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총장은 위기에 빠진 개성공단 문제에 한국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 상황이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이것을 시작으로 개성공단 문제를 풀어가면서 한반도신뢰프로세스를 적극 가동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최근 북한의 잇따른 도발은 북한의 핵 포기와 북미관계 정상화를 골자로 한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을 위한 북한의 전략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물론 북한의 이러한 움직임은 처음은 아니다. 1994년 제네바합의, 이후 2005년 9.19 공동성명 등 북핵 문제의 해결을 위한 여러 시도가 있었으나 결국 결실을 맺지 못했다. 오바마 정부 1기에도 북한 문제의 해결을 위한 미국 주도의 북미협상 시도가 있었으나 이명박 정부의 선 비핵화 입장으로 무산된 바 있다.
정세현 총장은 이를 반면교사 삼아 현 상황에서 박근혜 정부는 북미협상을 방해해서는 안되며,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오히려 이 과정을 촉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박근혜 정부에서 아직 선(先) 비핵화 요구가 나오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고 지적했다.
북한의 핵실험에 대한 유엔 안보리 제재 결의안에 중국이 동참하고, 중국 내부에서도 북한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과 관련해 일각에서는 중국도 이제 북한을 버리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에 대해 정 총장은 중국 공산당 중앙당학교의 덩웨이원 교수의 사례를 들며 중국은 북한을 버리지 못한다고 일축했다.
덩웨이원 교수는 지난 2월 28일 자 <파이낸셜 타임스>에 '중국은 이제 북한을 혼내주어야 한다'는 주제의 기고문을 발표했다. 그런데 그는 이 글 때문에 공산당 중앙당학교가 발행하는 <학습시보>의 부편집인 자리에서 물러났다. 정 전 총장은 이것이 중국이 북한과의 관계를 얼마나 중대하게 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이날 대담은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가 진행했다. 다음은 대담 전문이다. <편집자>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
프레시안 : 지난 2월 12일 3차 핵실험 이후 3월 들어 북한의 도발, 위협수준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고 이에 대한 한미 대응도 강경해지고 있다. 이로 인해 한반도 안보 위기도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그런데 북한의 도발은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대해 한반도 상황의 근본적 불안정성을 보여줌으로써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을 위한 논의를 재촉하기 위한 의도라는 분석도 있다. 3월 이후 한반도의 현 상황에 대한 진단부터 해보자면?
정세현 : 우리 언론에는 북한의 움직임만 보도하지, 북한 움직임의 배경이나 원인에 대해 보도를 잘 안 하니까 국민들로서는 북한의 도발이 난데없는 일이고, 호전적인 본색을 드러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국민들은 '북한이 좀 이상하다. 내부에 무슨 문제가 있나? 망하려고 저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핵실험으로 인한 국제제재는 북한의 당연한 업보고, 한미연합 군사훈련인 키 리졸브나 독수리훈련(Foal Eagle) 등은 해마다 하는 정례 군사훈련인데 북한이 너무 요란하게 대응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정도만 돼도 인과관계에 관심을 갖고 분석적으로 보는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으면 '김정은이 나이가 어려서 국내정치에서의 위상 강화를 위해 주민들에게 뭔가 보여주려고 겁 없이 위험한 군사놀음을 하고 있는 것 아니냐'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분석이나 평가를 하다 보면' 저런 북한을 상대로 해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추진하겠다는 박근혜정부의 대북 정책이 문제 있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이쪽에서 원인 제공을 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빼고 보면 '저런 사람들을 상대로 신뢰 프로세스를 추진할 수 있겠냐'는 반론이 나올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북한이 3월 이후 정전협정 백지화 선언, 1호 전투근무태세 돌입, 남북 간 군 통신선 차단, 개성공단 진입 금지 조치 등 일련의 강경 대응을 잇따라 발표하는 것은 나름대로의 배경과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올해 3월 1일부터 4월 말까지 진행되는 독수리 훈련의 강도가 예년에 비해 훨씬 세졌다. 이명박 정부는 정권 말기에 북한을 위협할 수 있는 한미합동군사작전계획을 세웠다. 이는 북한의 국지도발에 대한 한미의 대응계획인데, 북한이 국지 도발을 감행할 경우 북한의 심장부를 타격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미 간 합의된 내용이다. 올해 키 리졸브(3월 11-21일)가 끝나고 난 뒤에 독수리 훈련이 유난히 세게 전개되었다. B-52 폭격기가 괌 미군기지에서 한반도에 공개 출격하고, 핵무기를 16발이나 장착할 수 있는 B-2 스텔스 폭격기가 2대나 미 본토에서 한반도 상공까지 날아왔다. B-2는 레이더에도 잡히지 않는 스텔스 폭격기 아닌가. 게다가 미국의 최첨단 전투기인 F-22 전투기가 일본의 가데나기지에서 한반도로 출격했다. 괌, 주일 미군기지, 그리고 미국 본토에서 미국의 최첨단 공격무기들이 언제든지 북한을 칠 수 있다는 무력시위를 한 셈이다.
이게 이명박 정부 때 한미 간 확정된 국지도발대응계획의 일환인지 아닌지는 내가 솔직히 잘 모르지만,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북한에 대단히 위협적인 것이다. 게다가 핵잠수함에 구축함도 동해, 서해로 오고 하니까. 이런 움직임을 지켜보는 북한으로서는 '이러다 죽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북한의 2월 12일 핵실험 이후 유엔차원의 대북제재 결의안이 지난 3월 7일 통과됐다. 대북제재 결의안 통과에 맞춰 한·미·일은 북한 제재모드에 들어갔다. 여기에 3월 11일부터 21일까지 키리졸브 훈련이 있었고, 3월 1일 시작된 독수리 훈련은 4월 말까지 계속된다. 결국 4월 말까지 북한은 정치·경제·군사 등 전방위에 걸쳐 위협을 받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북한이 이 난리를 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프레시안 : 하지만 일반 국민들이 보기에는 북한이 지난해 12월 12일 장거리 로켓을 발사한 데 이어 올해 2월 12일에는 3차 핵실험을 강행하는 등 군사적 위협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이런 움직임은 북한에 대한 대응이 아니겠냐고 생각할 수 있지 않나?
정세현 : 그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원인이 결과를 낳고, 그 결과가 새로운 원인이 되는 인과관계의 고리 중에서 어느 부분을 잘라내서 분석을 시작하느냐에 따라 책임소재가 달라지는 법 아닌가?. 이번 상황의 인과관계를 제대로 따지기 위해서는 다시 핵문제로 돌아가야 한다.
북한은 "이번에는 오바마 정부와 핵문제를 그야말로 '끝내야겠다'"는 목적으로 오바마 정부 출범 직후인 2월 12일 핵실험을 했다고 본다. 즉 북미평화협정 체결, 북미관계 정상화를 북핵과 맞바꿔 북한체제의 안전을 보장 받겠다고 작정한 것이다. 그런데 북한은 그동안 자기네가 강수를 두면 반드시 미국은 회담에 나왔다는 '성공의 추억'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1993년 3월 NPT 탈퇴, 2006년 10월 1차 핵실험을 하자마자 그동안 압박전략, 무시전략으로 나왔던 클린턴 행정부와 부시행정부가 북미협상에 나섰던 것 아닌가.
이처럼 북한은 자신의 강수가 미국의 관심을 끌어내 대화에 나서게 됐다는 판단을 하고 있을 것이다. 북한의 강수에 대해 미국은 처음에는 제재를 하는 방향으로 움직이지만 결국 비공개든 공개든 회담으로 가지 않았나. 북한은 새로 출범한 2기 오바마 정부와 '이번에는 결판을 내자'는 생각에서 지금 초강수를 계속 두는 것 같다.
사실 1기 오바마 정부 때도 협상을 통한 북핵문제 해법이 시도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의 반대로 무산된 바 있다. 그 과정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오바마 정부 출범 직후인 2009년 2월 13일 당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아시아 소사이어티 초청 연설에서 중대한 발언을 했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은 세 가지가 준비돼있다고 말했다. 첫째는 9.19 공동성명에 명시된 북·미 수교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공동성명 4항에 있던 평화협정 문제를 우선적으로 논의하겠다, 세 번째는 경제지원을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9.19 공동성명의 원래 내용은 북핵폐기를 위해 북미수교와 경제지원, 그리고 평화협정 논의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다만, 평화협정 문제는, 핵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면 별도 포럼에서 논의를 시작한다는 식으로 뒤로 미뤄놨었다. 그런데 북핵문제가 부시 정부에서 해결이 안 되고 오바마 정부로 넘어오니까,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이걸 빨리 해결하려고 평화협정 문제를 앞으로 확 당긴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미국의 구상에 대해 이명박 정부가 반대했다. 우리 정책은 '비핵개방 3000' 이라면서 비핵화의 성의 있는 조치가 있어야 6자회담을 재개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즉 이명박 정부의 '선 비핵화' 장벽에 막혀 오바마 정부는 평화협정 논의를 시작하지 못했고 결국 6자회담도 못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2009년 5월 25일에 북한이 2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북한의 핵실험은 힐러리 클린턴 장관이 이야기한 그 방식으로, 즉 북한의 핵포기와 미국의 북한체제 안전보장 문제에 대해 빨리 논의를 시작하자는 메시지였다.
미국은 핵실험에 대한 유엔제재 결의안을 만들어 놓고 대북 제재를 진행시키면서도 북미협상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그해 7월 23일 태국 푸켓에서 열린 ARF(아세안 지역 안보포럼, ASEAN Regional Forum)회의에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2월 13일에 한 그 이야기를 또 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이명박 정부가 협조를 안 하니까 미국은 움직이질 못했다.
그러다가 11월에 힐러리가 그 이야기를 또 했다. 당시 오바마는 한국에 왔었고, 힐러리는 파키스탄에 있었던 때였다. 그때 클린턴 장관이 파키스탄 기자회견에서 또 그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날 오바마 대통령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즈워스 대사를 평양에 보내려고 하는데, 정상회담 끝나고 공동 기자회견에서 본인이 직접 그 계획을 발표하겠다고 했다.
사실 이 정도 이야기는 수행원 중 차관보급이 발표해도 될 일인데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그걸 발표하겠다고 한 것은 그만큼 북핵 6자회담의 재개를 중시했다는 얘기다. 보즈워스를 평양에 보내서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미국이 수교해주고 평화협정 체결하고 경제지원 해주겠다고 하는 이른바 '힐러리 해법'을 북한에 설명하고 동의를 얻어온 뒤 6자회담으로 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역시 이번에도 이명박 정부가 비협조적으로 나오니까 미국도 힘을 못 쓰게 됐다. 왜냐하면 핵문제의 핵심 당사국은 미국이지만 핵문제가 발생했을 때 최대 피해 당사자인 한국정부가 협조하지 않으면 미국으로서도 사실 별로 나설 이유가 없는 거다. 6자회담에 한국이 안 나오면 회담을 시작할 수도 없는 것이고. 그래서 6자회담 재개 정책은 없었던 것이 되고 오바마 정부도 더 이상 '힐러리 해법'을 추진하지 못했다.
그 대신 이명박 정부가 북핵문제 해결 방법이라고 내놓은 것이 '그랜드 바겐(Grand Bargain, 일괄 타결)' 아니냐. 이명박 정부는 그동안 행동 대 행동, 말 대 말 이런 식의 단계적 점진적인 회담이 결국 북한의 살라미 전술에 말려 들기만 했으니까 이번에는 과거처럼 하지 말자. 한꺼번에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한방에 해결하자는 주장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 미국은 즉각 "전혀 협의가 없었다"는 반응을 보였고, 나머지 중국 러시아 일본 등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물론 북한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결국 '그랜드 바겐'이라는 '이명박 해법'도 그냥 사라진 것이다.
이번에 북한이 오바마 정부 2기가 출범하는 이 시점, 그리고 한국 정부가 새로 출범하는 이 시점에 저렇게 세게 나오는 것은 오바마 정부 1기 때의 '힐러리 해법'을 빨리 가동시키자는 메시지라고 본다. 그런데 마침 이 시점에 독수리 훈련, 키 리졸브 훈련,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안 같은 것들이 함께 돌아가는 시점이기 때문에 그게 구분이 좀 잘 안 돼서 그러는데, 진짜 메시지는 바로 '힐러리 해법'을 적용하자는 것이다.
핵문제에 있어서 사실 핵심당사국은 북한과 미국이다. 북한이 문제를 일으켰고,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과 책임은 미국이 갖고 있다. 실질적으로 북한이 핵카드를 통해 받아내려는 반대급부라는 것이 북한의 안전보장인데 이건 미국만이 해줄 수 있는 것이다. 북한이 1993년 NPT 탈퇴 이후 20년 동안 줄기차게 요구해온 것이 바로 북미수교, 북미평화협정, 경제지원이다.
1993년 3월 핵문제가 터진 뒤 1994년 10월 '제네바기본합의'가 만들어졌는데, 그때 북한은 북미관계 정상화와 경제지원을 요구했다. 북한과 미국이 수교하려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고쳐야 한다. 법적으로 그런 조치가 있어야 한다. 결국 수교라는 정치적 행위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고치는 법적 행위는 표리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클린턴 정부는 '제네바기본합의'에서 관계정상화의 전 단계로서 연락사무소 개설을 약속했고 경제 통상관계도 해나가자고 했다, 200만 KW짜리 경수로도 지어주기로 했다. 그런데 이렇게 약속을 해놓고도 미국 국내정치의 상황 변화로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했다. 94년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한테 의회 권력을 넘겨주면서 '제네바기본합의'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고, 이에 따라 초동단계에서 북핵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찬스를 놓친 것이다.
그래서 북핵문제를 두고 합의-파기-제재-협상-합의-파기 사이클이 있다고 하는데, 북한만 파기를 한 것이 아니라 미국도 내부의 정치적 환경으로 인해 합의를 이행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북한은 기술적으로 안 지킨 것이고 미국은 정치적인 입장 때문에 안 지킨 경우가 많다.
오바마 정부 1기에서 이른바 '힐러리 해법'은 2009년 연말까지 살아있었다. 보즈워스가 2009년 11월 말에 평양에 갔다가 내려왔는데 북미 수교, 평화협정 체결, 경제지원 논의를 위해 6자회담 시작하자고 북한에 제의했고, 북한에서도 이에 동의했다. 이를 이명박 정부에 이야기했는데 이명박 정부가 안 된다고 해서 진행을 시키지 못했다. 2009년 5월 북한의 핵실험에도 불구하고 오바마 정부가 연말까지 힐러리 해법을 가동했는데, 이명박 정부의 반대로 더 이상 추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북한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박근혜 정부는 아직까지 이명박 정부처럼 선(先) 비핵화를 요구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북한으로서는 '세게 밀어붙이면 미국이 움직여서 바로 6자회담으로 가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나 싶다.
북한이 이번에 6자회담에 의해 가동이 중지됐던 영변 원자로를 재가동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6자회담 합의 사항이 실질적으로 다 깨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적인 조치라고 볼 수 있지만, 재가동에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6자회담 합의가 완전 무효화되는 것을 그대로 방치할 것이냐"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6자회담을 재개하자는 얘기다.
지금 국무장관이 존 케리이지만, 1기 오바마 정부 때 시도했던 힐러리 해법을 2기 오바마 정부에서 다시 추진하길 바란다. 1기 때는 북한의 선 비핵화를 고집하는 이명박 정부 때문에 결실을 못 맺었지만, 다행히 박근혜 정부는 아직 선 비핵화를 얘기하지 않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한미가 잘 공조하면 제대로 된 판이 짜여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 : 미국이 세 차례에 걸쳐 북미협상 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의 반대로 추진하지 못했다는 말인가?
정세현 : 그렇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이 '비핵개방 3000' 아닌가. 즉 북한이 먼저 비핵화 조치를 해야 경제지원이든 평화체제든 논의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이 입장 때문에 북핵문제의 해결에 아무런 진전이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2007년 10월 6차 2단계 회담이 열린 후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6자회담이 단 한 번도 열리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가 미국의 발목을 잡는 것을 보면서 나는 두 가지 생각을 했었다. 우선은 한국의 힘이 세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19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한국 정부가 아무리 반대를 해도 미국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북한과의 협상을 밀어 붙였었다. YS때가 대표적 경우다. 한국이 남북관계 개선 없이 북·미 접촉은 불가하다며 반대했는데도 결국 미국은 북한과 대화했다. 이게 '통미봉남'(通美封南)이었다. 그런데 이는 북한이 무슨 고도의 전략을 써서 그리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북한과 대화를 안 하고 압박해야 한다고 할 때, 미국이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또는 동북아 전체 판세를 관리하는 차원에서 대화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 아래 북한과 협상에 나서면 '통미봉남'이 오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한국의 힘이 한반도의 상황을 악화시키는 데 쓰이는데도 이게 통하는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이건 좀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레시안 : 이번 위기에서는 한국과 미국이 힘을 합쳐 한반도 상황을 근본적으로 안정시킬 수 있을까?
정세현 : 통일부 업무보고를 유심히 들여다봤는데 언론마다 좀 다르게 나오더라. <중앙일보>는 비핵화와 남북대화를 병행하는 것처럼 타이틀을 붙인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통일부에 여기저기 좀 알아봤다. 그런데 연계라고 봐야 한다고 하더라. 타이트한 연계냐고 물어봤더니 그건 아니라고 하더라고. 좀 혼란스러웠다.
▲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 ⓒ프레시안(최형락) |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대북정책은 남북관계 개선과 북핵문제 해결 병행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비핵화가 먼저였다. 박근혜 정부는 대화를 먼저 시작하지만 비핵화도 해야 한다고 해서 선(先)대화, 후(後)비핵화인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고 연계라고 해서 좀 혼란스럽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선 비핵화는 아니라는 것이다. 대화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 때 공약으로 내놓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가 '박근혜 독트린' 같은 위상을 갖고 있다고 보는데, 신뢰 프로세스라는 말을 하면서 선 비핵화를 갖다 붙일 수는 없을 것이다. 신뢰를 구축해가면서 북핵문제도 해결해가는 역할을 하겠다는 그런 의미로 본다. 북한도 아마 이런 점에 기대를 걸고 있지 않나 싶다. 결국 북한이 세게 나가는 것 같지만 빨리 6자회담이나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회담을 하자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왜 북한은 회담을 빨리 열자고 할까?
북한 경제가 작년, 재작년보다 좋아졌다는 평가도 있지만 주민들이 충분히 먹고 입고 할 수 있을 만큼 충실해지지는 못했다고 본다. 왜냐하면 북한 경제의 내부 자원이 다 고갈됐기 때문이다. 북한식 용어로 한다면 '내부 예비'조차 없다. 그래서 '외부 예비', 밖에서 북한을 도와줄 수 있는 물자들이 들어가지 않으면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러려면 제재가 풀려야 하고 남북교류협력이 살아나야 한다.
물론 전체 북한 경제에서 차지하는 한국의 대북지원이나 경협 규모는 그렇게 크지는 않다.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은 것은 사실이다. 사실 큰 규모의 지원은 미국에서 들어가야 한다. 1999년 미국은 지하 핵시설로 의심받던 금창리 지하동굴의 현장 답사를 위해 식량 60만 톤을 지원한 적이 있다. 결국 핵시설이 아닌 지하동굴로 밝혀졌는데 지하동굴 관람료로 60만 톤을 지원할 수 있는 스케일이니까, 마음만 먹으면 식량지원 100만 톤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프레시안 : 중국의 대북지원으로 북한 경제가 호전됐다는 지적도 많은데.
정세현 : 중국이 무턱대고 북한을 지원하지는 않는다. 중국도 요즘은 시장 경제 원리가 국가경제 운영의 중심적 방식이 되면서 정치적인 이유로 북한을 지원하지 못한다. 남한에서 안 들어가니까 대체재 차원에서 중국 것이 북한에 들어가는 정도다. 북한이 중국 때문에 먹고 산다든지, 형편이 완전히 풀렸다든지 할 정도는 아니다.
프레시안 : 이번 위기가 북미 주도에 의해 풀려나갈 경우, 결국 1993년도의 통미봉남이 재연되는 것 아닌가? 나아가 한국이 소외된다는 국내 보수세력의 불만과 불안도 커질 것 같은데.
정세현 : 박근혜 정부가 주의해야 할 것은 북미가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협상에 나설 경우 이를 막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영삼 정부나 이명박 정부처럼 그렇게 막지 말아야 한다. 북핵문제의 역사를 볼 때 북한 책임이 제일 크고 미국 책임도 없지 않지만, 한국정부의 반대로 북핵 문제의 해결 기회를 떠내려 보낸 측면도 있지 않은가?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오히려 미국이 이 문제를 풀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을 했다. '통미통북' '통미통남'을 하던 당시에는 남북관계가 잘 돌아가니까 오히려 우리가 미국이나 북한에 대해 발언권을 가졌고, 북미 협상이 잘 안 풀릴 경우 미국이 우리에게 북한을 설득해 달라고 요구하는 등 협상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 북핵문제 해결의 로드맵으로 평가된 '9.19공동성명'은 6.15남북정상회담 이후 심화된 남북관계를 디딤돌로 해서 만들어진 것 아닌가?
그리고 북미관계와 한미관계, 남북관계를 제로섬게임으로 볼 필요는 없다. 북미관계가 좋아지면 한미관계가 나빠지고 남북관계도 나빠지는 그런 식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윈윈 할 수 있다. 조금 전 얘기 했지만, 남북관계가 잘 풀리면서 북핵문제도 해결의 국면으로 들어갔었던 성공사례가 있지 않나.
북한이 6자회담으로 나오게 된 것은 2003년 8월이었다. 그때 우리가 북한을 6자회담으로 끌고 나오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통일부 장관 재직 당시, 2003년 8월 7차 남북장관회담부터 14차까지 여덟 번 남북장관급회담을 할 때 회담 합의문 제1항은 매번 북한이 핵문제 해결에 보다 전향적으로 움직이겠다고 하는 그런 내용들을 담느라 애를 먹었다. 장관급 회담의 전체 소요시간의 4분의 3 정도를 거기에 썼다. 북핵문제가 국민적 관심사일 뿐만 아니라, 남북관계 개선이 북핵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국민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게 해야 대북지원도 할 수 있고 남북관계를 더 발전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는 판을 그렇게 짜나갈 생각을 해야 한다.
미국도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과 대화를 해야 하겠지만 그것이 본격적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면 절대 한국을 빼놓지 못한다. 미국이 다자회담 방식으로 북핵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이유가 있다. 핵문제 해결 과정에서 북한에 상당 규모의 경제 지원을 해줘야 하는데 이를 미국 혼자서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n분의 1로 나누자는 생각으로 우리를 끌고 들어갈 것이다.
실제로 94년도 제네바 합의로 북한에 200만kw짜리 경수로를 지어주기로 하면서 공사비 46억 불 중 70%를 우리에게 떠넘기지 않았나. 20%는 일본에 내라고 하고 10%는 EU더러 내라고 하고. 미국은 1년에 5천만 달러 정도의 중유만 한 8년 제공했다. 6자회담 시작할 때도 미국은 판을 관리하고 필요한 경비는 나누어 내는 생각으로 처음부터 다자회담으로 가자고 한 것이다.
또 1:1협상에서는 한쪽이 약속을 안 지키면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미국은 여러 나라가 관여해서 설사 북한이 약속을 안 지키더라도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다른 나라로 하여금 그렇게 못하게 하기 위해서 다자 방식을 택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처음부터 판에 안 들어간다고 하면 아예 협상 판이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를 빼고 할 수는 없다. 또 우리가 들어가면 촉매제 역할을 할 수 있다. 북미관계가 너무 잘나가면 우리의 역할이 왜소해진다는 생각을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북미 간에 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한국의 역할이 더 돋보이고 필요해질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 대한 한국의 발언권이 커지게 된다.
2003년 8월부터 미국은 6자회담을 열어 놓고도 회담을 하기 전에, 또는 북미간 별도 회담이 있을 때 반드시 미국 쪽에서 통일부 장관한테 연락을 해오더라. 제임스 켈리 차관보의 경우 통일부에 와서 다음번 예정되어 있는 남북 고위급회담 때 북한에 이런 저런 얘기를 미리 전달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차기 6자회담에서는 일이 좀 빨리 진행될 수 있도록 사전 정지작업을 해달라고 하더라. 그때도 금석지감이 들었다. 어느 세월에 한국 정부가 북핵문제에 이렇게 영향력을 갖게 됐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관료들이 통일부에 왜 왔겠나. 외교부 하고만 상의해도 되는데. 남북관계를 관리하는 통일부가 북한에 대해 영향력이 있다는 것이 확인됐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렇게 남북관계가 잘 되면 미국에 대해서도 우리 위상이 떳떳해지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 때는 미국이 우리한테 부탁해도 안 되니까, 중국한테 어떻게 좀 해보라고 그런 것이다. 북핵문제 해결하는 데 중국의 역할을 기대한 것인데 과거에는 우리에게 그런 역할을 요청했었다.
프레시안 : 최근 국내 언론 보도를 보면 3차 핵실험 등 북한의 행태에 대해 중국이 불쾌해한다는 보도가 많다. 중국의 대북 태도가 이전과는 달라지고 있다는 보도가 많은데, 북핵문제를 푸는 데 있어서 중국의 역할은 무엇인가?
정세현 : 먼저 중요한 포인트 하나를 지적하고 얘기를 하자. 우리 국민들 상당수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미국도 중국이 북한한테 압력을 넣으면 북한이 쩔쩔맬 것이라고 생각하고 중국에 대북 압박이나 설득을 주문하는데, 북중관계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먼저 지적하고 싶다. 그런 기대나 주문은 한국이 미국 말을 잘 들으니까 북한도 중국 말을 잘 들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나온 것 같다. 이게 좀 문제가 있다.
북중관계는 한미관계와 다르다. 또 미국외교와 중국외교는 다르다. 중국외교는 다른 나라에 대해 강압적 수단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1979년 중국이 베트남을 응징하기 위해 벌인 전쟁에서 '남정(南征)' 이라는 표현을 쓰면서까지 군사행동을 한 적이 있었지만, 이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다. 1949년 정부 수립 이후 중국은 '평화공존 5원칙'을 토대로 외교를 해왔다. 북한이 아무리 중국을 곤란하게 만들더라도 내정간섭을 하거나 압박을 하는 등 그렇게 험하게 다루지는 않았다.
중국은 예전부터 주변 국가들을 감화시키면서 이끌고 가는 그런 식으로 외교를 했다. 명·청대(明·淸代) 조공제도에 대해서 잘못 알려져 있는 대목이 있다. 중국의 주변국가들이 중국에 무조건 갖다 바쳤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중국은 받은 것보다 더 들려 보내야 했다. 받은 것보다 내주는 것이 더 많기 때문에 중국 측에 부담이 오히려 컸던 것이 조공 외교였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한테 바치면 큰 나라는 2~3배는 더 줘야 큰 나라의 체면이 서고 다스려지는 것 아닌가? 이것이 전통 중국 외교의 기본적 특성이다.
물론 북한이 이번에 3차 핵실험까지 하니까 중국이 화가 나긴 했을 것이다. 중국은 지금 동북 3성 진흥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동북 3성이 제대로 발전하면 미국과 격차를 훨씬 줄일 수 있고 동북아에서 중국의 위상과 영향력이 커지고 대미 영향력도 커질 수 있게 되는데, 이 계획이 성공하려면 북한을 비롯해 이 지역이 안정돼야 한다. 핵실험을 비롯해 이 계획에 차질을 빚을 일을 북한이 자꾸 벌이니까 짜증이 나는 거다. 그래서 때로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낼 수도 있다.
하지만 중국 정부의 진짜 생각은 무엇인가. 북한을 버릴 수 있나? 그럴 수 없다. 북한이 미국을 상대로 벌이는 핵 공갈 때문에 북한을 징벌한다는 것은 중국의 국익에 어긋나는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되면 동북아지역 내 미·중 경쟁에서 미국이 유리해지는 것이다. 공산당 중앙당학교의 덩웨이원이라는 교수가 2월 28일자 <파이낸셜 타임스>에 '중국은 이제 북한을 혼내주어야 한다.'는 요지의 글을 썼다. 중국사람들이 북한대사관 앞에 몰려가서 데모도 했다. 이걸 보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중앙당학교 교수가 이런 글을 쓸 정도면 중국이 드디어 화가 난 것 같다. 이제 중국이 북한을 버릴지도 모르고. 그리면 북한은 꼼짝 못하고 붕괴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건 그랬으면 좋겠다는, 일종의 희망적 관측일 뿐이다.
그 교수는 그 글 때문에 보직 해임 당했다고 한다. 공산당 중앙당학교가 발행하는 <학습시보> 부편집인이었는데 그 보직에서 물러났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 사람이 후진타오(胡錦濤)와 원자바오(溫家寶)의 리더십에 대해 비판했을 때도 해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체제비판도 용인되는데 그 기사 하나 갖고 보직 해임시킨 것을 보면 중국이 북한과의 관계를 얼마나 중대하게 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중국의 외교문제를 결정하는 최고 의사결정기관인 외사영도소조, 여기서 보자면 이 교수의 생각은 철딱서니 없는 것이다. 미중 관계의 틀 속에서 북한이 중국에 있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야지, 단지 북중관계 속에서 중국을 귀찮게 한다고 해서 버리라니. 이 정도 밖에 안 되나 하는 의미에서 보직해임 시켰을 것이다. 중국은 북한이라는 나라가 미중관계 속에서 상황별로 어떤 전략적 가치를 갖고 있는지를 따지고, 북한이 대미 레버리지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를 저울질하고 있다고 본다. 중국이란 나라는 명나라 청나라 때부터도 주변국들을 상대로 해서 그런 외교를 해왔다.
프레시안 : 그렇다면 중국은 북미 간 양자협상보다는 6자회담 틀 내에서 북핵문제를 풀려고 하는 것인가?
정세현 : 그렇다. 6자회담을 열면 중국의 위상이 높아진다. 장소 빌려주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중국의 협조로 북핵문제가 해결되면 중국의 국제정치적 영향력도 커진다.
동북아에서 미중 간 경합이 시작된 지 오래됐고, 남북관계도 미중관계의 경합 속에서 풀어나가야 한다. 중국이 동북아에서 미국의 국제정치적 이해관계에 도전할 가능성이 커지다 보니 미국은 심지어 한때 전쟁을 치렀던 베트남과도 손을 잡지 않았나(1996년 수교). 또 인도 파키스탄의 핵무장을 사실상 인정해주면서까지 미국 편으로 끌어들이기도 했고. 이렇게 해서 미국은 남쪽으로는 중국을 포위한 셈이다. 또 미국은 중국을 북쪽으로부터 포위하기 위해 러시아에도 손짓을 하고 있다. 러시아와 미국이 손잡으려고 하니까 시진핑이 취임하자마자 바로 러시아와 관계 강화를 위한 행보를 시작했다. 시진핑이 러시아에 가서 수호이-35 등 낡은 소련제 전투기를 사들인 것도 러시아를 중국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다. 돈이 필요한 러시아입장에서는 말로만 잘하자는 것보다 이렇게 무기 사주는 중국이 훨씬 고마운 것이다.
▲ 버락 오바마(왼쪽)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AP=연합뉴스 |
시진핑이 아프리카에서는 탄자니아에 가서 3년간 200억 불 차관을 주겠다고 하고, 4만 8000명 기술 연수 시켜주겠다고 했다. 잠비아에도 50억 불정도 지원 약속을 했다. 아프리카 국가들을 중국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움직임이다. 그러자 미국은 바로 아프리카 국가 원수들을 백악관에 초청했다. 이처럼 미중 간에 전 지구적 차원의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핵심은 동북아다. 지금을 아시아태평양시대라고 하는데 그 중심에 잇는 동북아 국가들의 GDP 규모나 군사비 규모가 대단히 크다. 동북아 지역에서의 미중 간 경쟁과 갈등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북핵문제다. 중국이 이렇게 미국을 견제하기 위한 외교에 돈까지 써가면서 동분서주하고 있는 판국에 "중국이 북한을 혼내 줄 것이다"라든지 "중국이 북한을 혼내 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건 순진한 생각이다.
프레시안 : 먼 장래이긴 하겠지만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둘러싸고 미중 간 각축이 커질 가능성도 있을 것 같다.
정세현 : 북핵문제가 완전히 해결되고 북미 수교까지 되면 중국으로서는 상당히 아플 것이다. 물론 동북아지역이 안정된다는 측면에서 득이 될 수 있지만 적어도 정치·외교적으로는 미국이 동북아에서 중국의 턱밑까지 진출하는 셈이니까. 평양에도 미국 대사관이 있는 것과 서울에만 미국 대사관이 있는 것은 다르다.
먼 훗날 미중관계 속에서 북한의 위치가 바뀔 수 있고 미중관계에서의 변수가 될 수 있지만 정작 우리가 더 걱정해야 할 것이 있다. 앞으로 미중관계가 경합관계로 갈 수밖에 없는데, 그때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북한은 대미 의존도도 별로 없고, 또 큰 나라들을 상대로 양다리 외교를 해서 지원을 잘 받아내는 기술이 있다. 1950년대 중후반 중·소 분쟁 때부터 그런 외교 역량이 몸에 뱄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그런 외교를 잘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워낙 미국 한 나라에 의존하면서 살았고, 외교도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우리는 60년 이상 미국에 안보를 의존해왔다. 이 틀을 깨기는 힘들다. 그런데 경제는 점점 중국에 의존해가고 있다. 2000년대 초반 우리 무역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율이 10% 미만이었고 미국이 20% 정도 됐다. 그런데 2010년 말 한국의 대외무역에서 국가별 비중이 완전히 뒤집어졌다. 중국이 20%, 미국이 9% 대로 떨어졌다. 2012년 말 무역에서는 그게 더 심화됐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 차지하는 비율이 더 커졌을 것이다.
또 중국이 앞으로 더 부강해지면 우리한테 투자도 하면서 보다 밀접한 관계가 될 것이다. 미중이 경합을 벌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한국이 어느 편에 서느냐가 미중간 승패를 가르는 주요 변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 미국은 안보를 무기로 우리를 압박할 거고, 중국은 경제를 무기로 우리 팔을 비틀 수 있다. 이게 문제다.
프레시안 : 박근혜 대통령의 첫 해외 방문이 5월 초 미국이다. 일각에서는 중국을 먼저 가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정세현 : 괜찮은 생각이라고 본다. 그러나 역시 미국부터 가는 게 맞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의 미국관은 이명박 정부의 대미일변도와는 다른 것 같다. 그런 만큼 박근혜 정부는 미국외교도 제대로 하지만 한중관계도 이명박 정부 때보다는 훨씬 신경 써야 하고 잘해야 한다. 대통령이 그런 데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데 관심이나 외형보다 실질적으로 한중관계에서 중국이 우리를 자기네 편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내용있는 대중외교를 해야 한다.
거기에 있어서도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한중관계가 부드러워진다. 남북관계를 우리가 주도적으로 잘 풀어나가면 중국이 골치 아파하는 문제를 우리가 잘 해결해준 셈이니까. 중국으로서는 한국에 우호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고. 다른 국제사안에 있어서도 한국정부와 협조할 수 있는 부분이 커질 것이다.
프레시안: 북한이 8일 개성공단 북한 측 노동자의 전원 철수, 공단 운영의 잠정 중단을 선언했다. 개성공단은 이명박 정부 이후 남북관계 악화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어져온 남북 간 교류협력의 상징적 사업이다. 또 외국 투자가들은 개성공단의 존속 여부를 한반도 정세 안정의 매우 중요한 시금석으로 본다고 한다. 북한 행동의 배경은 무엇이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앞으로 그 여파는 어떻게 되나?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대응책은 무엇인가?
정세현: 개성공단에 대한 북한의 강경조치의 배경은 그들이 말한 대로라고 본다. 국방장관이 인질구출작전을 하겠다고 말한 것이 제일 큰 자극제였다고 본다. 북한 군부를 화나게 한 것이다. 개성공단이 북한의 달러박스기 때문에 북한이 어쩌지 못한다고 한 일부 언론의 보도가 북한의 자존심을 심하게 건드렸다고 본다. 이건 개성공단을 열자고 한 당 쪽의 입장을 매우 곤혹스럽게 만들었다고 본다.
개성공단은 북한이 못 닫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못 닫는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개성공단 문제가 빨리 안 풀리면 북한이 받는 피해보다 우리가 받는 피해가 열배 백배 더 크다. 북한은 경제난에 대한 내구력이 있는 나라다. 우리나라는 그 반대다. 개성공단 때문에 코리아 리스크(Korea Risk)가 올라가면 외평채 금리부터 올라간다. 개성공단 때문에 외평채 금리 올라가는 상황을 만드는 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다. 투자 빠져나가고. 수출 주문 줄어드는 건 불문가지다. 이게 쌓이면 경제성장도 잘 안 되는 것 아닌가?
우리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 국방장관의 인질구출작전 발언을 취소할 수는 없겠지. 그러나 와전됐다는 식으로라도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본다. 국방장관은 장군 출신이지만, 이제 현역 군인은 아니다. 국사에 대하여 정치적 계산도 해야 하는 국무위원이다. 국무위원은 보수적인 경향의 국민들 기분보다 전체 국민의 이익과 행복을 더 많이 생각해야 하는 자리다.
언론도 북한 자존심 건드리는 일을 좀 자제해야 한다. 북한 자존심 건드려서 남는 게 뭔가? 북한이 자극을 받아서 극단적인 행동을 하면 한반도 위기지수 올라갈 뿐인데 그런 국가적 손해가 언론사에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아닌가?
우리가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개성공단은 '잠정 중단'에서 정말 '폐쇄'로 넘어갈 수도 있다. 최소한 몇 달 갈 수도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경제운영 원리상 사회주의를 하는 북한은 개성공단 없이도 살 수 있지만, 자본주의를 하는 우리는 개성공단이 잘못되는 경우 받는 피해가 너무 크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이 중요하다. 우리 정부가 점잖게 개성공단 이러지 말라고 북한에 이야기하고 성명서를 좀 무게 있게 발표하는 것이 필요하다. 장관이 간담회 같은 데서 슬쩍 지나가는 말처럼 하는 것보다 통일부 성명이든지 대통령 차원에서 개성공단 이러면 안 된다든지, 남북화해와 한반도 안정에 도움이 안 된다 등의 이야기도 좀 하고. 또 정부가 입주기업들과 잘 협력해야 한다. 입주기업들도 북한에 이야기를 잘해야 한다. 북한도 이거 풀려면 명분이 있어야 하지 않나. 북한이 한국 정부 좀 어렵게 하려고 했는데 "개성공단 입주기업들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도록 명분을 만들어줘야 한다.
그리고 미국도 오바마 정부 1기 때 했던 해법을 다시 들고 나서야 한다. 즉 '힐러리 해법'을 '케리 해법'으로 리모델링을 한다든지 북핵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우리도 개성공단 문제 풀리면 남북접촉을 통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시작하려고 한다고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북한에도 메시지를 보내고, 확실한 것은 미국이 먼저 움직여도 나쁘지 않다는 메시지부터 전해야 한다. 미국이 움직이고 싶어 하는 데 발목 잡지 말고 오히려 부추겨야 할 필요가 있다.
프레시안: 대북특사 논의가 있던데, 특사 파견이 도움이 될 수 있나?
정세현: 지금 같은 상황에서 대북 특사파견은 좀 난 데 없는 일이라고 본다. 밑도 끝도 없이 지금 평양에 가서 뭐라고 할 건가? 북한에는 차라리 장관급 이상의 무게를 실어 잘 해보자는 메시지부터 띄워놓고, 특사는 오히려 미국으로 보내야 한다. 대통령 방미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특사를 미국으로 보내서 '힐러리 해법'이든 '케리 해법'이든 을 빨리 가동시키자고 미국을 설득해야 한다. 케리 국무장관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한가한 놀음이다. 우리가 진정성을 가지고 발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 북한의 대남 태도는 바로 달라질 것이다.
프레시안 : 현재 한반도는 위기상황이다. 이 위기 상황은 북한이 조성했고 북한이 국면의 주도권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중국이나 미국은 위기상황이라 하더라도 별로 손해 볼 것이 없다. 미국은 미국대로 한국을, 중국은 북한을 자기편에 묶어둘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가장 손해 보는 것은 한국이다. 사실 한국은 한반도가 평화와 안정을 향해 나아갈 때 비로소 주도적 입장에 설 수 있는 것은 물론 가장 큰 혜택을 취할 수 있는 입장 아닌가?
정세현 : 북핵문제가 해결 안 된다고 해도 미국이 손해 보는 것은 별로 없다. 미국은 북한의 핵위협을 빌미로 한국에 미사일방어망(MD) 판매할 수 있으니까 좋고, 북핵문제가 해결되면 그런대로 나쁘지 않다. 중국도 북한이 핵무기 몇 개 갖고 있다고 해서 겁날 건 없다. 그걸로 중국을 협박하는 수단으로 쓰겠나. 북한의 핵능력이 강화되고, 결국 미중이 그걸 기정사실화 하면서 북핵의 비확산 쪽으로 가버리면 우리만 북한에 멱살 잡혀서 미국에 살려달라고 해야 하는 꼴이 된다. 결국 미국 무기 더 많이 살 수밖에 없이 되는 거다.
김대중 정부 때부터 미국은 우리에게 MD 사라고 했다. 천용택 국방부 장관 시절인데 그때 미국이 TMD(Theater Missile Defence, 전역 미사일 방위 구상) 사라고 하니까 천 장관이 "우리는 남북관계 잘 개선해서 북한이 우리에게 미사일이나 핵무기 못 쓰게 할 테니 우리한테 그런 이야기 하지 마라"고 이야기했다. 이게 정답이다. 박근혜 정부도 남북관계 잘 관리해서 북핵문제 해결하면 북한에 핵으로 멱살 잡힐 일 없다. 핵으로 멱살 잡히면 선거 때 공약했던 복지 증대, 중소기업 살리기, 아무것도 못한다.
프레시안 : 올해가 정전협정 60주년인데, 한반도는 아직도 위기다.
정세현 :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문제와 관련해 우리 국민들이 갖고 있는 불안감이 있다.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주한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들 있다. 북미 수교가 돼서 미군이 나가면 우리의 안보는 어떻게 하느냐는, 공포감 같은 것을 갖고 있다. 그런데 한반도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북미 간 평화협정만이 아니라 남북 간에도 평화협정이 체결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런 약속들을 보장하는 국제협력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그게 한반도 평화체제다. 북한이 평화협정을 체결하고도 다시 전쟁을 일으키면 그때는 국제적 제재가 들어가게 된다.
평화협정 체결하면 걱정은 오히려 미국이 해야 한다. 철수하는 주한미군이 갈 데가 없거든. 그런데 북한이 여기에 대해 이미 1992년 초에 미국이 안심할 수 있는 답을 주었다. 92년 1월 김용순 노동당 비서가 미국에 가서 아놀드 켄터 당시 미 국무차관에게 "북미관계 정상화되면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는 걸 용인하겠다"고 제안했다. "물론 주한미군이 지금과 같은 성격은 아니다. 일종의 균형자, 평화조성자 역할이다"라는 설명도 붙였다. 통일된 후에 독일에 남아 있는 5만 명이 넘는 미군과 같은 역할을 의미한다. 미국은 그러면 되는 거다. 현재 독일에 있는 미군은 유럽질서를 지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 클린턴 정부 때 김정일 위원장이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을 만나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다. "북미관계가 정상화만 되면 미군 문제는 다 해결될 것이다. 이미 미국에 이야기하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그러니까 힐러리 클린턴이 북한과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미군 없으면 북한이 우리를 공산화시킨다는 6.25 식 발상은 안 해도 된다. 그러니까 빨리 평화협정 협의 시작하고 북미 간 수교하고, 북일도 수교해서 한반도가 좀 평화로워져야 한다고 본다. 물론 미군은 그대로 한반도에 남고.
정세현 원광대 총장(전 통일부 장관)의 '정세현의 정세토크' 시즌 2를 시작합니다. '정세토크'는 지난 2008년 7월부터 2011년 11월까지 매월 2차례 연재되면서 난마처럼 얽힌 한반도 상황을 정리해내고 바람직한 진로를 모색하는 안내자 역할을 했습니다. '정세토크' 시즌 2는 박근혜 정부의 출범과 동시에 악화되고 있는 한반도 상황을 주시하면서 동북아 패권을 둘러싼 미중의 경쟁 속에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한 해결책은 무엇인지, 독자들과 함께 찾아보려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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