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플런은 발표하는 글마다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 이유는 민주주의는 일정한 조건을 갖춘 사회가 가질 수 있는 제도이지, 후진국이나 종교적, 문화적 갈등이 심한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이식될 경우 혼란만 초래한다는 철저한 '현실주의적 관점'을 역설하기 때문이다.
캐플런의 이런 관점은 일관성이 있어 민주주의를 앞세워 제3세계를 정복하려는 미국의 외교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또 그는 대북 정책에서도 북한의 붕괴를 유도하려는 강경책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이런 주장들은 미국의 네오콘들과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어서 그의 견해는 <어틀랜틱 먼슬리>나 <뉴리퍼블릭> 등 미국의 진보성향의 매체들에도 자주 실린다.
이번 기고문에서도 캐플런은 최근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독재정권들에서 벌어지는 반정부 시위가 모두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독재자에게 저항하는 젊은이들의 동기에는 독재자의 통치 결과 더 많은 자유를 원하는 경우와, 단지 독재자의 억압에 대한 분노가 쌓여서 폭발하는 경우를 구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인권탄압과 부패로 악명높은 독재자들도 높이 평가한다는 점에서 논란을 예고하기도 했다.<편집자>
▲ 오만의 카부스(71) 국왕. 로버트 캐플런은 카부스는 왕정의 군주이지만 국민이 더 많은 자유를 요구할 만큼 경제 및 사회적 발전을 이끌어온 '유능한 독재자'라고 평가한다. ⓒ로이터=뉴시스 |
분석이라는 것은 차이를 식별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랍권 일대에서 격변이 일어나고 있는 요즘 차이를 인식하는 분석이 실종되고 있다. 네오콘들이 주장하듯 모든 독재자들이 다 나쁜 것은 아니며, 모든 독재자들이 타도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독재자들 사이에서 보여지는 도덕적 차이는 독재자와 민주주의자와의 차이만큼 엄청나게 크다. 유능한 독재자마저 끌어내려서는 안된다.
좋은 독재자들은 뚜렷한 특성을 보인다. 더 많은 자유가 주어지는 사회로 진전할 여건을 마련하는 능력을 발휘한다. 특히 그는 제도적으로 보다 복잡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사회적 계약을 마련해 나간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요즘 오만에서도 젊은이들의 격렬한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고 해도,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와 오만의 카부스 빈 사이드 국왕과는 천양지차다. 또한 이집트의 독재자였던 호스니 무바라크를 요르단의 정력적인 압둘라 국왕과 비교해서는 안된다.
오만의 카부스 국왕은, 국민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하고 중산층에 대한 열망을 고취시켰던중국의 덩샤오핑, 싱가포르의 리콴유,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처럼 아시아의 유능했던 독재자들과 비슷한 비전을 가지고 통치를 하고 있다.
요르단, 쿠웨이트, 그리고 아랍에미레이트연합(UAE)의 군주들처럼 카부스 국왕의 정통성은 오랜 왕정의 전통에 기반하고 있다. 북아프리카 경찰국가들처럼 전통의 뿌리도 없고, 비전도 없는 군부 출신과는 다르다.
독재자의 정통성은 국민을 피지배자가 아니라, 보다 나은 삶을 기대하는 존재로 대우하고, 경제 및 사회적 발전을 최우선 목표로 설정하는 사회적 계약이 존재하느냐에 달렸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사회적 혼란을 피하려면 최소한 연평균 7%의 경제성장을 달성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가 발전하게 되면 독재 체제의 사회적 계약은 존립근거를 잃게 된다. 시민, 특히 젊은이들은 경제적 자유에 걸맞는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게 된다.
중국과 오만의 젊은이들의 저항과 북아프리카 젊은이들의 저항
중국과 오만의 젊은이들과, 북아프리카의 젊은이들이 거리에 나선 이유에는 이런 차이가 있다. 중국과 오만의 젊은이들은 통치자로부터 더 많은 자유를 기대하도록 여건이 조성된 것이다. 통치자들이 제때 허용하지 않으면, 그들은 저항한다.
튀지니와 이집트에서 젊은이들이 저항한 것은 분노를 점점 더 참기 어려워지는 조건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노를 폭발시키기 위해 정권의 약점이 드러나는 순간을 기다려온 것이다.
리비아는 더 심각한 사회를 보여주는 사례다. 독재자 카다피는 제대로 된 독재자들과 달리 사회적 제도를 만들지 않았다. 걸프연안 국가들도 행정제도가 작동하고, 튀지니와 이집트에서도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어느 정도 작동한다. 반면 리비아는 제도 자체가 존재한다고 말하기 힘들 정도다.
새무얼 헌팅턴이 1960년대에 이미 설파했듯,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통치를 위해서는 더 많은 제도가 필요하다. 독재자의 임무는 수직적으로 보다 복잡한 사회를 만들어서 다양한 경제적 계층이 출현하고 시민들은 단계를 밞고 올라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경제개발과 개인의 자유를 진전시키는 것이 이런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훌륭한 독재자, 혼란없는 민주화 이행 허용해야
제대로 된 독재자의 성공은 독재를 포기하는 것이며, 그 자신이 결국 물러나는 것이다. 정치적 자유는 일정 수준의 사회적 복잡성이 동반되어야만 한다.
독재자가 성공적인 통치를 끝내고 비극적인 말로를 피하는 유일한 길은, 국민이 혼란 없이 자신의 통치를 넘어서 전진하도록 하는 것이다. 제대로 된 독재자는 생전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는 힘들다.
인도네시아에서 독재자 수하르토가 성공적인 민주주의의 시대로 이행하는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는 요즘에서야 나오고 있다. 그는 부패했다. 하지만 그의 통치는 국민에게 이로운 면이 없지 않았다.
카부스 국왕은 오만의 사회적 복잡도를 진전시켜오는 과정에서, 통치의 요체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 실현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가 이런 조치로 시위대를 진정시킬 수 있다면, 그는 아랍세계에서, 싱가포르를 아프리카 수준의 단계에서 선진국 대열로 끌어올린 리콴유로 떠오를 수 있다.
민주화를 위한 봉기가 일어나는 시기에 이런 관점은 인기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희열이 가라앉으면 독재 타도가 선거를 실시하는 것과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