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권 위성방송 <알자지라>와 영국 일간 <가디언>은 1999년부터 2010년까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협상 내용을 담은 '팔레스타인 페이퍼'를 연일 공개하며 이같은 사실을 폭로하고 있다. 23일부터 빛을 보기 시작한 이 비밀문서는 1600여 개의 문건으로 이뤄졌다.
'이스라엘 전쟁 범죄 인정' 보고서 채택 연기에 협력
26일 공개된 문서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내용은 이스라엘의 2008~09년 가자 공습에 대한 유엔 인권사회이사회 보고서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되는데 있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미국의 압력을 받고 지연에 협력했다는 대목. '골드스톤 보고서'라고 불리는 이 보고서는 이스라엘이 가자 공습에서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고 규정했다.
문서에 따르면, 골드스톤 보고서가 알려져 파문을 일으킨 3주 후인 2009년 10월 21일 미국의 제임스 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팔레스타인 협상 대표인 사에브 에레카트를 만났다. 존스 보좌관은 이 자리에서 "2주 전 (골드스톤 보고서와 관련해) 당신들이 한 일에 대해 감사한다. 아주 용감했다"고 말했다.
또한 미 정부 관계자들은 안보리 회부를 연기하기로 한 날 팔레스타인 협상단에게 "(가자 공습에 관해) 국제법에 의해 문제 삼는 것을 지지하는 행동을 삼가라"고 압력을 넣었다. 이에 에레카트는 미국의 조지 미첼 중동 특사에게 "보고서 회부 문제와 관련해 우리는 언제나 당신들과 조율할 것"이라고 말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그동안 골드스톤 보고서의 안보리 회부 연기에 협력했다는 의혹을 부인해 왔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페이퍼'는 그들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었음을 보여줬다.
압바스 수반, 가자 공습 미리 알았나?
<가디언>은 또 마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이스라엘의 가자 공습 전 이스라엘 국방부의 고위 관리인 아모스 길라드와 만났음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증거가 기밀문서에 나타나 있다고 보도했다.
이 문제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이스라엘의 공습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를 따지는 민감한 문제다. 알고 있었다면 자치정부는 가자에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이스라엘의 사전 경고를 알리지 않은 셈이 된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경쟁 세력인 하마스가 통치하고 있는 가자에서는 그 후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1400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사망했다.
에레카트 대표는 2009년 10월 미첼 특사를 만난 자리에서 "압바스 수반은 (길라드에게) 이스라엘의 탱크가 가자지구로 들어간다고 해도 대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또한 길라드와 치피 리브니 당시 이스라엘 외무장관은 공습 전 팔레스타인 협상 대표들에게 "우리는 하마스와 충돌 코스로 가고 있다"며 "당신들은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토니 블레어, 양쪽에서 '듣보잡' 취급당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미국의 중동정책에 대해 적극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문서에 따르면 압바스 수반은 2009년 이란 야권이 운영하는 라디오 방송국에 수백만 달러의 자금을 대라고 팔레스타인 기업가들을 대통령 선거 부정 시비로 이란 정국이 들끓던 때였다.
<가디언>은 "이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정책적 목표를 지원했다는 증거"라며 "특히 하마스·헤즈볼라 등 무장 단체에 돈을 대는 이란의 영향력에 대항하기 위한 시도를 후원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관계자는 2009년 초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자금 지원을 받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중동 전체에 대한 미국의 정책과 군사적 개입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게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밖에 팔레스타인 페이퍼에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양측 모두 2007년 유엔·미국·EU·러시아에 의해 중동 특사로 임명된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를 불필요한 존재로 여겼음이 드러나 있다. 팔레스타인 측에서는 블레어 특사의 이스라엘 편향성을 비난했고, 이스라엘은 그들대로 블레어를 대수롭지 않게 대했다는 것이다.
▲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주민들이 압바스 수반 등의 인형에 불을 태우고 있다. ⓒAP=연합뉴스 |
하마스 패배시키려고 이스라엘과 손잡아
앞서 25일 공개된 문서들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극단주의 무장세력 제거를 위해 은밀히 협력했음을 보여줬다.
대표적으로 2005년 당시 이스라엘 국방장관이었던 샤울 모파즈와 나세르 유세프 팔레스타인 내무장관이 만나 파타 계열의 무장단체 '알-아크사 순교자 여단'의 사령관 하산 알-마둔의 암살에 관해 나누던 대화가 담겨 있다.
모파즈가 "당신들은 왜 그를 죽이지 않느냐?"고 묻자 유세프는 "우리는 (요르단강 서안지구 보안 책임자인) 라시드 (아부 샤바크)에게 지시를 내렸다"며 "상황이 쉽지 않고 우리의 능력은 제한돼 있다. 당신들은 아무 것도 제공하지 않았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이로부터 한 달 뒤 하산 알-마둔은 이스라엘의 미사일 공격으로 살해됐다.
<가디언>은 팔레스타인 당국이 마둔 암살에 직접적인 역할을 했는지 증거는 없지만, 이번 문건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정보·보안 당국의 은밀한 협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알자지라>는 알 마둔 암살 사건은 야세르 아라파트 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의 사망 이후 파타(PA 집권당)의 정책이 이스라엘에 대한 저항보다는 협력으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예라고 전했다.
한편 에레카트 대표는 2009년 데이비드 헤일 미국 특사를 만나 "우리는 하나의 권력, 하나의 총과 법의 지배를 확립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인들을 살해해야 했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계속 수행하고 있다. 우리는 질서와 법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우리 국민을 살해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2008년 1월 치피 리브니 이스라엘 당시 외무장관에게 "우리가 합의에 도달하면 하마스를 패배시킬 수 있다"고도 말하기도 했다.
팔 자치정부 "<알자지라>가 이스라엘 음모에 놀아 난다"
'팔레스타인 페이퍼'의 공개로 궁지에 몰린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알자지라>의 본부가 있는 카타르가 과거 이스라엘을 도운 적이 있다며 반격에 나섰다.
파타의 간부인 바쌈 자카르네는 26일 언론과 회견에서 지난 2002년 무기를 싣고 가자 지구로 향하던 '카린 A'호에 대한 정보를 미국 측에 알려준 것은 당시 카타르 왕세자 하메드 빈 자셈 임을 증명하는 문건을 파타가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자카르네는 이어 "<알자지라>는 압바스 수반과 팔레스타인 지도부에 대한 정치적 살인을 자행하고 있다"며 압바스 수반에 대한 <알자지라>의 공격은 고(故) 야세르 아라파트 수반에 대한 공격과 다를 바 없다고 비난했다.
비난의 중심에 있는 에레카트는 <알자지라> 방송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신임을 떨어뜨리고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음모에 가담하고 있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반면 가자지구에서는 26일 하마스 지지자 수천 명이 모여 압바스 수반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압바스 수반과 살람 파이야드 팔레스타인 총리, 에레카트 협상 대표의 모습을 한 인형을 불태우며 '반역자'라고 비난했다.
앞서 하마스 대변인은 "문건이 조작됐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말하건대 문건은 정확하며 팔레스타인 국민의 고통을 대변하지 않았던 협상자들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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