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2012년 여름, 연구 수행 차 방문한 북경 거리에는 '북경정신(北京精神)'이라는 네 글자를 새긴 입간판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애국(愛國)', '창신(創新)', '포용(包容)', '후덕(厚德)'이라는 '정신'의 실천 가치들이 앞뒤 또는 좌우를 함께 장식하고 있었다. 서점 신간 코너에는 '북경정신'을 해설하는 서너 권의 책이 벌써 자리 잡고 있었다. 나중에 조사해 보니, '북경정신'은 "사회주의의 핵심적인 가치와 정신문화를 구현"하기 위해 2011년 11월 북경시가 공포한 구호였다.
▲ 2011년 11월 북경시가 주창한 "북경정신(北京精神)" ⓒ임대근 |
중국은 구호와 캠페인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경제적으로는 개발도상국이라는 특수성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지금도 중국의 거리와 공원, 대학 캠퍼스 곳곳에는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수많은 구호가 걸려 있다. 이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최근 수십 년간 중국 현대사의 흔적이 스치듯 지나가기도 하고, 중국인들의 삶의 양식과 문화적 특성이 엿보이기도 한다.
사회주의 중국의 구호는 1949년 9월, 마오쩌둥(毛澤東)이 국가 수립을 목전에 두고 정치협상회의에서 행한 개막사의 제목, "중국인민이여 일어나라(中國人民站起來了)"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회주의 중국 수립 이후, 1950년대 구호는 주로 정치적, 경제적인 내용을 직설적으로 쏟아낸 경우가 많았다. 이런 구호들은 반우파투쟁(1958) 같은 정치적 격변의 시기에 더욱 위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마음을 당에 바치자(把心交給黨)"라든지 "1070만 톤 철을 생산하기 위해 분투하자(爲生産1070萬吨鋼而奮鬪)"같은 경우가 좋은 예다.
▲ 1958년 반우파투쟁 당시의 구호 "마음을 당에 바치자(把心交給黨)"ⓒwww.jschina.com.cn |
이런 직설적인 구호가 마오쩌둥 시대를 대표했다면, 개혁개방 이후 덩샤오핑 시대의 구호는 다소 추상화되거나 비유적으로 바뀌었다. 지금도 중국 거리에서 간혹 눈에 띄는 "발전이야말로 굳건한 이치다(發展才是硬道理)"는 천안문 사태로 인해 개혁개방이 위기를 맞았던 1980년대 말, 덩샤오핑(鄧小平)이 외친 구호였다. 덩샤오핑은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면서 직설의 언어와 비유의 언어를 적절히 구사했다.
▲ 지금도 중국 거리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발전이야말로 굳건한 이치다(發展才是硬道理)" ⓒwww.jschina.com.cn |
1970년대 말 등장한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는 쥐를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不管黑猫白猫, 抓得到老鼠就是好猫)"라는 말은 지금까지도 개방정책을 가장 잘 설명하는 촌철살인의 구호로 여겨지고 있다. "창문을 열면 신선한 공기도 들어오지만, 파리와 모기도 들어온다(打開窓戶, 新鮮空氣進來了, 蒼蠅蚊子也進來了)"라는 말은 개혁개방과 더불어 당 간부의 부패와 부정을 비판하는 말로 회자됐다. 동시에 "가난은 사회주의가 아니다(貧窮不是社會主義)"같은 직설의 언어도 여전히 자주 등장했다.
장쩌민(江澤民)과 후진타오(胡錦濤) 시대에도 역시 지도자들의 정책을 포괄하는 구호가 유행한 것은 사실이다. "삼개대표(三個代表)"라든가 "조화로운 사회(和諧社會)"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또한 WTO 가입 등의 변화와 더불어 중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국제와 궤를 맞추자(與國際接軌)" 같은 구호가 대유행하기도 했다.
동시에 중국 사회가 점차 다원화하면서 각 조직과 기구, 단체들이 저마다 내부 결속을 위한 구호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또 '인민'의 생활습관을 바꾸려는 구호도 급증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가장 빈번하게 눈에 띄는 단어 중 하나는 '문명(文明)'이다. 지금도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는 '문명'은 중국 구호의 단골 단어다. "아름다운 환경을 같이 만들고, 문명의 캠퍼스를 함께 창조하자(共建美好環境, 同創文明校園)"든지 "저마다 문명의 용어를 말하면, 캠퍼스 곳곳이 봄입니다(文明用語人人講, 校園之内處處春)" 같은 문구들은 중국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문명'의 강조는 공산당과 정부가 1986년 내세운 '사회주의 정신문명 건설 방침' 이후 급격하게 늘어왔다.
이렇게 변해 온 중국의 구호가 후진타오와 시진핑의 정권 교체기를 맞이하면서 '북경정신'이나 '중국의 꿈'과 같이 비유적이고 수사적이며, 유연한 표현으로 변화하고 있는 중이다. 이는 강성의 직설적 언어가 지배하던 정치와 경제 중심의 시대가 저물고 완곡한 은유의 언어로 표상되는 문화의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사회 내부가 점차 다원화하면서 이제 일원적이고 단선적 주장으로는 내부 전체를 아우르기 어렵게 된 대내적 환경의 변화, 국가적 위상이 수직 상승하면서 국제 사회를 의식해야 하는 대외 환경의 변화 등도 이러한 상황에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강력한 내부 결속이 필수적이었던 시대정신이 이제 내부와 외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의 언어를 요청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요컨대, 덩샤오핑 시기를 전후할 때까지만 해도 중국의 구호는 내부를 향한 메시지였다. 그러나 장쩌민 이후, 후진타오와 시진핑 시대의 구호는 이제 내부만이 아니라 다분히 외부를 의식하는 중이다. "우리만 일치단결해서 잘 먹고 잘 살자"는 말은 체재 내부를 결속하는 데는 유용할 수 있어도, 국제 사회의 책임 있는 강국의 모습을 보여주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중국의 구호는 의미의 해석이 중층적이며 다원화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는 것이다.
구호와 캠페인은 결핍의 반영이다. "생산량을 늘리자"고 강하게 외칠수록, 그것은 현재 생산량이 저조하거나 목표치에 미달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러므로 어느 사회든 유행하고 있는 구호와 캠페인을 살펴보면 사회의 결핍된 측면과 그것을 충족함으로써 얻으려고 하는 효과나 이익이 무엇인지를 알아낼 수 있다. 캠페인은 주로 탑-다운(top-down)의 방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강력한 대중 미디어라는 매개적 힘을 갖는 통치 집단에 유리한 사회 통합의 방법이다. 실제로 전후 냉전의 시대와 고속 경제 성장의 시대에는 이러한 방법이 유용했다. 그러나 오늘날 다원화되고 세계화된 사회에서는 집단을 일체로 간주하려는 구호가 거부당하기 일쑤다. 그런 상황에서 쉽게 동의되는 구호는 역시 윤리나 건강 등과 같이 보편적이고 생활 중심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시진핑이 "중국의 꿈"이라는 말로 자신의 시대 국가적 비전을 제시한 것도 어쩌면 이런 고충의 결과물이었을지 모른다. 이제 중국 사회는 이 비유적 구호의 내용을 채워야 하는 숙제를 떠안게 됐다. 공산당 당교(黨校)와 중국사회과학원 등 국가 이데올로기의 기초 이론화 작업을 해오고 있는 기관과 그 내부 지식인들이 분주해지기 시작한 까닭이다. 그 결과는 분명히 역사적이고 과학적이며, 통합적이고 국제적이며, 정치적이고 이념적이며,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민족적이고 세계적이며, 지역적이고 지방적이며, 경제적이고 사회적이며, 문학적이고 문화적이며, 생태적이고 환경적이며……그러하고 저러한 방식으로 도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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