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질서 있는 전환'을 촉구하고 있으며, 무바라크 대통령이 시위의 자유를 보장하고 국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을 수 차례 표명했다. 여타 서방 국가들도 이와 유사한 시각을 제시했다. 민주주의로의 전환 과정이 평화롭고 합법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저명한 철학자이며 정신분석학자인 슬라보예 지젝은 10일(현지시간)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기고한 칼럼 '타흐리르(해방) 광장의 기적'에서 이같은 서방 국가들의 입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지젝은 "합법적인 전환이라니, 이집트가 언제는 법치 국가였던 적이 있나?"라고 비꼬면서 서방 국가들의 이중성을 지적하는 한편 미국이 말하는 '질서 있는 전환' 역시 완전히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집트의 시위대는 자신들의 요구가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지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정부를 몰아내려 하고 있으며, 무바라크 정권과의 대화가 아니라 정권 퇴진을 바랄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타협의 여지는 없다"면서 "무바라크 정권 전체가 퇴진하지 않는다면 민중 봉기는 배반당한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또 미국이 바라는 '질서 있는 전환'이란 오마르 술레이만 신임 부통령을 중심으로 개헌과 대선 정국이 운영되는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인데, 지젝은 이를 "혁명의 과실을 가로채려는 것"이라며 "역겨워서 숨이 멎을 지경"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정보기관 수장 출신으로 고문 등 인권 탄압에 책임을 져야 할 술레이만 부통령이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관리할 인물로는 부적당하다는 지적이다.
한편 무바라크 정권이 퇴진하면 반(反) 이스라엘 성향의 정부가 들어설지 모른다는 시각에 대해 지젝은 "반유대주의는 오직 절망과 억압이라는 조건 하에서만 발현된다"며 이런 우려는 근거없는 우려라고 일축했다. 오히려 정부가 시위대를 '이스라엘의 간첩' 등으로 비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지젝은 '시위대와 정부, 누가 더 반유대주의적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다음은 이 칼럼의 주요 내용이다. (☞원문 보기) <편집자>
이집트 타흐리르 광장의 기적(For Egypt, This Is the Miracle of Tahrir Square)
이집트의 상황에서 '기적적인 속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이집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으며, 전문가들의 예상도 뛰어넘는 것이다. 이집트 민중 봉기가 마치 단지 사회적인 이유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자유와 정의, 존엄성이라는 플라톤적인 '이데아'를 실현하기 위한 정체불명의 기관이 개입한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이 봉기는 보편적 속성을 가진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이집트 사회의 문화적 특성에 대한 분석 없이도 이 봉기의 의미를 알 수 있으며 자신의 문제와 동일시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는 호메이니가 주도한 이란의 이슬람 혁명과는 대조적이다. 당시 이란에서 좌파들은 이슬람주의가 지배적인 구도 하에서 자신들의 메시지를 '밀수'해야(몰래 녹여 담아내야) 했다. 그러나 이집트의 상황은 보편적이고 세속적인 자유와 정의에 대한 요구가 지배적이다. 무슬림형제단도 이런 '세속적'인 언어를 차용해야만 할 정도다.
이집트 시위에서 가장 숭고한 순간은 무슬림과 콥트 기독교인들이 타흐리르 광장에서 "우리는 하나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동등한 위치에서 시위에 참여했던 장면이다. 이 장면은 분파적인 종교 갈등에 모범적인 답안을 제시했다. 보편적인 자유와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다문화주의를 비판했던 네오콘들은 이제 '진실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그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원한다고 말한다. 이집트 민중들이 요구하는 것도 바로 자유와 민주주의다. 그런데 왜 그들은 불편해 하는가? 이집트 민중들이 자유와 존엄과 함께 경제적·사회적 정의를 같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인가?
▲ 지난 6일 이집트 수도 카이로의 타흐리르('해방'을 뜻하는 아랍어) 광장에서 코란을 든 무슬림과 십자가를 든 콥트 기독교인이 어깨를 맞대고 함께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슬라보예 지젝은 이를 '숭고한 순간'으로 꼽았다. ⓒ로이터=뉴시스 |
처음부터 시위대의 '폭력'은 순수하게 상징적인 것이었다. 즉 급진적이고 집합적인 시민 불복종의 행동이었다. 그들은 국가의 권위를 부정했다. 이것은 단지 내적인 해방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의 쇠사슬을 끊어내는 사회적인 행동이었다. 물리적인 폭력은 오히려 무바라크 일당이 고용한 정치깡패들이 타흐리르 광장에 말과 낙타를 타고 쳐들어와 사람들을 때리면서 저질러졌다. 시위대의 '폭력'은 대부분의 스스로를 지키려는 차원이었다.
시위대의 메시지가 아무리 전투적이고 격렬할지라도 이 때문에 죽은 사람은 없다. 이들의 요구는 무바라크가 물러나라는 것이었고, 이로 인해 이집트에 아무도 제외되지 않는 자유의 공간을 열자는 것이었다. 시위대가 군대나, 심지어 이들이 증오하는 경찰에 대해 외친 것도 "죽어라!"가 아니라 "우리는 형제다! 우리와 함께하자!"는 것이었다.
이 특징은 해방적인 시위와 우익 포퓰리스트 시위를 명백히 구분하는 것이다. 우파들은 국민의 유기체적인 단결을 강조하지만, 그 단결이란 적으로 지정된 상대방의 절멸에 의해서만 성립 가능한 것이다. 유대인들이나 반역자들의 경우처럼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독재정권이 최종적인 위기에 다가설 때 보통 그 붕괴는 두 단계를 거치는 경향을 보인다. 즉 실제로 붕괴하기 이전에 이미 (사실상의, 상징적인) '파열'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갑자기 승부는 결판났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때부터 더 이상 두려움은 없다. 정권은 단지 정당성만을 잃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의 힘을 행사하는 것도 무력하고 공포에 사로잡힌 반응으로 인식된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고전적인 만화의 한 장면을 보면, 고양이가 절벽에 다다라서도 발 밑에 땅이 없다는 사실을 모른 채 계속 걸어가다가 발 밑을 보는 순간 비로소 추락하기 시작한다. (미국 워너브러더스 사의 만화 <루니툰>의 주인공 실버스타와 트위티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 옮긴이) 권위를 잃은 정권은 절벽 위의 고양이와 같이 발 밑을 보는 순간 추락할 것이다.
이란 혁명에 대한 고전적인 분석서 <왕 중의 왕>(Shah of Shahs)의 저자 리샤르드 카푸스친스키는 이 책에서 '파열'의 정확한 순간을 짚어냈다. (이란 혁명 중) 테헤란의 한 교차로에서 경찰관이 시위대 중 한 사람에게 비키라고 소리쳤지만 그는 꼼짝도 않고 버텼고 오히려 당황한 경찰이 도망쳤다. 몇 시간 후 모든 테헤란 시민이 이 사건을 알게 됐고, 비록 그 후로도 몇 주간 거리에서의 싸움이 계속됐지만 모든 사람들은 이미 그 때 승패는 결정지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집트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인가? 시위가 시작된 처음 며칠 만에 무바라크는 이미 만화 속 고양이의 처지에 놓인 것으로 보였다. 그때 우리는 혁명의 과실을 가로채려는 잘 짜여진 계획을 목격했다. 수많은 고문 사건을 저지른 비밀경찰의 수장 출신인 술레이만 신임 부통령이 스스로 정권의 "인간적인 얼굴"을 자처하며 자신이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책임질 인물이라고 떠벌린 것이다. 그 역겨움에는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이집트에서 투쟁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관점의 차이로 인한 충돌이 아니다. 이 투쟁은 자유를 바라는 사람들과, 테러나 음식 부족, 시위대의 피로, 월급을 올려 준다는 유혹 등 가용한 모든 수단을 이용해 자유에 대한 의지를 꺾음으로써 권력을 유지하려는 눈먼 기도 사이의 충돌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시위가 이집트 국민들의 정당한 의사 표현이며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총체적인 착각이다.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의 시위대는 그들의 요구가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지기'를 원한 것이 아니며 정부의 정통성을 부인한 것이다. 그들은 무바라크 정권이 대화의 상대방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물러나기를 바란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의견을 들어 줄 새로운 정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전체를 재조형하기를 원한다.
무바라크는 오바마보다 이것을 더 잘 알고 있다. 여기에 타협의 여지는 없다. 1980넌대에 공산주의 정권들이 무너질 때 그랬듯이 말이다. 무바라크 정권 전체가 물러나지 않으면 민중 봉기는 의미를 잃고 배반당한 것이다.
그리고 무바라크 정권이 몰락하면 새로운 정권이 이스라엘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만약 새로운 정부가 자랑스럽게 자유를 누리는 민중들의 순수한 의사가 반영된 것이라면 이를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반유대주의는 오직 절망과 억압이라는 조건 하에서만 발현되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한 지방에서 전해온 미국 <CNN> 방송의 보도에 따르면, 정부는 시위 조직자들과 외신 기자들은 이집트를 약화시키기 위해 이스라엘이 보낸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고 한다. 유대인의 친구라고 불리는 무바라크가 이렇다.
현재 상황에서 가장 잔인한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는 서방 국가들이 (민주주의로의) 전환이 "합법적"인 방법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우려한다는 것이다. 마치 이집트가 지금까지는 법치 국가였기라도 한 양 말이다. 설마 이집트가 오랜 기간 동안 '영구적 비상 상태'였다는 점을 잊은 것인가? 무바라크는 법치주의를 무시하고 정치활동을 억압해 나라 전체를 정치적 정지상태로 만들었다. 카이로의 거리에 쏟아져 나온 많은 사람들이 생애 처음으로 '살아 있다'고 느낀다고 말하는 것도 당연하다.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중요한 것은 이 '살아 있다'는 느낌이 냉엄한 정치적 현실주의에 의해 매장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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