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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혁명'의 지정학적 의미를 묻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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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혁명'의 지정학적 의미를 묻지 마라!"

[전문가 현지 르포] 자발적인 시민운동의 본질 직시해야

이집트 민주화 시위의 기세가 좀처럼 꺾이지 않고 있다. 8일(현지시간) 이집트에서는 지난달 25일 이래 최대 규모의 시위가 벌어졌다. 정확한 숫자는 집계되지 않았지만 전국에서 최소 수십만이 거리로 나왔다. 이는 25만 명이 모였던 지난 1일보다 많은 숫자다.

아랍권 위성방송 <알자지라>에 따르면 이날 카이로 타흐리르(해방) 광장에 모인 시위대의 일부는 최초로 의회 의사당 건물 앞으로 진출했다. 특히 이날에는 시위에 처음 참가하는 시민들이 많았다. 그간 침묵하고 있던 시민들은 정부에 구금됐던 구글 임원 와엘 그호님의 석방에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호님은 구글의 중동·북아프리카 담당 임원으로, 이번 시위에 불을 댕긴 페이스북 페이지를 운영했다는 이유로 지난 2주간 보안 당국에 의해 구금됐다. 그는 이날 타흐리르 광장에 나타나 대중 연설을 했으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시위대는 무바라크 정권 퇴진이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시위를 계속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영국 <BBC> 방송은 이날 시위는 최근 민주화 운동의 동력이 수그러들었다는 일부의 관측이 있는데 대해 이집트 시민들은 민주화 시위에 큰 지지를 보내고 있으며 정부의 양보안은 충분치 않다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카이로와 항구도시 수에즈 등에서는 노동자들의 파업도 이어졌다. 수에즈 운하를 운영하는 기업 소속의 노동자 3000여 명은 수에즈와 이스마일리야 등에서 급여 인상과 근무여건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이들의 파업은 새로운 동력이 되고 있다. 수에즈 운하의 지중해 쪽 항구인 사이드 항의 노동자들도 9일부터 파업에 동참할 예정이다. 카이로 등에서도 통신·철강 노동자들이 수천 명 규모의 시위를 벌였다.

무바라크 정부의 유화책이 나오고, 야권이 미묘한 입장차를 보이며 분열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지만, 정작 현장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동 전문가로 이 지역의 시민사회를 연구해 온 모하메드 A. 밤예 미 피츠버그대 교수는 시위 현장을 둘러본 결과 다섯 가지 특징이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밤예 교수가 꼽은 특징은 첫째, 시위의 동력이 비주류·주변부로부터 나왔다는 점이고, 둘째는 시민들이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세 번째 특징은 시민들이 종교적 구호를 외치지 않고 시민적 요구 사항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고, 네 번째는 경제 등 다른 분야의 요구보다 정치 개혁을 우선적으로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끝으로 무바라크 독재 정권이 시민들의 의지를 얕보고 귀를 닫은 게 시위가 더 커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라고 말했다.

밤예 교수는 특히 이슬람 세력으로 최대 야권 조직을 가지고 있는 무슬림형제단조차 시민들의 자발적인 행동에 뒤늦게 결합했기 때문에 이번 시위를 틈타 이슬람주의자들이 집권할 수 있다는 미국의 우려는 과도한 것이라는 인식을 보였다. 또한 그는 시위 현장에서 반미 구호가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은 서구의 영향력을 전면 배격하자는 게 아니라 부패하고 타락한 무바라크 정권을 지원하는 미국에 대한 비난의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밤예 교수의 현장 르포는 지난 6일 <재팬포커스>에 게재됐고, 7일 발행된 <아시아 퍼시픽 저널>에도 실렸다. 다음은 이 글의 주요 내용이다. (☞
원문 보기) <편집자>

▲ 지난 4일 이집트 수도 카이로의 타흐리르(자유) 광장에서 시위를 벌이는 이집트 시민들의 모습 ⓒ뉴시스
이집트 혁명의 현장에서 느낀 첫인상
승리의 도시 카이로(Al-Qahira, The City Victorious)

이집트 혁명처럼 예상 외로 빠르게 동력을 얻어 진행된 혁명은 없었다. 1월 25일 시작된 이집트 혁명은 리더십도 부족하고 조직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같은달 28일 정부가 인터넷과 휴대전화 등 통신 수단을 전면 차단한 가운데서도 흐름을 결정짓는 중요한 전기는 마련됐다.

이날, 정치적으로 무관심하고 오랜 독재정권의 유산을 가졌으며 무려 200만 명 이상의 권위주의 통치 기구가 있는 이 나라에서, 지난 30년 간 정권을 유지해 왔고 영원할 것처럼 보였던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은 하루 만에 증발하듯 영향력을 잃었다.

무바라크 체제는 저항을 계속하고 있지만 사실 정권(의 영향력)은 거의 사라졌다. 28일 내각의 모든 부처와 공공기관은 문을 닫았고, 거의 모든 경찰서는 불태워졌다. 군대를 제외한 모든 보안 당국자들이 자취를 감췄고, 시위가 일주일째 계속된 이후에는 소수의 경찰 병력만이 거리에 얼굴을 비쳤다. 대신 시민들의 자치위원회가 이웃의 치안을 책임졌다.

서로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 같은 뜻과 목적을 가지고 함께 행동하는 어디에서나 애국심이 느껴졌다. 시위가 계속된 지난 열흘 간 이집트 전역에서 수백만 명이 거리로 나섰고 정부가 사라진 바로 그 자리에 공동체와 연대, 배려, 모두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 인간적인 책임감 등 고귀한 윤리가 나타났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이 혁명은 앞장서서 이를 이끈 수백만의 이집트 젊은이들의 삶에 의심의 여지 없이 중요한 의미가 됐고, 아마도 이를 지켜본 아랍 세계의 젊은이 수백만 명에게도 그럴 것으로 보인다. 이 혁명을 통해 젊은 세대는 아랍 세계의 그들 이전 세대들에게 정치 의식을 형성할 수 있도록 했으며, 이로 인한 지난 세대들의 경험 또한 국가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 결과가 식민지 권력과 그 동맹들에 대한 승리든 또는 재앙에 가까운 대패배든 말이다.

이 혁명은 또한 사회 조직과 사람들의 심리적인 면에도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발자국을 남겼다. 앞장서 혁명을 시작한 것은 젊은 세대지만 곧 이 혁명은 전국적인 현상으로 번졌다.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매우 다양했다. 남녀노소와 사회적 계층을 불문했고 이슬람 교도와 기독교도, 도시인들과 농민 등 실질적으로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함께 단호한 의지로 행동했다. 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필자가 이야기를 나누어 본 모든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들은 어떻게 자신들의 이웃의 다른 모습을 발견했는지, 이 시위 이전까지 자신들은 '사회'의 일부였다는 것과 심지어 '사회'라는 단어의 뜻도 몰랐다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했다.

한 여성 농민은 최루 가스로부터 몸을 보호하라고 시위대에 양파를 나눠줬고 한 젊은이는 파괴 행위에 가담하지 말라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했다. 국립박물관은 시위대가 만든 '인간 방패'에 의해 약탈과 방화로부터 보호됐고 심지어 시위대들은 돈을 받고 자신들을 공격하다가 사로잡힌 정치깡패(baltagiyya)들을 다른 시위대들이 해코지하지 못하도록 지켜주기도 했다. 파괴 행위와 혼란 속에서도 이처럼 시민의식이 발휘된 사례는 셀 수 없이 많이 발견됐다.

또한 시위대는 물리적 충돌이 벌어지는 틈틈이 둥글게 모여 토론을 벌이기도 했고, 사회 각계각층이 모두 현 정권 퇴진이라는 공통의 생각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세계 언론들은 통제불능의 혼란과 (이집트 시위가)지역 전체에 미칠 영향, 이슬람주의의 집권이라는 '유령'에만 초점을 맞췄지만, 현장에서의 시각은 이런 우려들이 실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임을 보여줬다.

정권을 퇴진시키기 위한 혁명이 점차 길어지면서 시위대들은 혼란 중에서 새로운 윤리와 질서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그들 스스로의 사회적 책임감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거리를 청소했고, 줄을 맞춰 섰으며, 여성에 대한 괴롭힘은 자취를 감췄고, 분실 또는 도난당한 물건들을 찾아 주인에게 돌려줬다.

이 장엄한 광경과 관련해 이집트 혁명 뿐 아니라 2011년 아랍 세계의 봉기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적인 기본 요소들이 존재한다. 이런 요소들이란 △비주류·주변부로부터 힘이 발휘된 점, △행동의 자발성, △국가의 야만성과 대조되는 시민들의 윤리적 양심, △경제 등 다른 분야의 요구들보다 정치적 개혁 요구가 우선된 점, △독재 정권들은 끝까지 귀를 닫고 이번 사태도 쉽게 진압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는 점 등이다.

▲ 타흐리르 광장에서 시위를 하던 시민 한 사람이 군부대의 탱크에서 쪽잠을 자고 있다. ⓒ뉴시스

첫째, '주변성'이란 혁명이 주변부에서부터 시작됐다는 의미다. 튀니지 혁명이 바로 이런 식으로 주변부에서 시작돼 수도로 이동했다. 또 튀니지라는 나라 자체가 아랍 세계의 주변부에 해당하는데, 튀니지 혁명의 불길은 이집트로 옮겨 붙었다. 아랍 각 국가들의 상황은 경제적 상태와 민주화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겨우 2주 만에 튀니지의 전례를 보고 시위를 일으킨 이집트 젊은이들의 의식에 매우 놀랐다. 몇 명의 이집트인들은 튀니지에서 한 달이 걸려 성취한 것을 겨우 며칠만에 이루려고 하고 있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주변성'은 이집트에서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많은 언론은 수도 카이로의 한복판에 있는 타흐리르(자유, 해방) 광장에만 관심을 쏟았고, 광장에 모인 많은 사람들은 그 자체로 가능성을 선포하는 의미가 있었지만, 1월 25일에는 이집트의 지방 12개 주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 만약 카이로에만 한정됐다면 이를 혁명으로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혁명이 난 것처럼 보였던 격렬한 모습은 수에즈와 같은 상대적으로 주변적인 지역에서 나타났다. 거의 기대도 하지 않았던 주변부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모든 사람들은 이같은 일이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두 번째로, 혁명은 자발성이라는 덕목으로 유지된다는 점이다. 자발성이란 견고한 조직체가 없었다는 의미다. 시위대 안에서 어떻게 의사소통을 하고, 내일은 뭘 하고 오늘은 뭘 요구할 것인지, 부상자들을 어떻게 대피시킬 것이고 정치깡패들의 공격을 어떻게 차단할 것인지, 시위대의 요구를 어떻게 수렴할 것인지 등의 조직적 필요는 새로운 상황 변화에 맞게 현장에서 바로 제기되고 발전됐다. 게다가 시작에서 끝까지 혁명에 조직된 지도부가 없었다는 사실은 관찰자들에게는 매우 큰 일처럼 보였지만 참여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필자는 시위 참여자들의 토론에서 그들이 현존하는 어떤 조직이나 인물에 의해 대표되기를 강력하게 거부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들은 어떤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인 '대표자'를 구성해 (정부와)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부가 시위대를 대변할 수 있는 대표자가 누구냐고 묻자 그들은 대담하게도 실종자 중 한 사람을 대표자라고 말했다. 그로써 실종자를 빨리 찾게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시위대가 발표한 성명에 따르면, 결정을 내리는 것은 바로 '민중들'이다. 이들의 민중의식(peoplehood)은 현재 시위대가 어떤 특정한 권위자나 지도자에 의해 대표되기에는 너무 광대하다거나, 또는 대표되는 과정을 통해 운동에 참여한 전체로서의 '민중'이라는 뜻깊고 신성한 의미가 희석될 수 있다는 생각처럼 보인다.

자발성은 핵심적인 요소다. 왜냐하면 이로 인해 혁명을 예측하거나 통제하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자발성은 혁명에 엄청난 역동성과 민첩성을 부여했다. 아직도 수백만 시민들은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이 정권의 퇴진이 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자발성은 또한 조직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인 역할을 넘어 치유의 역할을 수행한다. 여러 명의 시위 참여자는 혁명에서 심리적인 해방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이는 이집트 국민들의 자기검열이나 나약한 생각 등 내면화된 억압이 혁명적 분위기 속에서 긍정적인 에너지로 전화되면서 스스로의 가치, 다른 사람들과의 피상적이지 않은 진실한 관계, 얼어붙은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끝없는 힘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번 운동을 묘사하는 말로 '각성'(awakening)이라는 용어가 자주 사용되는 것은 운동이 자발적으로 발생하면서 어떤 정당 운동도 깨우지 못한 무기력 싱태에서 민중들이 깨어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발성에는 책임도 따랐다. 시위대의 요구는 점차 커졌는데, 1월 25일에는 기본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정도였지만 사흘 후에는 정권 전체를 바꾸는 것으로 발전했다. 이어 이들은 무바라크 대통령이 물러나지 않는 한 정부의 어떤 양보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했으며 무바라크를 법정에 세우라고 요구했다.

무바라크의 퇴진은 25일까지만 해도 아무도 진지하게 요구하는 사항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무바라크의 아들 가말의 대선 출마 가능성을 비난하고 무바라크 본인이 대선에 다시 출마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28일 밤이 되자 무바라크의 즉각적인 사임은 이미 확고한 원칙이 됐고, 가능성도 높아 보였다. 여기서 우리는 고정된 프로그램이나 조직, 지도자보다 자발적인 운동에 더 많은 가능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자발성은 혁명의 나침반이 됐고 가장 급진적인 방향으로 운동을 이끄는 방법으로 판명됐다.

그러므로 시위대에게 자발성을 포기하고 기존 정치세력 중에서 대표자를 고르라고 설득하기는 어렵다. 이미 자발성이 그 힘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자발성은 다른 어떤 운동의 방식보다 더 확고한 자신감을 불러일으켰다. 자신감으로 가득찬 시위대는 희생과 순교를 각오하고 있다.

또한 자발성으로 인해 혁명에서는 자유로움과 진취적 기상이 표현됐다. 수천 개가 넘는 시위 플래카드 중에서, 관제 시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동일한 모양으로 제작된 것은 거의 없었다. 플래카드는 대부분 개인들에 의해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으며 온갖 종류의 재료를 사용해서 만들어졌고, 자신의 제작물이 사진에 찍히기를 바라는 제작자들에 의해 자랑스럽게 들려졌다.

자발성은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데에도 유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혁명은 일상생활에서의 자발성이 확장된 결과가 됐다. 일상에서 보통 세부적인 계획이 필요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은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이미 예측할 수 없는 일상을 보내듯 이런 자발적인 네트워크를 사용하고 있다.

자발성이 혁명에 많은 성공적인 요소를 제공하긴 했지만, 이는 새로운 질서로의 전환이 현 정권 인사들과 조직된 야당 세력들에 의해 이뤄진다면 거리의 수백만 명은 그들을 대변해줄 사람이 없는 상황을 맞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많은 시위대들은 그러나 그런 세세한 것보다는 그들의 기본적인 요구가 이행되는 것에 더 신경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혁명이 시작된지 일주일 후인 현재 이들의 요구는 △독재자를 제거하고, △의회를 해산하고 재선거를 실시하며,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국민의 자유를 확장하는 개헌을 단행하고, △계엄령을 철폐하고, △시위대에 발포를 명령한 정부 당국자와 부패한 관리를 처벌할 것 등이다.

▲ 타흐리르 광장 전경 ⓒ로이터=뉴시스

셋째, 종교적인 발언 대신 보편적이라고 여겨지는 시민적 윤리가 중시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는 튀니지의 경우보다 더 놀라운 측면이다. 이집트에서는 종교적인 성향을 가진 야권 세력이 강력했고 생활의 많은 부분에까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무슬림형제단은 시위가 시작된 후에야 거기에 결합했다. 시위 전개 양상에 크게 놀라며 시위대를 지도할 능력이 없어 보이는 다른 모든 정치 조직들과 마찬가지로 무슬림형제단도 그러했다.

이는 앞서 설명한 주변성과 자발성이라는 두 가지 요소와 큰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주변성과 자발성은 사회 각 부분의 정치화를 가져왔고, 종교적 언어를 쓸 필요가 없는 광범위한 요구 사항들과 매치가 됐다. 사실 최근 이집트에서 나타났던 분파별 갈등 상황에서 종교는 오히려 장애물이었다. 또한 종교라는 것은 사회를 구분하는 모든 것들을 뛰어 넘어 솟아난 이번 혁명의 성격과 맞지 않는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시위 도중) 공개된 장소에서 이슬람 예배를 드린다. 그러나 그 예배에 참석하라고 강요하거나 요청하는 장면을 본 적은 없다.

튀니지 혁명과 마찬가지로 이집트에서도 저항은 집단적인 도덕적 대변동(earthquake)의 모습으로 터져 나왔다. 핵심적인 요구 사항은 매우 기본적인 것이었고,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시스템을 만드는데 참여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와 존엄성이 집약된 것이었다. 그러한 원칙들이 과거에는 종교적인 언어로 표현됐다면, 이번에는 어떤 종교적 권위에 기대지 않고 그 원칙 자체로 표현됐다. 무슬림형제단의 시위 참석자들조차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시민' 국가를 외치는 걸 보고 필자는 이러한 변화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시민 국가는 종교 국가나 군대가 지배하는 국가와는 명백히 다르다.

넷째, 1월 28일 이후 정치적 요구가 경제 문제 등 다른 모든 불만 사항들 보다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게 됐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정치적 요구 사항들은 다른 분야의 요구 사항보다 더 분명했고, 모든 사람들이 동의했다. 다른 문제들은 책임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정치 체제가 들어서면 더 잘 풀릴 것이라는 생각을 모든 이들이 공유했다. 예를 들어 경제적 불만은 부패 척결이라는 쉬운 정치적 용어로 바뀌었다. 그것은 현실과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왜냐면 이집트의 정치 체제는 백주대낮에도 도둑질을 해가는 그런 체제가 됐기 때문이다. 정상배(政商輩)들의 부패상이 얼마나 노골적이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들었다. 정상배들은 무바라크의 아들 가말 주위에 떼거지로 몰려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2월 2~3일 시위대를 공포에 떨게 했던 정치깡패들을 모집하기도 했다.

다섯째, 아랍권의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독재 권력이 시민들의 요구에 귀를 닫은 것도 이번 시위를 키운 핵심 요인이었다. 시민들의 마음속에 깔려 있는 거대한 불만은 의미 있는 야권 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오랫동안 권좌를 지켜온 지배 엘리트들에 의해 타올랐다. 지배 엘리트들은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부글부글 끓는 민심을 듣지 못했고, 혁명이 일어났을 때도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데 굼떴다. 독재 권력의 의사소통은 한 방향으로만 가기 때문에 국민들의 반응을 들을 수가 없었다. 지배 집단의 귀가 막혀 있다는 사실은 혁명 기간 내내 정부의 반응이 느리고 모호했다는 사실을 봐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시위가 발생한 다음 날 국영 언론은 시위대의 위세를 깔봤고, 이집트 전역이 불타오르고 수많은 해외 정치지도자들이 우려를 표하던 28일에도 이집트 정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무바라크가 입을 열었지만 모든 사람들이 듣고 싶어 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말만 했다. 무바라크는 자기가 엄청난 양보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시위대가 보기에 그것은 도발이었고, 결국 더 큰 저항을 일으켰다. 결국 무바라크는 2월 1일 또 다시 연설을 했는데, 그때 역시 엄청난 양보를 하는 것처럼 말했으나 시위대들은 그의 오만이 극에 달했다고 여겼다.

오랜 세월 아랍의 독재자들은 모욕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생색을 내는 듯한 태도로 자기 국민들을 대해왔다. 그들에게는 의사소통 능력이 없었다. 소통 능력의 부재는 혁명을 고조시킨 주된 원인이었다. 많은 시위대들은 무바라크가 28일 했던 말을 25일에 했더라면, 2월 1일에 했던 말을 1월 28일에 했더라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바라크는 자신의 양보가 위기를 해결하는데 실패하자 새 부통령과 총리 등을 지명했는데, 왜 자신이 앞으로 겨우 몇 달을 더 권좌에 있어야 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2월 3일 새 총리는 '지도자가 불명예스럽게 떠나는 것은 이집트의 정치문화에서 일반적인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1952년 자유장교단의 쿠데타로 권좌에서 쫓겨난 파루크 왕에게도 경례를 했다는 사실을 증거로 들었다. 같은 날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도 이집트인들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였던 무바라크를 모욕하는 것은 이집트의 문화에 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무바라크는 자신이 사임하면 나라가 혼란에 빠질 것이라며 물러나지 않겠다고 말하며 현실을 깨닫고 있지 않음을 드러냈다.

독재자가 아닌 성공적인 정치인들은 대중 혹은 정적들이 어떻게 움직일지를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그 예측에 따라 늦지 않게 움직인다. 그러나 독재자들은 완전 반대로 행동한다. 그들은 누가 적이 될지도 모르고 있다. 국민 대부분이 적이 되어도 모른다. 2월 2일 무바라크의 일부 지지자들은 폭력배들을 낙타와 말에 태워 타흐리르 광장에 보내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했는데, 그건 그들이 더 나은 방법을 알지 못해서였다. 무바라크 체제가 얼마나 시대착오적인지를 보여줬다. 그러나 시민 자치위원회는 이번 혁명으로 이집트 사회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여줬다. 그들은 자체적인 힘으로 상황을 통제했고 지금 현재, 아래로부터의 힘으로 스스로의 미래를 만들 수 있음을 배웠다. 분노를 내면화하고 자기 비하로 시간을 보냈던 수십년간의 잃어버린 세월에서 뛰쳐나와 혼돈 속에서 자발적인 질서가 피어오르고 있다. 새로운 시민적 질서의 여명이 밝아오는 희망이 나타나고 있다.

끝으로, 혁명의 향후 전개 과정과 상관없이 이번 일은 지정학적으로 심대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연달아 혁명이 일어난 후 알제리·요르단·예멘에서 대중들의 분노가 표출되고 있다. 시리아에서는 정치 개혁을 하겠다고 발표됐다. 우리는 아랍 세계의 새로운 탄생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사람들의 자신감, 지배 엘리트들에 대한 집단적인 분노가 아랍 전역에서 나타나고 있다. 아랍권 정부들은 최근 몇 십 년 동안 독재 체제의 공고화를 추구해왔다. 정·재계 엘리트들은 공개적으로 서로의 편의를 봐줬고, 국민들에 대한 책임성은 조금도 없었다. 국민들은 경제적으로 점점 더 취약해졌고, 정치적으로는 배재됐다. 그러나 국민들은 과거에 비해 더 많은 교육을 받았고 새로운 매체에 대한 접근도가 높아졌다.

아랍권은 더 많은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다. 그에 따라 미국과 이스라엘 정책결정자들의 근심은 커져왔다. 그들은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 독재자들을 선호해 왔다. 외세에 의해 통제될 수 없고 예측하기 힘든 민주적 절차에 따라 등장한 정부를 원치 않았다. 민주주의의 물결이 일어나자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누구보다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이 지역에 대한 서방의 영향력이 몰락하는 것을 경고했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바라크를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집트의 민주주의는 또 하나의 이란을 탄생시킬 것이라는 게 네타냐후의 생각이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다루기 힘들고 위험천만한 아랍인들을 통치하는 유일한 길은 독재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런 퇴행적인 입장을 취하는 세계의 지도자는 네타냐후 한 사람 뿐이다.

미국은 예상치 못했고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전개의 와중에서 복잡한 게임을 하고 있다. 오바마 정부는 민주화의 물결은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이 지역 전체의 '안정'을 위협하지 않으면서 이행 과정을 조정할 방법을 찾겠다는 현실적인 판단을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이 말하는 '불안정'이란 것은 매우 특수한 어떤 상태를 말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들이 말하는 불안정이란, 아랍권의 민주화로 인해 미국의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이 권력을 잡을 기회를 가질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미국과 동맹을 맺은 비민주적 정권이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의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을 권력에서 배제하는 한, 반대자들은 엄청나게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를 가진 '안정'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그 지정학적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매우 잘못된 접근 방식이라는 것을 가장 중요한 교훈으로 새겨야 한다. 지금 거리로 뛰쳐나온 이집트의 대중들은 서방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나온 '군중'들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스스로의 시스템을 만들 권리를 요구하는 것뿐이다. 반미 구호가 등장했다 하더라고, 그것은 미국의 이익에 복무하는 대가로 국민들을 억압할 수 있었던 체제를 미국이 수십년간 지지했다는 점을 비난한다는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지역 안정이라는 미국의 이익을 옹호하는 대신 국민들을 억압하는 방식(pattern)은 억압과 배제를 속성으로 하는 엄청난 불안정 구조를 만들어 낼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집트에서 명확히 보고 있다. 안정이란 것은 억압받고 배제된 이들이 일으키고 있는 이번 혁명의 시민적 열망(civic character)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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