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경력만을 대략 알고 있는 사람들은 작년 12월 그가 대학 총장이 되었다는 소식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학문', '교육', '대학 사회' 같은 단어들과는 매치가 잘 안 되는 이미지 때문이었다. 전직 장관이라는 명망 하나만으로 됐겠거니, 그렇게들 넘겨 짚었다.
그러나 그를 아는 사람들은 오히려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돌아왔지만, 늦게라도 제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정세현은 근본이 학자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대학 교수가 되고 싶었고, 정규직 교수는 아니었지만 대학 강단에 선 적이 많아서 대학이란 곳과 어색할 게 하나도 없다. 이 얘기는 작년에 나온 책 <정세현의 정세토크>의 한 대목을 소개하는 것으로 가름한다.
"정세현은 공직자이기에 앞서 학자다. 현실 경험을 끊임없이 개념화하고 이론화하려는 연구자적 태도를 평생 버리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통일부 장관 같은 공직은 정세현이라는 학자에게 주어진 하나의 '국가적 보직'이었다."
총장 취임 소식에 고개를 갸우뚱했건 끄덕였건,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반도 상황에 대한 해설, 정부 대북정책에 대한 비판과 대안 제시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의 말을 당분간 들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정 총장 스스로도 남북관계 관련 발언을 잠시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학교 일에 빨리 적응해야 하고, 정부 비판적인 발언을 할 경우 불안해하는 대학 구성원들이 있을 수 있다는 이유였다.
프레시안은 이명박 정부 첫해인 2008년 7월부터 2년 4개월 동안 '정세현의 정세토크'를 진행한 바 있다. 정 총장이 현안에 대한 견해를 구술하면 기자가 정리하는, '말로 쓰는 칼럼' 형식의 연재물이었다. 총 61회 나갔는데,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를 명쾌하게 짚어줬다는 평가를 많이 듣는다.
그런 프레시안이지만 정 총장에게 정세토크 연재를 다시 시작하자거나 현안 인터뷰라도 하자고 제안하지 못한 건 '당분간 함구'의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지난 3년간 비판했던 정부의 대북정책이 지금도 그대로 있고, 내 생각도 그대로다. 그러니 굳이 덧붙일 필요가 없다." 정 총장의 이런 말에 동의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레시안이 정세현 총장 취임 이후 첫 인터뷰를 제안한 것은 그의 얘기를 듣고 싶어 하는 단단한 독자층이 있기 때문이다. '남북관계 현안은 안 묻겠다'고 선수를 쳤더니 정 총장도 딱히 거절하지 못했다.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가 지난 23일 원광대 총장실로 찾아가 만났다.
하지만 약속은 반 밖에 지켜지지 못했다. '남북관계 현안'은 아니었지만 정 총장은 살아 펄펄 뛰는 이 시대의 현안을 이야기했다. 다음은 이날 인터뷰 전문이다.
▲ 정세현 원광대 총장 ⓒ원광대 대외협력팀 |
"중국의 부상, 기회이자 위협"
프레시안 : 지난해 12월 23일 총장으로 취임한지 딱 5개월이 됐다. 학교 행정은 처음인데, 정부에 있을 때와 어떻게 다른가?
정세현 : 정부 행정에 참여했던 경험을 대학 경영에 접목시켜 나가는 중인데, 쉽지 않다. 공무원 사회는 위에서 방침이 정해지면 일사불란하게 집행되고 성과도 바로바로 나오는데, 대학 사회는 먼저 구성원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설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다보니 일을 착수하는 데에도 상당히 속도가 느리다.
원광대 교수 출신이 아닌 외부 인사가, 더구나 '정규직' 교수를 해본 적이 없는 공무원 출신이 총장을 맡은 것은 우리 원광대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대학 구성원들도 익숙지 않았을 것이고 나는 나대로 처음에는 조금 답답한 감도 있었다. 그래서 스트레스도 좀 받아 그것 푸느라고 침도 좀 맞았는데(웃음), 점점 대학 문화에 친숙해지고 있고 잘 적응하고 있다.
프레시안 : 지난 13일 원광대 개교 65주년 행사에서 중국문제연구소 설립 계획을 밝혔다. 어떤 취지인가?
정세현 : 지금 중국의 성장 속도가 엄청나게 빠른데, 이는 우리에게 경제적으로는 기회지만 정치‧외교·군사적으로는 상당히 큰 위협 요인이 될 수 있다. 그런데도 중국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은 그리 높지 않은 것 같다. 수도권 몇 개 대학에도 중국문제 연구소가 있지만 주로 정치, 경제 쪽으로 연구를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산업이나 과학기술 쪽에서도 중국은 우리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지금은 한국이 중국과 무역을 해서 연간 400억 달러 정도의 흑자를 내고 있지만, 언젠가는 역조(逆調)가 일어나는 상황도 염두에 두어야한다. 중국이 한국에 투자하고 한국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본다. 대학에서는 학생들이 졸업 후에 그런 상황에 대비할 수 있도록 준비를 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프레시안 : 구체적인 계획은?
정세현 : 일단은 중국어 교육부터 해보려고 한다. 중국어가 영어 못잖게 중요한 시대가 올 것이라고 본다. 취업 기회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자기 분야에서 뻗어나가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니 지금의 영어처럼 중국어가 필수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중국어 교육을 강제로 할 수는 없고, 오는 여름방학부터 희망하는 학생들에게 아침 9시부터 밤 11시까지 중국어 에 집중하는 어학 교육을 스파르타식으로 운영해볼 계획이다.
원광대 전체를 중국어 특성화 대학으로 만들지는 못해도 중국어를 정책적으로 중시해서 가르치려고 한다. 지금 국제화한다고 대학들이 영어로 강의를 하듯이, 원광대 일부 단과대학이나 학부는 중국어로 강의하는 방식으로 중국어 특성화 대학을 만들어 보고 싶다.
학생들이 비교적 영어는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거기에 중국어 실력도 쌓아 놓으면 취업 기회도 많아지고 취업 이후 동서로 훨훨 날아다닐 수 있게 될 것이다. 의사, 치과 의사, 한의사도 중국어를 하면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중국 환자들이 몰려올 것 아닌가. 아무튼 학생들의 중국어 능력을 키워주면서, 그걸 토대로 중국어 특성화 대학을 만들고 중국 연구도 선도해 가려고 한다.
프레시안 :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나?
정세현 : 한국에서는 중국의 경제력이 커지는 것을 기회로만 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들의 경제력 뿐 아니라 군사력이나 정치적 발언권도 커지게 되면 제일 가까운 나라인 한국이 떠안아야 할 위협 요인이 있다는 것에 대한 생각은 별로 안 하는 것 같다.
내가 통일부에서 오래 일했기 때문에 나는 북한 문제, 통일 문제를 전공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 나의 학문적 전공은 중국 문제다. 석사 논문은 중국 춘추전국 시대 말 한비자(韓非子)의 정치권력론이었고, 박사 논문 주제는 마오쩌둥(毛澤東)의 국제정치사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40년 가까이 중국의 정치·외교·군사문제와 정책을 관심 있게 지켜보게 되었다. 다만 대학이 한중관계에 대비할 수 있는 인재를 키워야 한다는 생각은 총장 부임 후에 하게 됐다.
한반도 자체가 지리적으로 중국에 가장 가까이 인접해 있는 국가 중 하나지만, 그 안에서도 서해를 사이에 두고 인천 못지않게 가까운 곳이 전라북도다. 중국과 전북 새만금 개발지는 아주 가까운 거리다. 또한 원광대는 서해를 사이에 두고 직선거리로 중국과 매우 가깝다. (웃음) 특히 새만금 1200만 평(약 3960만㎥)이 개발되는데 삼성이 그 중에서 350만 평에 태양광, 재생에너지, 바이오산업 쪽에 투자하겠다고 나섰는데, 국내 시장을 겨냥한 게 아니고 중국 시장을 겨냥한 것이라고 본다. 그만큼 중국의 잠재력은 크다.
꼭 내가 중국에 관심이 있어서만이 아니라, 중국이 앞으로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기회와 위협을 체크해 왔던 입장에서 장차 나라의 지도자가 되고 역군이 될 학생들이 그런 쪽으로 준비할 수 있게 해줘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우리 학생들에게 중국어 교육부터 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각자 자기 전공은 전공대로 공부하고, 예컨대 화학공학이나 반도체, 통상학을 하면서 중국어에 능숙한 학생, 또는 의대나 치대, 한의대를 나와서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의사선생님이 앞으로 크게 쓰이지 않겠는가.
ⓒ원광대 대외협력팀 |
"'굴기' 표현 회피하는 중국의 본심을 읽어야"
프레시안 : 중국의 부상이 우리에게 기회인 동시에 위기라고 했는데, 예를 들어 어떤 부분을 얘기하는 것인가?
정세현 : 내 학문적 관심 분야는 중국의 국제질서관, 중국 외교정책이었다. 그런데 그 뿌리를 찾아 올라가다 보니 명·청 시대, 아니 그 이전인 주(周) 나라 이후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던 중국 중심의 천하관(天下觀)에 연결이 됐다. 중국이라는 나라 이름부터 천하의 가운데, 세상의 중심이라는 뜻 아닌가.
그래서 박사 학위 논문의 결론을 "지금은 중국이 힘이 약하기 때문에 엎드려 있지만 다시 힘이 강해지면 반드시 옛날에 천하를 호령했던 자세로 돌아갈 것"이라는 식으로 썼었다. 논문을 쓸 당시는 1980~81년이었는데 그때 중국은 국력도 보잘 것 없었고 4개 현대화 사업을 막 시작하던 때라 사실 대외적으로도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대외 발언도 겸손하고 외교적인 표현을 썼었다.
그러나 나는 그 저변에 흐르고 있는 그들의 국제질서관, 대외관은 명·청 시대의 그것으로부터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봤다. 그러한 관점과 판단에 대해서 논문 심사위원들의 반론이 만만치 않았다. 심사위원들의 생각은 '1인당 소득이 100달러도 안 될 정도고, 국민수준도 낮은 중국이 어느 세월에 천하를 호령하게 되겠나?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앞으로도 동북아에서 미국의 우월적 지위(supremacy)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중국의 국력이 커지면 반드시 과거 중국에 조공을 바치던 나라들을 제압하고 관리하던 식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내 주장에 대해 근거없는 생각, 심지어 중국을 흠모하고 숭배하는 모화사상(慕華思想)이라고 지적하면서 수정을 요구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을 보라. 중국은 이제 도광양회(韜光養晦. '칼날의 빛을 칼집 속에 감추고 어둠 속에서 남몰래 힘을 기른다'는 뜻으로 1980년대 중국의 대외정책을 일컫는 말)단계를 지나서 화평굴기(和平堀起. '평화롭게 우뚝 선다'는 뜻으로 2000년대 중국의 외교 노선)단계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굴기'라는 말이 저항과 비판을 받으니까, 지금은 화해세계(和諧世界: '세계 여러 나라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어울린다'는 뜻)라고 말을 바꿨지만 본심은 굴기가 맞다고 본다. 5∼6년전인가, 중국 관영 <CCTV>에서 10부작 시리즈 '대국굴기'(大國崛起)를 제작해 방영한 적도 있다. 굴기라는 말을 쓰다가 갑자기 안 쓰는 것 자체가, 그것이 바로 그들의 본심이라는 얘기다. 또 유소작위(有所作爲. '역할을 해야 할 곳에서는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뜻)도 이미 시작됐다. 그런 것을 보면 중국이 앞으로 정치·외교·군사적으로는 굉장히 군림하는 자세로 나올 가능성이 높다.
프레시안 : 그래도 지금까지는 미국에 비할 수 없지 않나?
정세현 :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이 지난해 3월 서울에서 열린 한 국제학술회의에서 미국을 '쇠퇴하는 강대국'(declining power), 중국을 '부상하는 강대국'(rising power)이라고 했다. 키신저는 또 최근에 <중국에 관해>(On China)라는 책을 출간했다. 대단히 미국 중심주의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고 '미국 제일주의' 의식이 강한 사람인데, 그런 키신저가 인정할 만큼 중국의 힘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또 미국에 대해 '채무 불이행 강대국'(default power)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도 있다. 10여년 전 미국의 학자나 분석가들 중에는 2050년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이 미국을 능가할 것이라는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최근에는 2030년에 중국이 GDP면에서 미국을 능가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2030년은 19년 남았다. 금방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너무 미국 중심으로 정치·외교·군사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한때 영국도 19세기 대영제국 시절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지만 지금은 미국에 자리를 내주지 않았나.
물론 소련 붕괴 이후 미국이 국제정치나 경제, 군사 등 모든 것을 좌지우지했고 지금도 미국 한 나라의 군사비가 나머지 모든 나라의 군사비보다 많을 만큼 군사 강국인 것은 맞다. 그러나 중국의 국력 성장이 진행되다 보면, 전 세계적으로는 여전히 미국의 군사력이 크더라도 적어도 동북아에서는 미국과 중국의 군사력이 비등해질 것이다.
일본도 '보통국가화'라는 명목으로 군사 강국을 지향했었지만, 원전 사고 이후 정신적으로도 상당히 위축됐고 G-2 자리도 중국에 내주었기 때문에 동북아에서 중국을 상대하는데 힘이 달리지 않겠나 싶다. 중국의 힘이 커진데다가 일본은 자신감을 잃었기 때문이다. 정치·외교적 영향력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고, 경제력과 자신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아무튼 앞으로 중국이 한국의 외교 문제 등에 대해 그동안 미국이 그래왔던 것 못지않게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시점이 곧 올 것이다. 최근 한국이 한미동맹을 통해 중국에 압박을 가해보려고 했지만 거의 통하지 않았다. 중국이 그동안 축적된 역량을 가지고 앞으로 적어도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는 국가들에 대해서는 화평굴기, 유소작위 식으로 나올 가능성이 높다. 14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 그 나라들과 무조건 평화공존 방식으로만 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이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 시절 영토존중 등 '평화공존 5원칙'을 내걸었지만, 힘이 세지면 평화공존은 간판에 불과하게 되고 '평화적으로 공존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말을 들어라'는 식으로 갈 수 있다. 경제적인 보복을 하거나 군사적 압력을 넣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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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노무현 정부 시절 '동북아균형자론'이 나왔는데, 당시의 정책이 대중관계에서는 현재보다 나았다는 시각이 있다.
정세현 : 지금 정부는 중국을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너무 미국 중심적인 외교 철학이 강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지 않고서야 작년에 있었던 사건들(천안함, 연평도 등) 당시 중국에 대해 그렇게 노골적으로 나갈 수 없다. 북한을 압박하는 차원에서 그랬겠지만, 결국 중국과 불편한 관계만 되지 않았나. 오죽하면 중국의 국제 문제 전문가나 언론인들이 '한국에 본때를 보여야 한다'고까지 했을까 싶다.
노무현 정부 시절 '동북아균형자론'은 중국의 중요성을 인정한다는 전제 위에서 나온 얘기였다고 본다.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우리가 동북아의 균형을 잡자는 것이었다. 중국이 우리에게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위협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균형을 잡자는 것이었다고 본다.
특히 동북아균형자론은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적 외교정책 이론이다. 즉, 한국이 가진 미국과 일본에 대한 영향력으로 한중관계를 조절하고, 또 중국과의 관계를 조절해서 미·일에 대해 할 말을 하면서 국익을 극대화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부 보수적 시각, 특히 한미동맹 지상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 균형자론은 '같잖다'는 거였다. 한국이 무슨 힘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사실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다. 대다수 국민들은 한국의 영향력이 동북아에서 (미·일·중·러에 이어) 5위이다 보니까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사실 반에서는 5등이지만 전교 등수는 상당히 높은 경우가 있듯이, 세계적으로는 한국이 제법 힘 있는 나라다. 한국의 경제력이 15위권이고, 군사력도 북한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미국과의 동맹이 필수적이라고는 하지만 세계적인 차원에서 보면 상당히 막강하다. 특히 요즘 한류(韓流)가 퍼져 나가는 것을 보라. 한국이 문화강국이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그런데도 한국 국민들에게는 우리가 대국은 아니라도 중소강국 정도는 된다는 인식이 별로 없고, 누군가에게 반드시 의존해야만 한다는 의존 심리, 약소국 의식이 강하다. '균형자는 미국이나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균형자론이 가차 없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거둬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도 '이이제이'로 접근하면 얼마든지 균형자적 역할을 할 수 있다.
중국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힘을 가지려면 미국과의 기존 관계를 잘 유지해 나가야 한다. 아울러 미국과의 관계에서 한국이 할 말을 하려면 중국과의 관계가 강화돼야 한다. 위협과 기회 속에서, 중국에 대해 발언권이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영역을 찾아 한중관계를 심화·발전시켜놓으면 그 자체가 미국에 대해 위상을 높일 수 있는 첩경이 된다.
고(故) 김대중 대통령이 이런 표현을 한 적이 있다. "한국은 도랑에 든 소처럼 양쪽 둑에 있는 풀을 모두 뜯어 먹어야 한다. 한쪽에만 치우치면 안 된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처럼 미국과 중국 양쪽 모두를 잘 활용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그런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한중관계를 잘 활용해서 동북아 지역에서 우리의 위상이나 발언권을 높이기 위해서도 중국 연구나 대중전략의 발전이 필요하다. 통일을 위해서는 더더욱 중국 연구가 필요하다. 학계 차원에서도 이런 논의가 뒷받침돼야 하고, 정부도 연구 개발(R&D)을 기술개발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이런 쪽에도 지원해야 한다.
프레시안 : 중국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는 책도 나온 적이 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정계나 학계에서는 그런 논의가 적다는 느낌이다.
정세현 : 가끔 유행처럼 중국 관련 서적이 범람하다가 사라지곤 한다. 그런데 일반론적으로중국이 위협이나 기회가 될 수 있다고만 하지 말고, 어떤 부분이 위협인지 어떤 부분이 기회인지 분석적으로 얘기하면 제대로 대응책이 나오지 않겠나 싶다.
그건 그렇고, 중국의 잠재력이 크지만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세기 동안 세계를 리드해 왔고 사실상 지배해 왔던 식으로 중국이 그렇게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미국에는 오래 전부터 전 세계의 두뇌와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간 유대인들 두뇌도 큰 역할을 했고, 요즘은 한국이나 중국, 인도에서 고급 인력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돌아오지 않고 미국 시민권 받아 활동하는 사람들도 많다. 세계의 두뇌들이 미국의 국력 신장을 뒷받침하고 버텨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미국은 그것 때문에 굴러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중국은 현재까지는 그 반대다. 세계에 나가 있는 화교들이 중국의 발전에 큰 밑거름이 되고 버팀목이 되고는 있지만, 두뇌 유입 면에서는 중국이 미국만큼 이점이 없다. 두뇌가 과학기술의 발전도 가져오고 외교전략이나 군사전략도 결국 두뇌 싸움인데, 중국은 오히려 나가는 쪽이다.
이런 구조 때문에 중국이 미국을 바짝 추격해 2등까지는 갈 수 있지만 미국을 완전히 능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GDP 역시 총액은 능가해도 인구수로 나누면 1인당 소득이 미국을 앞지르기는 힘들 것이다. 그런 면에서도 우리가 미국을 완전히 버리고 중국 위주로만 가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미국과 중국에 대한 각각의 관계에 적절하게 균형을 잡아야 한다. 기왕에 비교적 좋게 잘 관리해왔던 한미관계를 자산으로 활용해야 하고,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강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중국식으로 말해 '원교근공'(遠交近攻)이라는 점에서도 합리적이다.
"대학의 아카데미즘 종언 안타깝다"
프레시안 : 원광대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대북정책과 관련된 발언을 일절 하지 않겠다고 했고, 실제로도 하지 않고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인가?
정세현 : 우선 학교 업무가 바쁘다. 대학이라는 특성상 구성원들에게 설명하고 지지를 끌어내는 데에도 시간이 모자라는데, 북한 문제에 대해 발언을 하려면 별도로 시간을 내서 실시간으로 뉴스를 체크해야 한다. 한 번에 두 가지는 못 한다. 그러니 정보가 부족하고 몰라서도 얘기를 안 한다.(웃음)
또 하나는, 솔직히 말해서, 내가 발언을 한다면 정부 정책을 비판할 가능성이 훨씬 높은데, 그렇게 되면 학교에 불이익이 올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내부적으로 있을 수 있다. 학교 안에 있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불편하게 해가면서까지 말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 이미 나는 지난 3년간 많은 얘기를 했다. 그때 내가 비판했던 정부의 대북정책이 그대로 있고, 내 생각도 그대로다. 그러니 굳이 덧붙일 필요가 없다.
대북정책에 대한 내 생각을 묻는 분들이 가끔 있어서, 언론에 인용되지 않는 선에서 사적인 의견을 말하긴 한다. 그런데 사실 별로 묻지 않는다. 발언을 안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할 여지가 별로 없는 것이다. (웃음) 우리 학교 교수들 중 일부는 계속 사명감을 가지고 그런 활동이나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학교 일에 전념하는 게 옳다고 본다.
다만 중국 문제 같은 것은, 크게 봐서 국가적으로 대비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에 드러내 놓고 말할 용의가 있다. 현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국민들과 정치권에서 별다른 인식이 없는데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데에도 관심을 갖자고 하는, 취지에서 주의를 환기하는 정도다.
ⓒ원광대 대외협력팀 |
프레시안 : 대학이라는 교육 현장에 와서 느낀 점이 있다면?
정세현 : 대학에 오면서 대학 사회의 여러 가지 현실에 대해 공부를 하게 됐다. 그런데 가장 애석한 것은, 대학이 요즘 완전히 직업학교가 돼 버렸다는 것이다. 취업 사관학교 같다. 교육부가 대학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 추진한 정책이었겠지만, 결과는 엉뚱한 부작용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교수들이 논문을 몇 편 썼는지, 학생들은 몇 퍼센트나 취업했는지 이런 것을 점수화해서 대학 서열을 매긴다. 정부나 기업체로부터 대형 프로젝트 수주한 액수를 가지고도 등수를 매긴다. 요즘은 언론사도 대학을 평가하고 등수를 매긴다.
어떻게 보면 교수들도 애정을 가지고 학생들을 지도하거나 정말로 심도 있는 연구를 하기보다는 '덩어리 큰 프로젝트'를 따오는 게 일이 돼버렸다. 경쟁이 치열하다. 나도 어느 새 그 경쟁의 대열에 휩쓸려 들어가서 교수들을 독려하고 있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그 프로젝트 연구 결과를 학생들에게 가르쳐서 학생들의 잠재력을 키워준다고 하지만, 교수는 교수대로 연구용역 따는데 스트레스 받고 있고 학생들도 취업준비하느라 대학생으로서의 인문학적 소양을 키울 기회가 없다. 대학이 너무 삭막해진 것 같다.
지금 상황은 '아카데미즘의 종언'(the end of academism)이다. 교수도 아카데미즘을 추구할 수 없다. 학생들도 인간과 사회와 국가의 현실과 미래에 대해 고민하면서 토론할 여유가 별로 없는 것 같다. 너무 현실에 찌들려 인텔리로서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
또 세계 대학 순위까지 발표하고 하는데, 이건 미국과 영국이 자기들의 문화적 우위를 과시하기 위해서 시작한 놀음이라고 본다. 최근 보도를 보니 홍콩에 상위권 대학이 4개가 있다는 기사가 여기저기 실렸던데, 등수를 매기는 게 옳은 것인지 의문이다. 영국, 미국 중심의 기준에 맞춰 순위 매기기에 발목 잡혀서 꼭 끌려가야 하느냐는 말이다. 대세가 그쪽으로 가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하다못해 대학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정성분석이라도 좀 있으면 좋겠다. SCI급 논문 수, 연구비 수주액, 학생 취업률 등 전부 정량분석이다.
지금 대학에서 취업률이 굉장히 중요하다. 물론 대학 졸업하고 취직도 못한다면 학부모 입장에서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어렵게 등록금 마련해 대학 보낼 때는 국가와 사회의 지도자가 되기를 기대하지 않았겠나. 월급만 받아오는 식의 취직을 바라지는 않을 것인데, 현실은 그쪽으로 가고 있다. 심지어 4대 보험만 되면 아무 데나 취직만 하라고 학생들의 눈높이를 낮추는 게 일인 대학도 있다고 한다.
장래성 없는 분야라도 취업 인원으로는 잡히니까 대학 등수는 올라간다. 반면 인텔리로서의 대학생,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고 인간과 사회의 미래를 고민하는 학생을 키우려는 대학은 대학 순위를 매기는데 있어서는 불리하다. 그렇게 해서 우리나라 대학들의 국제경쟁력이 키워지겠나.
그렇지 않아도 한국 교육이 주입 암기식이고 획일적이기 때문에 경쟁력 없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미국은 창의성을 존중하고 토론식 위주인데, 전체적인 큰 그림을 보고 어느 쪽으로 방향을 설정해야 더 나은 사회가 될 것인지를 초·중·고교부터 대학 때까지 고민하고 의견을 개진하는 교육을 받으니까 하바드 대학 마이클 샌델 교수의 강의와 같은 토론을 위주로 하는 수준 높은 강의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러니 세계적인 지도자나 전략가가 안 나올 수 없다. 미국의 힘이 그런데서 나오는 것이다.
사회적·도덕적인 딜레마 속에서 좀 더 합리적인 대안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훈련과 교육을 받으며 키워져야 하는데 우리 대학은 그렇지 못하다. 무조건 취직해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연구 용역 따와라, 이렇게 되니까 본의는 아니겠지만 대학교육 정책이 아카데미즘을 죽이는 쪽으로 가지 않나 싶다.
프레시안 : 단지 교육정책의 문제라기보다 사회 전반적인 문제이기도 한 것도 같다. 박정희 체제의 후과인 것 같기도 하고.
정세현 : 대학 교육의 왜곡 요인은 1960∼70년대 양적 성장의 연장선상에서 지난 80년대에 이미 그 씨앗이 뿌려진 측면도 있다고 본다. 80년대에 대학 설립 인가를 너무 많이 내줬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서 최근에는 고교 졸업생의 87%가 대학에 진학하는데, 앞으로 10년만 있으면 대학 정원보다 고교졸업생이 훨씬 적어진다. 대학 신입생이 한해 65만 명이라는데 2020년 고교 졸업생 수가 47~8만까지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대학들도 살아남기 위해 정원을 줄이고 감량을 해야 하는데, 앞으로 그것도 큰일이다.
프레시안 :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정세현 : 대학 일에 몰두할 뿐이다. 좋은 학생들 유치해서 전문성과 함께 높은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텔리로 키워 내는 일에 전념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지난 20일 제주도에서 제1회 '총장과 학부모와의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학생들을 잘 가르칠 테니 학교를 믿어라, 주변의 좋은 학생들을 원광대로 보내 달라, 그런 얘기를 나눴다. 제주에서 시작해서 앞으로 일산까지 갈 계획이다. 해보니까 대학 총장은 정신노동만 하는 자리가 아니라 육체노동도 함께하는 자리인 것 같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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