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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우익 교과서, '오키나와 집단 자결' 진실 회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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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우익 교과서, '오키나와 집단 자결' 진실 회피

[韓日 교과서 전쟁, 해법은?] '군대는 주민을 지키지 않는다' 교훈 얻어

2011년 3월 말 중학교 교과서 검정결과가 공표됐다. 이곳 오키나와 지역에서도 교과서 검정 결과는 매번 매스컴에서 크게 다룰 정도로 주목받고 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오키나와 전투와 관련한 기술이 문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2007년 고등학교 일본사교과서에서 오키나와 전투 관련 기술이 왜곡되었다. 문부과학성이 강제집단사(집단 자결)와 관련 군의 명령∙강제가 있었다는 기술에 관해 검정의견을 붙여 내용을 변경시킨 것이다. 이때 오키나와현 섬 전체에서 반대운동이 일어나 결국 11만 명이 넘는 현민대회가 오키나와 본섬과 낙도에서 개최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후 오키나와 현민은 교과서에 오키나와 전투가 어떻게 쓰였는지, 문부과학성은 어떤 검정의견을 붙였는지 주시해 왔다. 그러한 가운데 이쿠호샤(育鵬社), 지유샤(自由社)라는 역사왜곡 교과서가 검정에 합격했다는 보도가 들려왔다.

이 교과서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은 늦은 감도 있어 언급을 피하겠지만 오키나와 전투에 관한 기술에 대해서는 확인해 두고 싶다. 지유샤는 "미군이 상륙하는 가운데 궁지에 몰린 주민이 가족 모두 집단 자결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라고 기술하고 이쿠호샤는 "미군의 맹공으로 피할 곳을 잃어 집단 자결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여기엔 오키나와 전투의 실상이 정확하게 쓰여 있지 않다.

오키나와 전투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강제집단사'는 주민들을 강제로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으로 가족끼리, 또는 주민끼리 서로가 서로를 죽인 비참한 사례였다. 죽음에 이른 원인으로는 적에 대한 공포와 궁지에 몰린 자의 절망감, 철저한 황민화교육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주민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구(舊) 일본군, 즉 천황의 군대인 황군의 존재, 그리고 '황군에 의한 명령∙강제∙강요∙유도' 역시 중요했다.

오키나와에 배치된 제32군은 '군관민공생공사의 일체화'를 방침으로 내걸고 상륙 전부터 '포로가 되면 남자는 전차에 치여 죽고 여자는 강간당하고 살해당한다'는 얘기를 퍼뜨려 군대와 동일하게 '포로가 될 거라면 자결하라'고 지도해 왔다. 이러한 가운데 부대에서 면사무소 직원(병사주임, 병사계라는 징병을 담당하는 직무)에게 군대 무기인 수류탄이 배포되었다.

이러한 복잡한 요인이 겹쳐져 부모나 부인의 목을 면도칼과 낫 등으로 베고, 밧줄을 이용해 집단으로 목을 매거나 수류탄으로 자살했다. 오키나와 주민은 결코 '국가를 위한 마음, 그 희생적 정신의 발로'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황군에 의한 주민학살'과 같은 뿌리에 있다는 점이 많은 오키나와 현민의 증언에서 명백해졌다.

이와 같은 사례뿐만 아니라 군대에 의한 '주민학살'이 많이 발생했다는 점이 오키나와 전투 중에 일어난 비극이었다. 스파이 혐의로 학살당하거나 식량 강탈 및 가마에서 쫓겨나는 일 등이 많이 발생하고 이로 인해 많은 주민이 희생되었다. 오키나와 전투에 대한 연구는 이런 실태를 파헤치면서 '주민에게 있어서 오키나와 전투란 무엇인가'를 추궁해왔다.

▲ 1972년 5월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이 이루어진 뒤 이뤄진 미군기지 규탄 집회. ⓒ마이니치신문
여기에서 분명해진 것은 '군대는 주민을 지키지 않는다'라는 교훈이었다. 이것은 많은 오키나와 현민의 체험에서 공유했던 점이다. 물론 자국의 군대뿐만 아니라 타국의 군대도 동일했다. 주민이 투항할 때 목숨을 구해준 것은 분명히 미군이었다. 그러나 수용소에서 벌어진 많은 범죄행위, 미군 지배 당시와 복귀 후 오키나와 내에서 터진 수많은 사건∙사고는 모든 것이 군대를 우선으로 돌아가면서 오키나와 주민의 인권이 침해받았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지금도 오키나와 해병대는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돼 많은 주민을 살해하는 쪽에 서 있다. 오키나와 현민은 간접적으로 가해자가 되는 것을 부정하면서 전쟁과 군 기지에 반대해 왔다.

이와 같이 오키나와는 어느 나라의 군대도 부정하면서, 군대에 의한 피해를 없애야 한다는 기지반대 운동, 반전 운동을 진행해 왔다. 그리고 그 싸움은 비폭력투쟁으로 일관해 왔고, 미국을, 그리고 일본정부를 움직여 왔다. 이와 같이 '군대는 주민은 지키지 않는다'는 교훈은 오키나와 전투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오키나와 주민의 평화사상의 원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여름에 갑자기 오키나와에서도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계열의 교과서를 채택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많은 현민이 우려하고 있다. 그 지역은 야에야마(八重山) 지구라는 오키나와 본섬에서 떨어진 낙도 지역이다.

이시가키섬(石垣島), 이리오모테섬(西表島), 요나구니섬(与那国島) 등의 섬들로 이루어진 야에야마 지구는 대만과 국경을 접하고 예로부터 바다를 통해 열려진 지역이었다. 그러나 센카쿠열도(尖閣諸島)라는 지역의 영토 문제는 섬에 내셔널리즘을 부추기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2010년 이시가키시에서 16년 만에 보수적인 시장이 탄생했다. 그는 취임 이후 센카쿠열도에 관한 정치집회에 얼굴을 내밀거나 지금까지 인정하지 않았던 자위대 전투함의 이시가키 입항을 인정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 하에서 교과서 채택에 관해서도 일부 교육위원회가 단독이라고도 할 만한 방법으로 규칙을 변경해 현장 교원의 의견을 무시한 채택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그 방법은 전국에서 '새역모계 교과서' 채택 시에 사용되는 수법 그 자체다. 현재 많은 시민이 그러한 움직임에 반대하고 아이들에게 바른 역사인식을 배울 수 있는 교과서를 채택하도록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이와 같이 교과서채택운동은 교육현장에 국한하지 않고 자위대 유치, 국경 문제에 관한 갈등 격화 등의 움직임과 연동해 있다. 우리들은 이러한 방법으로는 동아시아의 평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오키나와 현민이 많은 희생을 내고 얻은, '군대는 주민을 지키지 않는다'는 교훈을 지켜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오키나와가 일본을 향해 그리고 동아시아를 향해 평화를 발신하는 장이 되도록 계속 노력해 나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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