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의 입장에서는 자국의 영해에서 조업하는 외국어선에 대해 조사하는 정당한 행위였지만 필리핀 언론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필리핀 정부가 중국에 '사과'의 뜻을 전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는 최근 아키노 대통령이 필리핀의 영토주권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견지하며 영토방위를 위해 새로운 해군함정을 도입하는 등 군비강화를 강조해 온 최근의 상황을 볼 때 의외의 일로 여겨졌다.
공식적인 '사과'에 대한 사실은 부인됐지만 사후 처리문제를 놓고 중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난사군도 문제를 둘러싼 필리핀 정부의 미묘한 입장을 드러냈다.
난사군도는 남중국해 남단에 위치한 섬들로서 중국과 필리핀은 물론 베트남, 브루나이, 말레이시아가 각각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곳이다. 이 지역은 많은 천연가스와 원유가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을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가장 분주한 무역항로가 지나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영유권을 주장하는 국가들뿐만 아니라 기타 많은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곳이다.
필리핀이 난사군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는 1956년 필리핀 국민인 토마스 콜마가 최초로 이 섬들을 발견했고, 이것을 1978년 마르코스 당시 대통령이 필리핀 영토의 일부로 편입시켰다는 것이다. 더불어 난사군도는 필리핀 서쪽 팔라완 섬으로부터 380km 떨어져 있는 곳으로서 지리적으로도 필리핀과 가장 인접해 있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이 섬들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200여 명의 필리핀 국민을 이주시키기도 했으며 접근의 편의를 위해 항공기 활주로를 건설하기도 했다.
이 지역에서 중국과의 불화는 1995년 중국이 난사군도 인근에 군사적 구조물을 건설하면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후 크고 작은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 난사군도 내의 필리핀 칼라아얀 섬. ⓒ김동엽 |
아키노 대통령은 올해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등을 방문하면서 난사군도 문제를 정상외교의 가장 중요한 사안으로 다루었다. 필리핀의 최우방국이자 중국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의존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인 미국은 과거처럼 필리핀 영토안보에 관해 확고한 의지를 표명하지 않는다. 지역의 평화와 무역항로의 안정을 중시하는 원칙을 강조할 뿐 난사군도에 대한 필리핀의 영토주권을 인정하는 어떠한 입장도 표명하지 않고 있다.
일본은 동중국해에서 중국과의 영토분쟁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필리핀의 입장에 공감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일본의 국익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무역항로의 안전과 평화에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중국을 방문한 아키노 대통령은 무역과 투자의 확대라는 선물(?)을 가지고 돌아왔을 뿐 실제로 난사군도 문제에 관해서는 영토주권에 대한 타협 불가와 이해 당사국 간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중국의 원론적인 입장만을 확인하는 데 그쳤다. 근래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을 중심으로 이 지역에 대한 행동규범(code of conduct)을 수립해야 한다는 논의가 나오고 있지만 중국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추진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역사적으로 강력한 패권국가가 존재할 때에는 국제적인 규범이 수립되어 존중되고 자유주의적 국제관계 논리가 설득력을 발휘하지만, 패권국가의 힘이 약화되고 세력균형에 변화가 일어날 때에는 힘의 논리를 우선시하는 현실주의적 국제관계 논리가 지배적인 것을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해상패권이 이 지역의 평화와 무역항로의 안정을 보장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최근 중국의 급속한 부상으로 이 지역의 해상패권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즉 국내외적으로 많은 문제에 봉착해 있는 미국이 이 지역의 해상패권을 계속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과 함께 비록 중국에게 해상패권을 완전히 넘기지는 않더라도 이를 일부 공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다극화로 나아가는 오늘날의 국제관계를 반드시 현실주의적 국제관계논리로만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상호 복잡하게 얽혀있는 국제적 이해관계와 무역을 통한 경제적 상호의존이 심각한 현실에서 강대국일지라도 일방적으로 힘의 논리를 앞세우는 것은 오히려 국익에 반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필리핀 정부에게 난사군도 문제는 주권국가로서의 체면과 약소국가로서의 현실적인 무력감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어려운 사안임에 분명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리핀 정부가 난사군도 문제에 접근하는 많지 않은 방안 중의 하나가 지역협력체를 활용해 문제를 다자간 논의로 끌고 가는 것이다. 이러한 방안은 이미 여러 차례 거론되었고 실제로 필리핀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중국이 주장하는 개별 당사국 간의 논의에도 응함으로써 다른 국가들의 불만을 사는 등 일관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필리핀 내부에서도 중국과 영토주권을 두고 분쟁하는 것은 무모할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국익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중국은 이미 필리핀에게 가장 중요한 무역 및 투자 상대국이며, 양국관계의 악화는 필리핀에 더욱 많은 문제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난사군도에서 분쟁이 발생할 때마다 필리핀의 여론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또한 이를 다루는 필리핀 정부의 태도도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역력히 보여주고 있다.
* 이 글은 서남포럼 뉴스레터 151호에 실린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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