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중동은 불타고 있다>(나무와숲 펴냄)라는 책을 낸 중동 전문가 유달승 한국외대 교수는 일부 서구 언론에서 아랍 민주화 운동을 'SNS 혁명'으로 규정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며, 이는 근본적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아랍 민주화 운동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며, 지난 1950-60년대 아랍지역을 풍미했던 민족주의·사회주의 운동 등 '위로부터의 혁명'이 좌절된 이후 나타난 40여년만의 역사적 대사건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유 교수는 미국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테러와의 전쟁'이 아니라 '석유를 위한 전쟁'이라는 것을 구체적 사례와 역사적 근거를 들어 지적했다. 또 이라크와 아프간 뿐 아니라, 파키스탄과 레바논, 팔레스타인에서 발생한 무력충돌 역시 석유자원의 발굴과 수송을 통제함으로써 세계 패권을 유지하려는 미국‧서방의 전략과 무관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유 교수는 이어 향후 이 지역의 주요 국가들이 어떤 변화를 겪게 될 것인지에 대해 거시적인 관점에서 조망했다. 지난 2월 민주화 시위 이후 대선과 총선을 앞둔 이집트와, '녹색운동'을 통한 이슬람 공화국 체제의 개혁이라는 숙제를 남겨둔 이란의 상황에 대해 분석하면서 그는 이후 중동 지역에서 이슬람주의의 제도화가 중요 쟁점이 될 것이라고 보기도 했다.
한편 그는 국제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의 사살이 중동 정세에 작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빈 라덴의 사살은 아랍 민주화 운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특히 예멘과 바레인 등 민주화 시위대에 의해 위기를 맞은 친미정권이 '테러와의 전쟁'을 빌미삼아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면서 기사회생하게 될 가능성을 지적했다.
다음은 지난 12일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가 진행한 유 교수와의 대담 내용이다. <편집자>
▲ 유달승 한국외대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
팔레스타인 포함, 중동의 모든 전쟁은 '석유 때문이야'
프레시안 : 지난달 발간된 유 교수의 책 <중동은 불타고 있다>는 석유가 중동 문제의 근원에 있다는 관점에서 이 지역을 조망하고 있다. 먼저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가 궁금하다.
유달승 : 9.11 테러 이후에 많은 전쟁이 일어났다. 아프간 전쟁을 '파이프라인 전쟁'(송유관 전쟁), 이라크 전쟁을 '석유 전쟁'이라고 지적하는 시각이 대부분이다. 이런 관점에서 검토하다가, 1999년 제정된 미국의 '실크로드 전략법'을 보게 됐다.
법안은 지중해에서부터 중앙아시아까지 폭넓은 지역에 걸쳐 미국의 전략적·경제적 이익을 규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국의 외교정책, 특히 석유 부분에서 러시아와 중국, 이란을 견제한다는 것이 주요 목적으로 돼 있다.
'실크로드 전략법'은 9.11 테러(2001년) 이전에 제정된 법이다. 그러나 9.11 이후 중동에서 벌어진 일들은 이 법안에 나온 시나리오와 비슷한 식으로 진행됐다. 그렇다면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하다 보니 (우연히)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러시아 등을 견제하고 세계 패권 구도를 유지하기 위해 목적의식적으로 진행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됐다.
프레시안 : 1999년이라면 클린턴 행정부 때고, 부시 행정부의 딕 체니 부통령이 에너지 정책 관련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기도 전이다. 미국의 대중동 석유자원 전략의 뿌리가 상당히 깊은 것 같다.
유달승 : 미국 대외정책은 사실 공화당 정부나 민주당 정부나 미국의 국익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오히려 개입주의적인 민주당 정권 하에서 국제 분쟁과 갈등이 많이 일어났다. 공화당은 대체로 고립주의를 견지하는데, 물론 부시 행정부는 공화당이라 해도 예외적 사항이다. 특히 중앙아시아가 부각된 것은 소련 붕괴 이후 단계별로 추진돼 온 미국의 세계 패권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이라크전은 대량살상무기(WMD)가 구실이었고, 중간에 '자유 이라크 작전'을 통해 이라크인들의 자유를 위한다고 했지만 별 설득력은 없어 보인다. 아프간전은 에너지 패권 전쟁임이 비교적 명확한데, 사실 가장 큰 전쟁은 이라크전인 것 같다. 이라크전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유달승 : 단적으로 석유전쟁이라고 규정한다. 가장 많이 언급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석유 매장량 자체도 많지만, 다른 산유국과는 달리 석유가 육지에 매장돼 있기 때문에 채굴 비용이 상당히 저렴하다는 것도 중요하다.
미국에게 있어서 초미의 관심사인 이라크 정부의 '석유법' 초안은 아직 발효되지 않고 있다. 연방정부에서는 통과됐지만, 쿠르드족 자치정부는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라크의 석유 매장 지대는 남북으로 나뉘어 있는데, 남부는 정부와 같은 종파인 시아파 지역이라 크게 문제가 없지만 북부는 쿠르드족 자치구다.
사담 후세인 정권의 석유 국유화 정책 이후 이라크는 외국 자본의 진출을 통제해 왔지만, 1991년 걸프전 이후 유엔의 이라크 경제제재가 계속되는 동안 이라크 석유개발에 참여한 나라는 중국, 러시아, 프랑스 등이다. 미국과 영국은 제외됐었다. 만약에 이라크전쟁이 없었더라면 이라크 석유개발은 중국, 러시아, 프랑스 등이 거의 도맡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으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침공 당사자인 미국이 이라크 석유개발의 주도권을 갖게 된 것이다. 이번에 '석유법'이 통과되면 30년 만에 미국과 영국이 이라크 석유에 진출할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러시아가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국에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않은 것 전쟁 이후를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반대했다면 전쟁 이후 이라크 석유시장에 들어가는 데 큰 장애가 됐을 것이나 지금은 중국도 이라크에 들어가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전쟁 이후 이라크 석유는 미국과 영국이 주(主)이기는 하지만,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중국 등에도 약간의 떡고물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석유 뿐만 아니라 이라크의 지정학적 역할도 상당히 중요하다. 주목할 부분은, 탈냉전 이후 미군이 대(對) 소련 방어망 구축이라는 원래의 배치에서 에너지 자원 중심으로 재배치가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주한미군 재배치 역시 이에 포함돼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라크는 상당히 중요한 전략 요충지다. 이라크는 중동의 가장 중심부에 있고, 이라크의 미군기지는 중동 전역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프레시안 : 석유 확보 자체도 중요하지만, 2000년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에서 석유대금을 달러가 아닌 유로화(貨)로 결제받겠다고 밝힌 것도 전쟁의 원인이 됐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이는 달러의 위상과도 연계된 측면이 있기 때문에 미국에는 상당한 위협이 됐다는 것이다. 유로화 결제가 확산되면 달러화의 쓰임새가 줄어들고 그렇게 되면 달러화의 평가절하 등 국제적 위상이 추락하게 되기 때문이다.
유달승 : 그렇다. 단일 현물시장에서 가장 비중이 큰 것이 석유다. 석유대금은 보통 달러로만 결제돼 왔고, '페트로 달러'라는 용어도 나온다. 여기에 가장 앞장서 반기를 든 것이 후세인이었다. 2000년 8월 후세인은 이라크를 방문한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에게 석유대금 유로 결제를 제안했고, 실제로 11월부터 이라크 석유대금을 유로로 받겠다고 했다. 이 부분도 관련이 있다. (그러나 2003년 이라크전 이후 미국은 이라크 석유 결제 화폐단위를 다시 달러로 바꿨다 : 편집자)
이에는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어떤 입장인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라크 다음으로 베네수엘라와 이란도 유로화 결제를 시도하고 있고, (다른 나라에도) 강조하고는 있지만 대부분 친미국가들이어서 동조하지 않고 있다. 실제로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UAE) 등도 달러가 일방적이었던 자국 내 외환보유율에서 유로화 비중을 높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 '페트로 유로'(석유대금의 유로화 결제)를 추진하지는 않고 있다.
프레시안 : 아직 달러 패권에 위협적인 수준까지 간 것은 아니다?
유달승 :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이) 아직 이란을 공격하지는 않고 있다. (웃음)
프레시안 : 이라크와 아프간은 그렇다 치고, 레바논이나 가자지구는 자원이 아닌 미국의 이스라엘 정책이 주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지역들에서 일어나는 분쟁도 석유 이권과 연관지어 설명 가능한가? 석유와 이스라엘 문제는 별개 아닐까?
유달승 : 먼저 미국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볼 필요가 있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후 미국과 이스라엘은 전략적 관계로 발전하게 되는데, 미국 입장에서는 여러 아랍국가들을 다 지원하는 것보다 이스라엘 하나를 지원함으로써 중동에서 효율적으로 자신들의 정책을 관철시키려는 취지다.
레바논 전쟁이나 가자 전쟁을 '에너지 전쟁'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측면에서, 레바논 전쟁은 아제르바이잔의 바쿠(B)와, 그루지야의 트빌리시(T), 터키의 세이한(C)을 연결하는 'BTC 송유관 사업'과 연관돼 있다. 이 공사가 2005년 완공됐고, 터키와 이스라엘은 이 송유관을 이스라엘의 항구도시 아슈켈론까지 확장하는 협약을 맺게 된다. 레바논 전쟁은 바로 다음해인 2006년이다.
이는 아슈켈론으로 이어지는 송유관이 시리아와 레바논을 경유하게 된다는 사정과 연결시켜 봐야 한다. 이스라엘은 헤즈볼라 제거라는 명목으로 레바논 남부를 침공했는데, 이는 공식적인 이유일 뿐이고 사실 레바논에 친이스라엘 정부를 수립해서 송유관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는 움직임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2009년 가자전쟁도 마찬가지다. 아슈켈론은 바로 가자지구 위쪽에 있다. 가자지구 북부에서 로켓포를 쏘면 아슈켈론에 닿는다. 이런 측면에서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군이 상당히 오래 가자지구에 주둔하지 않았나 한다.
또 하나는 가자지구 앞 해역에서 발굴된 천연가스전(田)과도 연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1999년에 영국 기업 '브리티시가스그룹'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25년간 협약을 맺었고, 2000년에 가스전을 발굴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이스라엘은 가자 해역의 팔레스타인 소유권을 부정한다. 이를 놓고 협상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가자전쟁이 발발했다.
아랍의 봄, 의미와 전망(1)-이집트 : 신자유주의
프레시안 : 이를 중동 민주화와 연관시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자원 부국인 중동에서 많은 나라들이 자원을 국민의 뜻대로 못 쓰고 있는 실정이다.
유달승 : 중동 민주화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런데 아랍 민주화를 보는 기존의 시각에는 문제가 있다. 기존의 시각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이른바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혁명'이라고 보는 것이다. SNS와 세계화가 혁명을 낳았다고 보는 것인데, 이는 문제다. 기본적으로 서구 문명의 영향으로 아랍 세계가 변화됐다고 보는 시각이기 때문이다.
▲ 유달승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
서구에서는 1979년 이란 혁명을 '카세트테이프 혁명'이라고 했다. 해외에서 호메이니의 음성을 카세트로 녹음해서 보낸 것이 혁명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당시 나는 중학생이었는데, 부모님에게 워크맨을 사달라고 졸랐다. 32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번에는 이집트 혁명을 'SNS 혁명'이라고 한다. 스마트폰 사야 하나? (웃음)
'SNS 혁명'이라는 것은 고등교육을 받은 젊은 세대와 중산층이 혁명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시각이기도 하다. 신세대와 중산층은 혁명을 이끈 세력의 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이들이 주도적 세력은 아니었다. 혁명의 명칭은 성격과 본질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SNS 혁명'이라는 명칭에는 역사적 사건의 본질과 의미를 왜곡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본다.
둘째, 아랍 각국의 정치경제적 원인에서 민주화 운동의 원인을 찾고 있는 시각이 있다. 장기 독재와 권력세습, 경제적 실업난과 빈부 격차 등으로 인해 촉발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아랍 내부의 문제라고 보게 되면, '외부의 문제'를 놓치게 된다. 예를 들어, 정권이 무너진 후세인과 무바라크만 독재자인 것이 아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지금 세상에도 전제왕정 통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내부의 문제 때문이라면, 사우디에도 시민혁명이 일어나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 편집자) 내부와 외부의 문제를 같이 봐야 한다.
그런 부분에서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결합해서 평가해야 한다. 아랍 민주화의 불씨가 된 것은 튀니지에서 일어난 모하메드 부아지지의 분신이었다. 대졸 출신 청년 노점상이 분신할 수밖에 없는 현실, 즉 청년실업과 중산층 붕괴 등이 (민주화 시위의) 주요 원인이 됐다는 것이다. 또 가장 먼저 정권이 무너진 튀니지와 이집트는 가장 모범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수행한 나라들이었다. 빈부격차와 경제난 뿐 아니라 장기 독재 역시 신자유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미국이 '외부적 요인'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무바라크가 퇴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미국에 있다. 이는 미국 입장에서는 이란 혁명의 학습 효과다. 그대로 두면 이란처럼 반미 국가가 될 수 있으니까 일단 불을 끄자는 것이다. 하지만 무바라크를 대체할 다른 친미정권을 수립하려 할 것이다.
프레시안 : 향후 이집트 정세는 어떻게 흘러갈까?
유달승 : 군부가 계속 총선을 늦추고 있는데, 이는 시간벌기라고 본다. 기본적으로 이집트 군부는 친미 성향이다. 현 상태에서 총선을 치르면 무슬림형제단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을 것이 자명하다. 민주화를 이끈 세력의 실체도 불명확하고, 기존에 가장 조직력을 갖고 있는 곳이 무슬림형제단이다. 군부가 현 상태를 유지하려 하는 것은 체제를 정비해서, 선거에서 무슬림형제단에 많은 지분을 주지 않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또 한때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이 언론의 주목을 받았지만, 해외에서 갖는 상징적인 의미와 국내의 지지는 좀 다르다. 이집트 국내에서는 엘바라데이보다는 아므르 무사 아랍연맹 사무총장이 더 주목받고 있다.
이런 국면을 전환하기 위해 엘바라데이가 자서전을 냈는데, 내용이 다소 충격적이다. 이라크전은 잘못된 전쟁이므로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 그 참모들을 전범재판에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대중에게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것이고, 분명 그냥 지나칠 사건은 아니다.
이집트에서 미국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무사이고 다음은 엘바라데이, 무슬림형제단 순이다. 미국은 엘바라데이를 견제하고 있다. 무사의 부상도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한 측면이 있다. 엘바라데이는 서구 언론의 비난에서 무슬림형제단을 보호하고 나섰고, 무슬림형제단은 대선에서 후보를 내지 않겠다고 했다.
무슬림형제단의 대선후보 불출마에는 여러 의미가 있는데, 서구에서 이집트 민주화 운동을 왜곡해 받아들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측면도 있지만 엘바라데이와의 연대를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양자 간에 암묵적인 합의나 동의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즉 무슬림형제단이 대선에서 간접적으로 엘바라데이를 '민다'고 볼 수 있다.
아랍의 봄, 의미와 전망(2)-이란 : 이슬람주의
프레시안 : 이란에서도 최근 민주화 시위가 있었는데, 서방과 한국 언론은 이를 상당히 관심있게 봤다. 이란 민주화 운동의 전망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유달승 : 이란 민주화 운동은 2009년 대선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란 민주화 운동을 '녹색운동'이라고 하는데, 당시 대선에서 개혁파 후보를 상징하는 색이 녹색이었다. '녹색'의 상징성을 놓고 볼 때, 이는 단순히 민주화로만은 보기 어려운 면도 있다. 녹색은 성직자와 (이슬람교의) 믿음을 상징하는 색이고, 중동 많은 국가의 국기가 녹색이다. 이는 운동이 체제 내적이고 성직자 중심이라는 점을 잘 드러낸다.
사실 근본적으로 중동 역사는 이란이 이끌어 왔다고 본다. 1906년에 이란에서는 입헌 혁명 이 발발했다. 이는 상인과 성직자가 총을 들고 왕을 압박해 굴복시켜, 의회와 헌법을 만들고 절대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바꿔낸 혁명적 사건이다. 이 사건은 중동 전역의 근대화 혁명으로 확산된다. 그 다음은 이슬람 혁명이다. 이슬람주의는 아랍 민족주의 쇠퇴 이후 중동에서 새로이 대체 이론으로 떠올랐다.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아랍 전역에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이 확산됐다.
현재 이란 상황은 이슬람 혁명 이후의 또다른 정치실험이다. 이란은 이슬람 이데올로기 국가이고, 억압적인 면이 있긴 하다. 하지만 녹색운동 역시 세속주의나 체제 전복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 내에서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슬람 공화국이라는 틀 안에서 자유롭고 합법적인 민주 선거를 통해, 또 법을 존중하는 절차에 따라 개혁을 이루자는 것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는 운동이었고, 파급력이나 폭발력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면이 있다. 지금까지 이란의 역할이 중요했지만, '아랍의 봄'을 계기로 무게중심이 이동한다고 보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자유롭고 개방적인 이슬람운동을 지향하는 형태로 진전이 이뤄진다면 (이슬람주의가) 다시 큰 파급력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이슬람공화국이라는 틀 안에서, 서구식은 아니라도 일정 정도 민의를 반영할 수있는 민주적 구조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인가?
유달승 : 종교적 사회는 정책이 종교적일 수밖에 없고, 자연스럽게 종교 국가로 갈 수밖에 없다. 이집트 등 세속화된 나라도 종교성 또는 종교부라는 독특한 기구가 있다. 이것은 이들 나라가 종교사회라는 반증이다. 현재 이란은 종교 국가로 가기 위해 강압적으로 정책을 주입하고 있기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지만, 국민의 뜻에 맞게 자유로운 선거에 따라 추진하게 된다면 그 역시 일종의 민주주의 모델이라고 본다.
사실 미국 역시 취임식 때 대통령이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하는 등 국가 기원 자체가 종교적인 부분이 있다. 중동도 그들 내부에 그런 성향이 뿌리깊게 있기 때문에 정책이 종교색을 띠는 것은 불가분이지만, 이슬람교가 민주주의와 양립 못할 이유는 없다.
예를 들어 이집트 총선에서는 무슬림형제단의 승리가 유력하고, 실제로 무슬림형제단은 이집트 민주화 시위에서 친정부 시위대의 테러에 맞서 싸워 민주화 시위대를 보호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무슬림형제단이 앞장서서 시위를 이끈 것은 아니지만 전면에 드러나지 않게 '함께 간다'는 식으로 운동을 했다고 본다.
또 하나, 터키의 변화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터키는 세속주의를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집권당은 이슬람정당인 정의개발당이다. 튀니지 최대 야당도 '터키식 모델'을 언급했고, 현 상태라면 이집트도 터키 형태로 갈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다. 아랍에서 점진적 변화를 위해서는 합법 정당이 집권하는 터키식 모델의 부상이 이뤄질 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터키 헌법은 정교분리 원칙을 세우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이슬람 정당이 힘을 갖고 있고, 현 정부는 오히려 이슬람주의로 회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음주가 허용되는 연령이 만 18세에서 만 24세 이상으로 변경하는 음주법이 최근 제정됐다. 이는 이슬람주의 정책을 부활시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터키의 이런 변화가 오히려 ('터키식 모델'의) 부상을 일으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레시안 : 시간 순서상으로 보면, 튀니지와 이집트 다음에 시위가 일어난 국가 중 하나가 리비아다. 그러나 리비아 사태는 아랍 전반의 민주화 운동과는 다른 측면이 보인다.
유달승 : 리비아 사태는 단계별로 봐야 한다. 처음에는 민주항쟁이었으나, 1주일도 되기 전에 내전으로 발달했고, 지금은 (국제적 의미에서) 전쟁이다. 지난 2월 12일 인권 변호사 석방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가 17일 분노의 날 시위로 확산됐는데, 18일부터는 경찰서를 습격하는 폭력적인 전개를 보였고 20일에는 바로 봉기가 일어났다. 이런 과정 속에서 반군이 자발적으로 조직됐다기보다는 다양한 세력들이 준비돼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알카에다 연계조직인 '리비아 이슬람 투쟁그룹'(LIFG)이나 미국과 사우디의 자금 지원을 받는 '민족해방전선'(NSF) 등이 사태 전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상황 자체도 외부 지원 없이 순식간에 일어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서방의 공습 시점도 카다피군이 벵가지를 공격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반군을 보호하고 지원하기 위해 이뤄진 공습이 아닌가 한다. 또한 유엔은 카다피 제거를 언급하지 않지만, 트리폴리의 카다피 관저를 공격하고 그의 아들이 사망한 사건 등은 카다피의 제거를 겨냥한 공습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정부군이 서부를, 반군이 동부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리비아의 동서 분할 시나리오가 유력하다. 리비아 석유의 80%가 동부에 있기 때문에, 서방 입장에서 동부 지역의 분할은 유리한 국면이 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사태 종결을 위해서는) 서방이 지상군을 투입하는 수밖에 없다. 반군의 군사력으로 카다피군을 압도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방 지상군 투입은 여론상 쉽지 않다. 분할도, 서방 개입도 없이 현재 상태가 지속돼 내전이 장기화된다면 소말리아 내전과 같은 형태(무정부상태)도 예상할 수 있다고 본다.
프레시안 : 아까 사우디에서는 아직도 왕정이 유지되고 있다는 얘기도 나왔는데, 그런 사우디가 민주주의를 지지한답시고 리비아 공습에 동참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눈길을 끌었다. 사우디는 또 바레인에 시위 진압을 위해 자국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우디도 문제 아닌가?
유달승 : 사우디도 민주화 바람의 무풍지대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사우디에서 시위가 확산되지 않은 것이 바로 바레인 때문이다. 사우디가 바레인에 파병한 것은 두 가지 의도가 있다. 첫째, 자국 내의 불만 세력을 잠재우기 위해 군대를 동원할 명분을 얻었다는 것이고, 둘째, 바레인 민주화 운동의 자국 확산을 방지하겠다는 부분도 있다.
또 사우디가 군을 파견한 빌미 중의 하나가 바레인 사태를 시아파와 수니파 간의 종파 갈등으로 보는 시각이다. 많은 언론들이 바레인 사태를 이렇게 보고 있는데, 이는 또다른 왜곡이다. 국민 다수가 시아파인 상황에서 탄압받는 국민들이 시위에 나서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시위대 중 다수가 시아파인 것도 당연하다. 만약 시위대가 시아파 국가 수립을 요구하고 나섰다면 종파 갈등이겠지만 그렇지 않다. 바레인 사태는 민주화 운동이지 종파 갈등이 아니다.
아랍의 봄, 의미와 전망(3)-빈 라덴 사살의 영향과 중동의 미래
프레시안 : 오사마 빈 라덴이 사살된 지 2주일이 지났지만, 연일 관련 뉴스가 언론에서 다뤄지고 있다. 빈 라덴의 사살이 중동·북아프리카 민주화 운동 등 향후 이 지역의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유달승 : 빈 라덴 사살 이후에 중동은 커다란 전환점을 맞을 것이라고 본다. 우선 미군의 출구전략이 가시화될 가능성이 높다. 사실상 9.11 테러의 상징이 빈 라덴이고, 그 명분으로 아프간을 공격했었는데 이미 전쟁 기간이 10년을 넘었고 (미국은) 위기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이런 가운데 이뤄진 빈 라덴 사살은 공식적인 출구전략, 즉 미군 철수의 명분이 될 수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
이런 가운데 테러조직 소탕을 명분으로 살레 대통령에게 (서방에서) 힘을 실어주는 과정이 있게 된다면, 예멘 민주화 운동은 크게 약화될 것이다. 이는 친미 정권의 '도미노', 즉 연속적 붕괴를 방지하는 효과를 거두게 될 수 있다. 이제까지의 아랍 민주화 운동에서, 반미정부가 전복된 적은 없으며 친미정권 붕괴의 도미노 현상이 일어났다. 큰 쟁점은 예멘과 바레인인데, 바레인 역시 마찬가지다.
빈 라덴 사살작전으로 미국이 국제적으로 비난 여론을 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감행했다는 것은 (이를 감수할 만한) 큰 성과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오는 7월에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 철수가 시작될 것이고, 확산되는 아랍 민주화 운동으로 인한 도미노 현상도 꺾일 수 있다. 이는 미국으로서는 값진 성과다.
프레시안 : 존 페퍼 <포린폴리시인포커스>(FPIF) 공동소장 등 일부 전문가들은 아랍 민주화 운동이 보여준 것은 빈 라덴과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즘이 아랍 민중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라는 평가를 내놓기도 했는데, 이와 연관지어 볼 수 있을까?
유달승 : 사실상 빈 라덴은 9.11 테러 이후에 영향력을 상실했다. 유명무실한 상태에 있었다가 (오히려) 이번 사건으로 '부활'한 듯 보인다. 빈 라덴이 유명무실해졌다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는 이슬람 극단주의 운동의 입지가 약화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지난 2005년을 기점으로 해서 일어난 변화다. 이슬람 운동이 과거의 무장단체에서 제도권 정당으로 바뀌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이 이 해에 선거에 참여했고, 2006년에는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와 레바논의 헤즈볼라가 선거에 참여하게 됐다. (하마스는 제1당이 되어 총리를 배출했으며, 현 레바논 총리 역시 헤즈볼라가 지지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빈 라덴 사살로 아랍 세계에 (미국에 대한) 분노가 일어났고, 이 분노가 결합되면서 다시 이슬람 극단주의 운동이 확산되는 부분이 있다. 이는 한편으로는 아랍 내부의 문제지만, 일부에서는 서구의 음모라는 시각도 제기된다. 아랍 민주화 운동 이후에 이슬람주의의 (합법 조직으로서의) 입지가 강화되는 것을 약화시키려는 음모가 있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프레시안 : 빈 라덴 사살 이후 아프간에서의 미군 철수가 본격화할 수 있다고 했는데, 전장에서 쉽게 손을 뗄 수 있을까?
유달승 : 남아시아 지역에서 미군 활동의 주무대가 아프간에서 파키스탄으로 옮겨갈 것이라고 본다. 파키스탄의 자르다리 정권이 효율적으로 파키스탄 내부를 통제하지 못하면 (미국에 의해) 지도부가 교체되고 다른 친미 인사가 정권을 잡을 수 있다. 만약 그게 안 된다면 또다른 분쟁, 전투가 일어날 것이다.
사실 크게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파키스탄 내에서는 계속 전투가 있었다. 파키스탄 북서부 와지리스탄은 자치정부, 사실상 독립정부이고 '이슬람 군주국(에미리트. Emirate)'이 선포되기도 했다. 또 파키스탄 서부(발루치스탄)에서도 발루치족(族)의 분리독립운동이 계속되고 있다. 중국과 인도도 파키스탄을 예의주시하고 있으며 미국-인도가 한 축이 되고 중국-파키스탄이 다른 축이 되는 국제 분쟁의 가능성도 나오고 있다.
이런 맥락 속에서 빈 라덴 사살 이후 (미군의) 주무대가 아프간에서 파키스탄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크다. 아프팍(아프간-파키스탄), 또는 파카프라는 용어에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2009년 이후 오바마 행정부의 아프팍 전쟁은 아프간을 강조하면서도 전선은 파키스탄으로 확대했다. 사실상 이때부터 아프간보다는 파키스탄에 주력한 것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빈 라덴도 파키스탄에 있었고, 탈레반 최고지도자 물라 오마르 역시 파키스탄에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미국이 테러조직이라며 적대하고 있는 무장세력의 수뇌가 모두 파키스탄에 있는 것이다. 또 파키스탄은 이슬람 국가 중 유일한 핵보유국이다.
다른 부분은 또다시 석유문제와 관련돼 있다. 파키스탄에서는 두 개의 대형 송유관 사업이 교차한다. 미국이 주도하는 'TAPI', 즉 투르크메니스탄-아프간-파키스탄-인도를 잇는 송유관 사업과, 이란 주도의 'IPI'(이란-파키스탄-인도) 송유관이 교차하는 중심에 파키스탄이 있다.
"민주화운동, 67년 중동전쟁 이후 아랍권 최대 사건"
프레시안 : '아랍의 봄'이 가지는 역사적인 의미를 평가한다면? 또 향후 민주화 운동은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리라고 보는가?
유달승 : 아랍 민주화 운동은 제3차 중동전쟁 이후 가장 큰 역사적 사건이라고 본다. 1967년의 제3차 중동전쟁은, 6일전쟁이라는 치욕적인 패배라는 부분도 있지만 군사적 패배 이상의 큰 의미를 갖는다.
중동 민주화 운동을 '아랍판 시민혁명'이라고 하는데, 사실 아랍 민족주의의 기원은 1798년 나폴레옹의 정복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자유 사상이 확산됐다. 이후 1952년 이집트에서 나세르 혁명이 성공하면서 전반적으로 아랍 민족주의가 확산되고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변화되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중동전쟁 패배 이후 이런 의미가 죽어 버렸다. 이는 (아랍 민족주의라는) '위로부터의 혁명'의 패배다. 이후 이집트는 1979년 미국과 캠프 데이비드 협정 체결 등 친미의 길을 가게 된다. 이로 인해 아랍 내부에는 패배주의와 무기력함이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이번의 아랍 민주화 운동은 이를 극복하는 새로운 흐름이며, '아래로부터 혁명' 즉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겠지만 이것이 중요한 부분이며, 이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