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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새로워진 북중관계, 중국의 자신감과 전략을 읽자"

[특강]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이 말하는 북중관계 65년史와 한반도

미중 정상회담을 전후로 북한의 '대화 공세'가 이어지고 있다. 북한은 새해 첫날 '신년공동사설'을 통해 대화와 협력을 강조하더니 1월 5일 '정부‧정당‧단체 연합 성명', 10일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 명의의 통지문 등을 통해 연이어 남북대화를 제의했다. 남북은 결국 오는 8일 고위급 군사회담을 위한 예비회담을 열기로 했다.

북한 대화 공세의 배경으로 중국의 영향력을 꼽는 시각이 있다. 중국은 작년 연평도 사태 직후부터 6자회담 수석대표 긴급회담을 제의했고 지난달 19일 미중 정상회담에서도 미국과 한반도 문제를 중요하게 논의했다.

그러나 중국의 대북 영향력에 대해서는 엇갈린 평가가 나온다. 한국과 미국의 당국자들은 중국이 북한에 '유일무이한 영향력'을 가졌다며 중국이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중국은 자신들의 대북 영향력은 '제한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대북 영향력 뿐 아니라 미국과 함께 'G2'로 평가받는 중국의 국력 성장 또한 동아시아 역내 국가들의 최대 관심사다. 21세기는 중국의 세기가 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 지도 오래다. 물론 그와 다른 시각도 존재하고 있어 당분간 논쟁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확실한 것은 '중국'은 이미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정치‧경제‧외교‧안보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변수가 됐다는 점이다. 중국의 부상이 뚜렷해진 지금 우리는 중국을 어떻게 보아야 하며, 중국과는 어떤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 2011년 새해를 맞아 <프레시안>은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을 초청해 북중관계와 동아시아 국제관계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북한학 연구의 대가인 이 전 장관은 노무현 정부 전반기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으로 있으면서 '동북아균형자론'을 주창했고, 2005년 9.19 공동성명 탄생 과정을 진두지휘했다. 이후 통일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겨 대북정책을 직접 실행하기도 했다. 이종석 전 장관의 특강을 지상중계한다. <편집자>

▲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현 한반도평화포럼 상임이사) ⓒ프레시안 자료사진

북중관계의 역사-냉전 시기

북중관계의 미래를 얘기하기에 앞서 양국 관계의 특징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북중관계는 크게 두 단계가 있다고 봅니다, 냉전시기와 그 이후. 이 구분이 되는 1990년대 전후 상황에서 중국은 개혁개방에 박차를 가했고, 같은 시기 북한 외교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때 한중수교가 맺어진 것이 큰 분기점이 됐고 북한도 이에 일정하게 대응해야 했습니다.

냉전 시기 북한과 중국은 전통적인 혈맹관계였습니다. 이는 중국-소련 간 관계와도 연관된 문제인데, 소련은 1945년 8.15 해방 하루 전에 중국 국민당과 '중소우호동맹조약'을 맺습니다. 이 조약 체결의 배경과 관련해, 스탈린 입장에서 나치즘 패배 이후 세계질서에서 미국과 유럽으로 상징되는 자본주의 진영이 압박을 가하는 것을 막으려고 한 건지, 아니면 러시아의 만주 관동군에 대한 공격으로 8월 9일부터 시작된 대(對)일본전이 끝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즉 일본 항복으로 2차 대전이 끝나는 시기를 좀 더 늦은 시기로 전망했는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중소우호동맹조약의 내용은, 관동군을 물리치고 만주를 점령하게 되면 이 지방을 중국 국민당에 넘긴다는 것이었습니다. 소련이 만주를 국민당에 넘기는 걸로 결정하니 중국공산당(중공)은 초기에 선양(瀋陽), 창춘(長春) 등 주요 거점도시를 점령하고 있다가 철수하게 됩니다. 만주는 국공내전의 중요한 장이었는데 중공은 국민당에 의해 연변까지 밀렸습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역사지만, 이때 북한이 중공을 지원합니다.

김일성은 만주에서 항일 빨치산 활동을 하는데, 소련공산당 코민테른의 '1국 1당' 원칙에 의해 중공에 가입했었습니다. 만주의 항일투쟁을 중공이 지휘(또는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200만 명 내외의 조선족이 거주하던 만주에는 국공내전 당시 100만 명 정도가 남아 있었는데, 대부분이 국민당에 반대하고 중공을 지지했습니다.

만주에서 일제의 민족 차등정책의 영향으로 일제 때 만주에서는 조선족에 대한 한족의 감정이 좋지 않았고, 국민당은 해방 후 이 감정이 조선족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났을 때 이를 방임했어요. 국민당과 연계된 토비(마적)세력에 의해 해방 직후에 여러 조선족 마을이 몰살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반면 공산당은 조선인 공산당원들과 항일 빨치산 운동을 같이한 경험도 있고, 또 전략적 관점에서도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조선족을 보호하는 태도를 취했고, 결과적으로 재만(在滿) 조선인 중 99%가 공산당을 지지합니다. 민족주의 계열도 있었지만 그들은 대개 한반도로 넘어갔습니다.

6만에 가까운 조선족이 국공내전에서 중국인민해방군으로 참전했습니다. 이들의 지위가 중국 내의 소수민족인지 독립된 조선에 소속한 조선인인지가 애매할 때였는데, 아무튼 김일성은 이들에 대해 일종의 기득권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1949년 7월 북한에 들어온 조선족 출신 중국인민해방군 2개 사단 등 3개 사단 5만 명이 북한에 들어와 조선인민군이 되었고 한국전쟁에 참전하기도 했습니다.

김일성은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을 지지하는 격문을 만들어 뿌린 적도 있고, 퇴각하는 중공군을 위해 북한 북부 지방을 개방했으며 대부분, 대가가 있었지만 물질적인 지원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북한이 중공을 도와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뒤에도 한국전쟁에서 중공이 북한을 도와주고 하다 보니 초기 국가건설 과정에서 독특한 동맹관계가 형성된 겁니다.

최근 양국관계에서 중국이 북한에 압력을 가해야 할 것 아니냐는 얘기가 한국과 미국 등에서 나오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은 것이, 북한에 대한 중국의 내정 불간섭은 일종의 관성을 지닌 '전통'입니다. 예를 들어 1956년 8월 북한 내에서 김일성이 그에 대항해서 조직적으로 반대운동을 한 연안파와 소련파를 숙청했는데, 일부가 중국으로 망명해 중공에 자신들의 처지를 호소했고 결국 미코얀 소련 부총리와 펑더화이(彭德懷) 중국 국방부장이 북한에 들어와 9월 23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열어서 8월의 결정을 번복시킵니다.

북한은 이를 매우 치욕적으로 받아들였고 나중에 이들이 북한을 떠나자마자 김일성이 앞선 결정을 다시 뒤집습니다. 중국은 나중에 이에 대해 북한에 사과를 해야 했고, 이것이 양국 간에 앙금으로 남아 있습니다. 북한에서 나온 책을 보면 이 사건을 '쓰디쓴 경험'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또 1960년대 중국 문화대혁명 당시 중국은 북한을 강하게 압박하면서 마오쩌둥(毛澤東)식 교조주의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합니다. 이로 인해 당시 북중관계가 매우 안 좋아졌고 나중에 관계가 회복되는 과정에서 중국이 일정한 양보를 해야 했습니다. 이런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중국 지도부 내에서는 북한 내정에 간섭해서는 될 것도 안 된다는 생각이 관성처럼 굳어졌고, 지금 대북 영향력이 아무리 커도 개입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간 북한이 취해온 노선을 보면 끊임없이 중국을 따라가는 묘한 모습도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 1945년 김일성이 처음 한반도에 들어와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가진 대중연설에서 "돈 있는 자는 돈으로, 지식 있는 자는 지식으로, 노력을 가진 자는 노력으로…전민족이 대동단결하여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자"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일각에서는 소련이 이 연설문을 써줬다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1935년 중공이 '8.1 선언'에서 국민당에 제안한 내용입니다.

김일성이 중공에서 배웠던 것들을 그대로 활용하는 사례는 또 있었습니다. 1992년 4월 북한 헌법 개정에서 '인민민주주의독재'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역시 중공식 개념입니다. 북한은 문화대혁명 때 마오쩌둥을 절대화하는 것을 비판하더니 나중에는 김일성 사상을 절대화시켰습니다. 또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가 된 것도 중국이 1969년 당 장정에 린바오(林彪)를 후계자로 명시한데서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고, 나아가 마오 주석의 피붙이가 아닌 후계자 린바오가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실패하자 (북한에서) 당내 고위간부들이 그 불똥을 피하기 위해 오히려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을 후계자로 적극 옹립했다고 봅니다.

북한이 제한적으로나마 하고 있는 개혁‧개방적 정책들도 중국 노선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북중관계에서는 중국이 북한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전통'과 북한의 중국을 따라가는 관성, 그리고 일부는 공개됐지만 대개 비공개되어온 양국 관계사를 항상 염두에 둬야 합니다.

북중관계의 역사-탈냉전 이후

▲ 이종석 전 장관 ⓒ프레시안 자료사진
그런데 냉전이 해체되면서 북중 동맹관계는 이완되기 시작합니다. 중국의 개혁‧개방 당시 북한은 이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생산력 중심 경제발전을 이루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는 중국의 소위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에 대해 북한은 비판적이었고 오히려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사회주의가 승리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따라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좋아지는 듯 했던 북중관계가 발전 노선의 차이로 인해 80년대에 내적으로는 서로 약간씩 경원시하게 됩니다.

당시 소련에서 고르바초프의 등장을 계기로 중소분쟁이 끝나면서 중소 양국에서 보는 북한의 전략적 가치가 반감한 것도 이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한중수교가 이뤄지면서 90년대 중반쯤 되면서부터는 중국이 북한을 자꾸 다스리려 하는 게 보이는데, 대북 수출에 대해서도 이제 외상 안 준다, 현금 결제하라, 이런 식으로 나오게 된 겁니다.

이 때부터의 중국의 대북관계는 '전략적 협력관계'로 전환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북한의 사활이 걸린 부분에서는 북한을 지지하지만 나머지 부분에서는 보편적인 국제 관행을 따라가겠다는 논리입니다. 예컨대 당시 중국은 핵문제가 북한의 사활이 걸린 문제는 아니라고 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합리적인 보상을 해주는 대신 북한의 핵을 포기시킨다는 전략 기조를 가지고 서방과 같은 길을 걸었지요.

이런 경향에서 최근 다시 새로운 움직임이 보이는데, 전통적 우호관계가 일부 복원되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입니다. 북핵문제와 관련해서 중국은 대북 제재에 보다 엄격한 금을 긋고 있습니다. 도식적으로 말하면 북한의 붕괴를 불사한 대북 제재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엔의 대북제재 국면에서 북한과 경제를 포함해서 제반 협력을 맺습니다.

들리는 바로는 2009년 여름 중공 내에서 '외사영도소조회의'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이후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가 방북해 탈냉전 이후 북한과 최대 규모의 경협을 맺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중국의 '외사영도소조회의'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중국이 북한을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외사영도소조회의는 한국으로 보자면 대통령이 주재하는 안보관계장관회의 같은 것인데, 내용이 공식 발표된 것은 없습니다. 2009년 여름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1874호가 나온 직후인데, 확인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이때 최소한 중국의 대북정책과 관련 중요한 논의가 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그 전후로 변화한 것을 보면, 2009년 여름까지만 해도 북한 문제에 대해 중국 내에서 갖가지 의견이 '백가쟁명'하는 양상이었는데, 가을부터는 '우리가 60년대 핵개발을 할 때도, 미국이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지만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했다. 북한도 아마 포기하지 않을 거다' 이런 식의 통일된 입장으로 정리가 됐습니다.

중국은 물론 북한이 무너지면, 정세가 불안해지는 우려도 있지만 그보다 본질적으로 '북한 다음은 중국 아닌가'라는 국제사회의 시선을 걱정할 것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외부에서 북한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는 개입을 하도록 놔두지 않는다는 입장이고 이런 인식 하의 정책들이 실제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해 10월 원자바오 총리 방북이나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창지투(長吉圖, 창춘‧지린‧투먼) 개발 계획 같은 것이 이런 정책들입니다.

또 북한에 대해 서방이 기대하는 것과 중국이 바라는 것은 다르다는 것도 주목해야 합니다. 서방은 민주적인 정권으로의 교체를 포함한 보다 완전한 개혁을 바라지만, 중국은 북한이 공산당의 독재를 유지하면서 시장을 도입하는 중국식 개혁‧개방을 해야 한다고 보는 것 같아요. 핵에 대해서도 미국의 행동을 보았을 때 강력한 의지가 없다고 판단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북한 붕괴를 불사한 압박은 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한 정책으로 보여주려는 것 같습니디. 창지투 개발 계획에는 수백 조가 드는데, 북한 동해안 지역과 공동으로 개발되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하는 겁니다. 중국이 북한 붕괴를 예상한다면 창지투 계획 자체가 설명이 안 돼요.

중국은 북한을 지원할 만한 경제 성장을 이뤘다는 자신감도 있고, 북한에서 챙길 수 있는 경제적 이익도 생겼습니다. 중국의 임금이 상승하면서 북한과는 사실상 실질임금이 10배 정도 차이가 날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다 보니까 예전에 한국 기업이 중국에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들어갔듯이, 중국 기업이 북한 시장을 노동력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초기에는 실패도 하겠지만 시간이 가면서 점차 대기업들도 들어갈 것이고, 이런 측면도 양자관계의 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미중 정상회담과 한반도 문제

그러나 한편으로 북한은 대외관계가 중국 일변도로 갔을 때의 위험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기본적으로 북한은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지 못하면 경제가 죽는다는 것을 알고 중국뿐 아니라 한국, 미국 등에서 여러 군데에서 다 경제지원을 받고 싶어해요. 그게 자신이 독립국가로 생존해 가는데 유리하다고 판단하겠죠.

ⓒ프레시안 자료사진
그런데 이미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그같은 입장에서 대남, 대서방 정책을 몇 차례 시도했지만 실패하거나 심각한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 이젠 생각을 바꾸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남한이나 미국, 일본 등에 분산적으로 의존하려는 것이 난망한 상태에서 차라리 중국에 의존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보입니다.

이런 면에서 중국이나 북한 모두 북중 경제협력을 강화할 동력은 있는 셈이죠. 물론 중국도 북한에 일종의 '조건'이 없지는 않습니다. 중국은 북한이 대남 도발을 지속하고 장거리 미사일과 핵실험을 강행하게 되면 자신이 북한을 돕는 행위에 대해 국제사회가 강력하게 비난할 것이고, 이것이 중국의 국익에 심대한 위협이 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중국은 아마도 북한에 '좀 신사적으로 행동하라, 도와줄 테니 남북대화 하고 6자회담 열리면 참여하라'고 할 것입니다.

지금 북한 입장에서는 대화를 하자고 하는 것도 자기들한테 나쁠 것 없다고 판단할 겁니다. 북한 입장에서는 대화에 적극 나섬으로써 중국에 '보험'을 들어 놓고, 미국, 남한과 협상이 잘 돼서 경제지원을 받으면 좋고 잘 안 돼도 중국과 협의하면 되니까 아쉬울 게 없는 상황인 거죠.

또 북한이 도발적인 행동을 하더라도 중국을 끌어들일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해야 합니다. 2009년 4월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 실험 당시 중국이 안보리 규탄성명에 동의하자 북한은 '로켓 발사는 우주의 평화적 이용권리'라며 중국을 강력하게 비난했습니다. 연평도 사태를 봐도 북한은 이를 북방한계선(NLL) 문제로 끌고 갔는데 정전협정 당사국인 중국은 휴전협정 당시 서해 5도와 북한의 황해도 사이에 해상 군사분계선을 그은 적이 없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서 상황을 보는 것 같아요. NLL을 합의된 군사분계선으로 보지 않는 겁니다. 이렇게 볼 때 북한은 중국을 설득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행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이 미중 정상회담 이후 대화 의제를 다 선점해서 남한 정부는 말도 못 꺼내게 됐습니다. 연평도 사태 이후로 보면 북한이 거꾸로 상황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남북 고위급 군사회담 제의도 한국 입장에서는 안 받을 수 없게 됐고...주도권을 북한에 뺏겼어요. 결국 남북이 군사회담을 하겠다고 하자 로버트 기브스 미 백악관 대변인이 환영의 뜻을 밝히면서 '미중정상회담의 긍정적 영향'이라고 자화자찬했습니다.

이 얘기는 미국이 6자회담 재개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고, 그래서 한미가 그 전제로 내세운 남북대화가 어떻게든 이루어지기를 미국도 매우 바라고 있었다는 겁니다. 미국은 남북대화가 설사 건설적인 결과는 못 내더라도 6자회담으로 나가는 통로는 터 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정도의 느낌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미중 정상회담을 보면 한반도 관련 항목이 매우 재밌게 구성돼 있습니다. 진정성 있는 남북관계가 '필수적인 단계'라는 것에는 합의했지만 '무엇을 위해 필수적인지'는 빠져 있어요. 남북관계가 6자회담의 '전제조건'이라고 명시적으로 합의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 후에 한국과 미국의 당국자들이 6자회담과 남북대화를 분리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도 이런 점이 배경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대신에 들어간 것이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UEP) 관련 언급이지만 중국은 이 문제가 안보리에서 논의되는 것을 반대하기 때문에, '북한이 주장하는'이라는 표현을 넣자고 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UEP 자체가 북한의 주장일 뿐이라고 한정해서 이 문제는 6자회담에서 논의할 문제이지 안보리로 갈 사항은 아니라는 입장을 낸 것이죠.

전체적으로 보면 미중 정상회담 결과는 양자 간의 입장을 절충한 것이고, 합의된 것은 없습니다. 다만 명확한 것은 6자회담을 재개해야 한다는데 동의했다는 것이지만, 미국은 사실상 대북정책을 한국에 '아웃소싱'하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말할 수는 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 한편으로는 미국이 '한국 아웃소싱'에 약간씩 의문을 갖고 있는 모습도 보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지금 한국 정부에 질문을 던지고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12월 20일 우리 군이 연평도에서 사격훈련을 하기 직전에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 대사와 월터 샤프 주한미군사령관이 청와대에 가서 '정말 사격을 할 것이냐'고 물었다고 하는데, 그런 식으로 미국은 최근 한국에 질문을 던지고 있어요.

최근 남북대화 합의에 대한 백악관 대변인의 환영 성명하고 연결해서 보면, 미국이 대북정책에 대한 전폭적 아웃소싱에서 6자회담 재개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입장이 조금씩 달라질 가능성을 보여준 것으로 있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재등장'

냉전이 끝나면서 중국이 한국과 수교를 맺는 등 서구 중심이었던 세계 속에 다시 나타납니다. 이로 인해 냉전 50년 간 잃어버렸던 '동아시아'라는 개념이 재등장하게 됩니다. 북방 시장이 개척되고 한국이 이를 통해 생존책을 찾기 시작하는데, 이를 보면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라는 것이 단지 말뿐만아 아니라 실제 생존전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중 교역관계만 봐도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대중관계에서 제대로 대처를 못 하는 것을 보면 이 정부에 전략적 기준이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중국의 대한(對韓) 수출은 그들 전체 수출액의 4.5%밖에 안 되는데 한국은 수출의 25%를 중국에 하는 등, 중국에 대한 무역의존도가 엄청나고 그로 인해 우리는 중국의 변화에 예민하게 노출돼 있습니다. 이에 따른 전략을 세워야 합니다. 또 남북관계가 악화되면 북한의 중국 의존이 심화된다는 것도 주의해야 합니다.

이 동아시아 담론이 일종의 딜레마를 낳기도 했습니다. 한국 등 동아시아 역내 국가들에게 중국의 부상은 기회이자 도전입니다. 중국의 등장으로 동아시아 개념이 복원됐고 이로 인해 역내 국가들이 삶의 질을 높일 기회를 맞게 됐지만, 한편으로는 중국이 워낙 거대하다 보니까 국가 간 협력과 통합으로 나아가는 데는 국력·인구 등에서 비대칭성·불균등성으로 인한 문제도 발생하게 된 거죠.

향후 동북아에서는 평화‧안정과 번영, 국가 간 평등 등의 개념이 중요해질 텐데, 이와 관련해 과거의 '조공' 시스템을 모델로 보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조공 시스템은 연구할 가치가 많은데, 기본적으로 국가 간 불평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본질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비(非)평화, 일방적 약탈구조를 본질로 하는 과거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같은 논의는 반면교사로서밖에 볼 수 없는 것이고요. 이런 점에서 동아시아에 존재했던 질서들을 역사적으로 잘 연구하고 그 위에 평화와 번영으로 나아가는 평등한 동아시아 국가들 간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패권 국가들 간의 갈등관계가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에서 매우 중요한데, 중국과 일본의 패권 갈등을 놓고 보면 오히려 미국이 개입돼 있는 것 자체가 중일 간 역내 패권 갈등을 제어할 수 있는 요소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물론 지역적 역외국가의 역내 개입으로 인한 많은 위험성들을 우리가 경계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얘깁니다만.

따라서 동맹 중심의 대결체제나 일국 패권 체제가 아닌 다자협력체계를 만들어야 한반도 평화가 가능하고 동북아의 새로운 질서 속으로 중국을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또 만약 동아시아에서 공동체 형성이 가능하다면, 물론 매우 어려운 과제입니다만, 그것의 전제가 되는 국가 간의 평등한 관계를 만드는 힘은 정부 간이 아니라 시민사회 간의 소프트파워나 네트워크를 통해 가능하지 않겠나 생각됩니다.

또 '패권 국가로서의 중국'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는데, 물론 중국이라는 나라에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순시대 이래 중국 대륙에서 사람들이 굶어죽지 않고 살아가는 시대는 지금밖에 없습니다. 마오쩌둥 때만 해도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됐는데 덩샤오핑(鄧小平) 이후 모든 인민이 굶어죽지는 않는 시대가 온 것이고 그게 지금 중국에 (국내정치적으로) 힘이 되고 있습니다.

중국 패권에 관한 논의에서는 일종의 '착시현상'이 있다고 보이는데, 중국의 인구와 땅과 경제 규모에 맞는 외교와 군사의 크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중국 외교와 군사가 자신의 크기 자체를 찾아가는 과정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이 중국이 패권화되기보다 협력적인 방향에서 긍정적인 역할 하도록 만들어야지, 크기가 커지는 것 자체를 패권으로 보고 제한하려 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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