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일간 <인디펜던트>의 중동 특파원 로버트 피스크가 이집트 사태를 진단했다. 피스크는 11일자 칼럼에서 이집트의 종교 갈등은 기존에도 있어 왔지만, '시민혁명' 이후에도 여전히 소수자 문제가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다음은 칼럼의 주요 내용. (☞원문 보기) <편집자>
▲ 십자가를 들고 시위에 나선 이집트의 콥트 기독교 시위대 ⓒAP=연합뉴스 |
폭력사태는 아랍의 봄 이후 소수자들의 불편한 위치를 보여준다
통계자료를 보는 것은 매우 쉽지만 미래는 알기 어렵다. 약 2000만 명의 콥트 기독교인들이 이집트에 산다. [아랍]지역에서 가장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는 셈이다. 하지만 고(故) 안와르 사다트 전 이집트 대통령[재임기간 1970~1981]은 스스로를 "이슬람 국민들을 위한 이슬람 대통령"이라고 묘사했다. 기독교인들은 이를 잊지 않고 있다.
물론 지난주 아스완주(州)의 기독교 교회에 대한 공격이 여기에 불을 붙였을 것이다. 26명의 사망자는 사다트의 후계자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을 몰아낸 시민혁명 이후 가장 많은 것이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의 두려움은, 콥트 기독교 지도자가 무바라크의 퇴진 이틀 전까지 혁명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것이다.
콥트 기독교는 이집트의 자생적 기독교 분파다.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선지자 모하메드가 태어나기 전인 고대 로마 제국 시대에는 그들이 다수파였다. 그렇다면 콥트 기독교인들은 '아랍인'인가? 어떤 콥트 기독교도들은 그렇다고 하고, 다른 이들은 자신들이 '진짜' 이집트인이라고 한다. (이슬람교도가 10배나 더 많은데 이렇게 말하다니 좀 너무한 것 같지만)
혁명 기간 그들은 [시위의 거점] 타흐리르(해방) 광장에 도착해 기도했고 무슬림들은 그들을 보호해 줬다. 또 무슬림들이 기도할 때는 이들이 무슬림들을 보호해 줬다. 하지만 그건 그때의 일이었다.
9일 밤 일어난 끔찍한 일들에 대해 이집트에 늘 있어온 음모론이 또다시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에 앞서는 훨씬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많은 중동 국가의 기독교인들은 언제나 그들이 소수라는 말을 들으며 정부에 자신들을 보호해 주기를 요청한다.
[2005년] 암살당한 레바논 총리[라피크 하리리]는 기독교인들에게 "[레바논의 기독교 사제] 스페이어 추기경은 나의 친구"라고 말하곤 했다. 새로 취임한 베차라 라이 추기경은 프랑스 파리에서 시리아 정권에 국내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줘야' 한다고 제안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추기경은 자신의 말이 왜곡됐다고 주장했지만 이 논란 때문에 오바마 대통령은 그를 초대하겠다는 계획을 취소했다.
[지난 2009년 교황이 방문한 바 있는] 요르단은 기독교 공동체들의 좌장 역할을 한다. 심지어 알제리에도 소규모 프랑스 기독교인 공동체가 있다. 1996년 알제리의 티비린에서는 7명의 프랑스 수도사들이 (아마도 무슬림들에 의해) 납치돼 살해당했다. 알제리 대주교는 나무에 매달인 사망자들의 잘린 머리를 보고 신원을 확인해야 했다면서 "예수님도 종교의 이름 아래 저질러진 인간의 폭력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집트에서도 '종교적' 폭력사태는 새로울 게 없다. 그러나 이집트 혁명은 당연히 이[같은 과거]보다 더 완전할 것으로 여겨졌다. 모든 아랍인들이 본받으려 할, 미래를 향한 빛나는 길이 될 것으로 말이다. 하지만 글쎄다.
[런던에 기반을 둔 범 아랍계 신문 <알쿼드 알아라비> 편집장인] 언론인 아브델 바리 아트완은 종종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이집트 혁명은 완벽하지 않다." 아마 아트완은 그 말을 한 번 더 되풀이할 것이다.
* ( )는 원저자의 표기이며 [ ]는 옮긴이가 추가한 내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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