥과 경쟁력 강화를 위해 값싼 에너지가 절실히 필요했다. 특히 전후 경제 부흥에 목을 맨 프랑스·독일·영국이 값싼 에너지의 공급원에 대한 갈증이 심했다. 이때 이들에게 가용한 공급지역은 알제리와 소련 밖에 없었다. 결국 유럽은 알제리와 소련과 가스협정을 체결하고 현재까지 유럽의 산업을 움직이는 주요한 에너지로서 이들 국가의 가스를 활용하고 있다. 소련의 입장에서도 전후 사회주의 경제건설과 공산주의 국가 소련의 이념을 실현할 현대적 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서방과의 협력과 안정적이고 장기적으로 보장되는 경화(hard currency)수입이 필요했다. 마샬 원조에 대응해 동유럽 공산국가들에 대한 원조를 진행해야 하는 필요성도 있었다. 이 때문에 서방과의 협력에 거부감을 보이는 내부의 반발을 무마시키면서 공산 소련과 민주 서유럽 국가 간 장기적인 에너지 협력이 가능했던 것이다.
▲ 러시아 가스관 연결 공사 장면 ⓒ뉴시스 |
다시 남·북·러 가스 협력에 대해 생각해보자. 과연 그들과 우리에게 당시의 유럽과 소련만큼의 절박성이 존재하는가? 아니 달리 표현해 절박성이 존재한다는 장기적 분석이 존재하는가?
소위 한반도와 러시아를 아우르는 3대 메가 프로젝트(철도, 전력, 에너지)는 이미 전문가들 사이에서 그리고 주변국가간 최고위급 정치인들 사이에선 익숙한 이슈다. 철도 프로젝트의 경우엔 나진항 개발 계획과 마찬가지로 사실상 정치적 결단만 남아있는 상황이고 가스 프로젝트의 경우도 노선 등 실무적 현안에 대해서는 개략적이지만 연구가 상당히 진행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한때 주목받다가 사라지는 현상을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문제가 던지고 있는 함의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놓고 주변국들의 계산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다 우리 지도층과 국민들이 이를 종합적으로 수용하기 보다는 분절적으로, 즉 어떤 때는 경제적 측면을 중심으로, 또 다른 때에는 지나치게 정치적 측면을 중심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산 가스의 경우 남·북·러 3국 협력 사업은 정치적으로는 매우 매력적이지만 경제적으로는 공급국이나 소비국 모두 현실적 절박성은 아직까지는 부족하다.
천연가스와 연관해 그동안 소련, 그리고 이를 계승한 러시아의 주요 수출국은 유럽이었다. 물론 러시아로서는 유럽에 대한 수출 의존도를 낮추고 새로운 대체 시장으로서 아시아 시장을 염두에 두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시아 시장 공급을 위한 준비 조건이 모두 충족된 상황이 아니다. 가스는 탐사와 개발에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기 때문에 본격적인 개발 이전에 장기 수요를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소위 갖고 싶으면 돈을 내라(Take-or-Pay)는 방식이 유행하는 이유다. 물론 수요자 입장에서 대안이 있을 경우엔 공급자가 불리해진다. 결국 치밀한 전략과 판단에 의해 장기 수급에 대한 가격 및 다른 요소들이 종속되어 지는 것이다. PNG가 아닌 LNG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수급 체인이 한번 형성되려면 사전에 막대한 투자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현재 러시아가 동북아 지역에 가스를 공급하기 위해선 최소한 20년 이상의 장기 수급 계약이 필수적이다.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개발도 좋고 파이프라인 노선도 좋고 물량도 좋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장기 수요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다. 공급자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전제되지 않는 한 서두를 이유가 없다.
현재 러시아산 가스와 연관해 동북아에서 장기 물량 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대표적인 국가는 한국·중국·일본이다. 한국은 2015년부터 매년 750만 톤씩의 물량을 도입하기로 한·러간의 정상회담을 통한 합의를 이룩했지만 현재 구체적인 후속 협정을 맺지 않은 상황이다. 중국은 국내 에너지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원유와 함께 러시아산 가스의 장기도입이 필요하지만 가격문제에 있어 양보할 생각이 아직은 없다. 러시아의 입장에서도 ESPO 부설시의 장기차관 등 다른 요인으로 인해 원유 공급가에서 손해를 보았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현재 양국이 치열한 힘겨루기와 수 싸움을 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정치·영토적 난제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옛 소련시절부터 에너지 협력을 진행해 온 역사가 있다. 비록 1970년대 초 시도되었던 야쿠츠 가스전 개발 및 튜멘 유전개발 사업 등이 당시의 복잡한 정치적 이유로 좌초 되었지만 사할린을 중심으로 한 에너지 협력은 이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이미 사할린-1과 사할린-2에 성공적인 참여를 한 일본은 최근 완공된 LNG 수출기지를 중심으로 해 러시아와 LNG 협력을 가속화하고 있다.
러시아의 입장에서 보면 동북아 에너지 수급 메커니즘 구축에 있어 최우선적 고려 대상은 중국이다. 한국과 일본은 그 하위의 개념이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은 이미 자주개발 능력이나 공급 다변화를 통해 자국의 산업을 위해 한국보다는 훨씬 안정적이고 값싼 에너지 수급 체인을 확보하고 있다. 중국은 여기다 신흥 에너지 공급 지대인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이 때문에 러시아가 양국을 상대로 가격 협상을 진행하는 데 훨씬 어려운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러시아에게 있어 한국 카드는 매우 유용하다. 마찬가지로 한국도 종합전략을 구축한다면 동북아 에너지 메커니즘 구축에서 러시아산 에너지 협력에 있어서는 중요한 레버리지를 가질 수 있다. 한국은 중국과 접경하고 있는 데다 특정 기간의 수요가 중국을 일정기간 대체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추가적인 지선 및 소규모 가스전 개발의 이점을 살려 한국 외 태평양 지역 국가들에 새로운 시장을 조성할 수 있다. 일본과의 경우도 한반도에 PNG를 깔 경우 러시아의 주요한 에너지 수출 허브항이 한국으로 변모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경쟁을 유도할 수 있다.
현재 동북지역 가스 산업 환경은 러시아의 인프라 투자(사할린 및 이르쿠츠크 지역 가스전 개발)가 완비됐고 이를 실어 나를 통합 가스관 계획이 예정대로 진행 중이다. 최근엔 사할린과 연해주 지역을 아우르는 파이프 라인망도 구축이 완료됐다. 하지만 추가 수요에 대한 장기협상은 아직 확실한 상황이 아니다. 때문에 러시아로서는 한반도 가스관 건설이라는 지정학적 게임을 통해 중국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자 한다. 또한 동시베리아 지역 가스를 한반도에 PNG 형태로 제공할 경우 LNG위주의 협력을 진행해온 일본과의 협상에서도 유리해지며 중국의 한반도 지역에 대한 경제적 영향력의 확대를 적절히 억제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러시아와의 협상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주장들도 나온다. 최대한 천천히 철저히 경제적 실리를 택하면서 하자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가 천연가스 수급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에 기초한 기존의 가스 공급 메이저들을 대변한 기득권 유지론자들의 주장이라는 반론도 만만치가 않다.
이는 러시아와의 가스 협력을 단순히 러시아산 가스의 한국 도입 문제로 치환하는, 이를 경제적 측면에서만 활용하자는 주장이자 단순한 계산법이다. 남·북·러 가스협력은 북한 핵 문제를 포함해 통일 후 북한 재건 비용 감소 뿐 아니라 북한에 대한 중국의 과도한 영향력의 제어, 그리고 한국 기업들의 북한 진출 시 직면할 에너지 투자 문제를 사전에 해결할 수 있는 복합적 협력 사업이다. PNG는 한번 깔리면 이를 대체하기가 어렵다. 경로 의존성이 그만큼 강한 것이다. 남·북·러 가스 협력의 이면엔 단순한 경제적 측면만이 아닌 유럽·소련(러시아) 협력처럼 더 깊은 함의도 내재되어 있으며 이러한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
남·북·러 가스 프로젝트를 제대로만 가동된다면 여러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먼저 정치적 측면이다. 한반도 긴장완화, 동북아 신질서 구축, 중국의 대북한 영향력의 과도화 방지, 남·북·러간 제도적 협력틀의 공고화 등 상당히 매력적인 측면이 있다. 둘째 경제적 측면이다. 한국의 가스 도입선 다변화, 클린 에너지 사용이 점증하는 상황에서 장기적 공급 안정망 확보, 가스관 건설 과정에서의 북한에 대한 복합적 경제협력 분야 창출 가능, 공급 운송 코스트의 저감 등 역시 매력적이다. 여기다 세계 가스 및 에너지 시장의 변화 또한 중요한 변수다. 셰일가스 등의 수급도 중요하다. 하지만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후 보여졌 듯 전 세계 에너지 정책 변화를 초래할 비(非)전통안보위협의 증대에 따라 안전하면서도 환경오염이 적은 천연가스와 같은 에너지 수요량이 급증할 수도 있다.
중장기적으로는 2011년 이후의 중기수급에 있어 한국이 과연 얼마나 안정적으로 그리고 값싸게 우리 산업 및 안보에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느냐는 문제도 개재된다. 중국과 일본이 값싸게 그리고 안정적으로 러시아와 에너지 협력을 확대할 때 한국이 북한을 통과하는 PNG문제를 정치적 대결로 인해 처리하지 못하면서 뒤처지는 상황이 전개되어서도 곤란하다. 그래서 한·러 가스협력을 남·북·러 가스 협력과 분리하기 보다는 새롭게 러시아산 에너지를 활용해 구축되고 있는 동북아 에너지 메커니즘 과정에서 한국의 레버리지를 높일 수 있는 차원에서 고민해야한다는 주장도 만만치가 않다.
한반도와 러시아 극동 시베리아를 엮어서 경제협력 공간을 새롭게 창출하자는 아이디어는 이미 오래된 구상이다. 남·북·러 가스협력 또한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각각 이념과 정치 체제가 다른 3국간 협력을 의미하지만 중장기적으로 보면 동북아 극동 시베리아 지역의 새로운 성장 지대 건설과 연관된 문제다. 이는 주변국과의 적극적인 협력 메커니즘을 구축해야만 창출할 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협력 메커니즘을 만드는 부분에서부터가 중요하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담당자들의 의지와 확고한 국가적 방향 설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대북정책, 대주변국 정책 및 우리의 에너지 정책과 연동된 방향들 말이다. 그런데 이 부분과 관련해 아직 충분한 준비가 덜 되어 있다.
세계는 지금 자원전쟁 중이다. 세계 각국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자원에 부과되는 수출 및 개발세 등도 계속해서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 환경유지 비용 등이 에너지 개발과 관련해 계속적으로 증대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 천연자원이 부족한 한국은 지속가능한 발전을 담보하기 위해서 해외에서 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해야 한다. 지속적 경제성장과 한국의 안전보장을 위한 필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선 유연하면서도 고도의 협상력을 발휘할 외교력과 정치적 리더십 그리고 복합적 상상력에 기초한 자원전략이 필요하다.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소장 이수훈)가 발행하는 <한반도포커스> 2011년 11·12월호(제16호)에 실린 글입니다. 이번 호의 전체 주제는 '기로에 선 남북관계'입니다.(☞전체보기)
* 원제 : 남·북·러 가스 협력 프로젝트의 성사 여부 - 그 이면과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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