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다피의 시위대 유혈 진압에 항의하는 뜻에서 지난 21일 사임한 무스타파 모하메드 압델 잘릴 전 법무장관은 시위대와 반정부 세력들이 과도정부를 구성했다고 26일(현지시간) 밝혔다. 이는 지난 24일 반(反)카다피 세력이 리비아 동부의 도시 알베이다에서 최초로 공동전선을 수립하기로 결정한지 3일 만에 일어난 일이다.
잘릴 전 법무장관은 과도정부가 시위대가 장악한 리비아 제2의 도시 벵가지에서 수립됐으며, 미스라타와 자위야 등 반정부 세력의 영향력 하에 있는 도시들의 시민 대표와 군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아랍 위성방송 <알자지라> 등 외신들이 전했다. 과도정부의 대표로 추대된 잘릴 전 장관은 현재 알베이다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잘릴 전 장관은 과도정부는 선거 때까지만 존속할 것이라며 "3개월 뒤 새로운 지도자를 뽑는 공정한 선거가 치러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7일 벵가지에서 과도정부 구성원의 명단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범죄행위의 책임은 오로지 카다피에게 있으며 카다피와의 협상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자유화된 리비아의 수도는 여전히 트리폴리라며 일각에서 제기된 리비아 동·서 분할설을 일축했다.
과도정부 수립 선포 직후 해외 주재 리비아 외교관들은 바로 과도정부 지지를 선언하고 나섰다. 알리 아우잘리 주미 리비아 대사는 이날 "(카다피가 아닌) 과도정부가 리비아 전체를 대표하는 정부"라며 과도정부 지지 입장을 밝혔다. 아우잘리 대사는 "우리는 리비아 전 지역이 해방될 때까지 과도 정부를 지지할 것"이라며 "리비아 전역의 해방이 빨리 실현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브라힘 다바시 유엔 주재 리비아 부대사도 "유엔의 리비아 대표부는 '원칙적으로' 과도정부를 지지한다"며 "(리비아 상황에 대해) 좀더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있는 중이긴 하지만, 과도정부를 지지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다소 신중하게 의사를 밝혔다. 이들은 과도정부에 대한 국제 사회의 지지를 촉구했다.
유엔 안보리 '카다피 제재 결의안' 채택…오바마 "카다피 물러나야"
유엔에서 카다피에게 압박을 가한 것은 다바시 부대사의 과도정부 지지 선언 뿐만이 아니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날 카다피의 유혈 진압을 '반인도적 범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국제형사재판소(ICC)가 즉각 이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도록 요구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15개 회원국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안보리는 카다피와 그 가족 및 핵심 측근에 대한 여행 금지와 자산 동결 등 내용도 결의안에 포함시켰다. 카다피 본인과 자녀 등 6명에 대해서는 자산 동결 조치가, 카다피의 가족 외에도 유혈 진압에 개입한 군과 정보기관 고위관계자 등 16명에 대해서는 여행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이날 채택된 안보리 결의안 1970호는 "평화적인 시위에 대한 폭력 진압을 포함한 중대하고 조직적인 인권 위반을 개탄하고 민간인 사망에 깊은 우려를 표명하면서 리비아 정부 최고위층이 지시한 민간인에 대한 적대 행위와 폭력을 단호히 거부한다"며 리비아 국민의 정당한 요구가 실현돼야 한다는 점과 폭력사태는 즉각 중지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유엔은 리비아 사태로 인해 1000여 명이 숨진 것으로 보고 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26일 안보리 결의안 채택에 앞서 유엔이 "구체적인 행동을 취해야 한다"면서 리비아의 사망자 수가 1000명 이상이라고 재확인했다. 반 총장은 지난 23일에도 "약 1000명의 리비아 국민들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언급한 바 있다.
같은 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카다피가 즉각 퇴진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백악관 성명에 따르면, 오바마 대통령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의 전화 통화에서 '카다피는 리비아를 통치할 정당성을 상실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어떤 지도자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자국민을 상대로 폭력을 사용하는 것 뿐이라면 그는 통치에 대한 적법성을 상실한 것"이라며 "지금 당장 떠나는 것이 나라를 위해 옳은 일"이라고 말했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도 이날 성명을 통해 "카다피는 국민의 신망을 잃었다"며 "더 이상의 폭력과 유혈사태 없이 물러나야 한다"고 말해 리비아 문제가 국무부의 '우선 순위'에 올라 있음을 명확히 했다. 미국은 앞서 25일에는 카다피 정권 인사들에 대한 미국 비자를 취소하는 등의 단독 제재 조치를 발표했다.
▲ 26일 밤(현지시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시위대를 강경 진압해 유혈 참사를 빚은 무아마르 카다피 리바아 국가 원수와 가족 및 정권 관계자들에 대한 제재 결의안을 채택했다. ⓒAP=연합 |
카다피 "지지자들이여, 무기를 들라" 선동
그러나 리비아의 상황은 여전히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다. 카다피의 차남 사이프 알-이슬람은 26일 "리비아 전 지역의 75%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상태"라며 여전히 카다피 정권이 리비아의 80%를 장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반정부 시위대에 외세가 개입했다며 리비아는 내전 위기를 맞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아랍의 형제국가들이 언론인들에게 매달 돈을 주면서 리비아와 카다피에 저항하도록 선동하는 글을 쓰게 하고 있다"면서 시위대가 '이슬람 테러리스트'라는 일관된 입장을 유지했다.
그는 아프리카 용병들이 시위대를 공격하고 있다는 목격자들의 증언과 언론 보도는 거짓말이라며 관련 사실을 부인하는 한편, "리비아 국민이 하나가 되지 않으면 미래가 없기 때문에 (정부와 반정부 세력 간에)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며 반정부 시위대에 '휴전'을 촉구했다.
이는 전날 카다피의 국영TV 연설보다는 한 걸음 물러선 것으로 보인다. 카다피는 25일 방영된 이 연설에서 지지자들을 위해 무기고를 개방할 것이라며 "리비아를 위해 싸울 준비를 하라"고 시위대 공격을 선동했다.
카다피는 "우리는 리비아의 영토에서 죽을 것이다. 우리는 이탈리아 제국에 그랬던 것처럼 외국의 저의를 분쇄할 것"이라며 "그들(시위대)에게 복수하고 국가를 수호하고 석유를 사수하라"고 말했다.
이날 카다피는 수도 트리폴리의 녹색광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요새 '레드캐슬' 위에서 리비아 국기를 흔들며 "우리는 적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연설했다. 그는 "리비아 국민들은 카다피를 사랑한다"며 "무아마르 카다피는 여러분 가운데 있다. 나는 국민과 함께 있다. 우리는 싸울 것이고 그들이 원한다면 그들을 죽일 것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목격자는 카다피 정권이 시위대 3명 이상을 체포해 온 지지자들에게 돈과 자동차를 보상으로 주고 있다고 미국 <AP> 통신에 전했다.
카다피 무차별 반격…사상자 규모 집계조차 어려워
리비아에서는 25일 '피의 금요일'로 불릴 만한 대참사에 이어 26일에도 일부 지역에서 카다피 친위세력과 반정부 시위대 간에 교전이 벌어지면서 유혈사태가 계속되고 있다.
이날 새벽 트리폴리 인근 자위야의 정유시설 단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1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목격자는 차량과 중화기를 동원한 카다피 친위세력이 무차별 공격을 퍼부어 50~60명 정도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증언했다. 자위야는 시위대가 장악한 도시지만 외곽 지역은 카다피 세력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날에도 전투가 벌어진 미스라타 인근 공군기지에서도 26일까지 교전이 이어졌다. <AP> 통신은 25일 탱크부대를 동원해 맹공을 펼친 카다피 친위세력이 기지의 상당 부분을 되찾았다고 전했으나 반정부 세력은 이들의 습격을 물리쳤다고 발표했다.
앞서 25일에는 수도 트리폴리에서 이슬람교의 '금요기도회'가 끝난 후 민주화 시위가 시작됐으나 보안군과 카다피 친위세력이 기관총 등을 동원해 무차별 발포해 최소 수십 명 이상이 사망했다.
현재 정확한 사상자 수는 집계조차 되지 않고 있는 상태다. 다바시 부대사는 이와 관련해 "사상자 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렵다"며 "만약 누군가 죽거나 다치면 그들(카다피 세력)이 와서 시신이나 부상자를 옮겨 간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망자가 '수천 명'에 달할 것이라고 25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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