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이번 방한의 초점이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UEP) 문제로 모아지는 듯했다. 한국과 미국은 UEP 문제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1874호와 2005년 6자회담에서 나온 9.19 공동성명의 위반이라는 입장이다. 따라서 유엔 안보리에서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반면 중국은 UEP 문제도 6자회담을 열어서 풀자고 주장한다.
한·미와 중국의 입장이 크게 다르다 보니 이날 스타인버그 부장관과 한국 정부 당국자들은 '안보리로 가져가겠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하지 못했다. 그렇게 못을 박아 놓고 중국의 반대 때문에 실현시키지 못한다면 외교적 데미지를 입기 때문이다. 스타인버그는 약식 기자회견에서 "국제사회가 북한에 강한 메시지를 보내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만 말했다. 정부 고위당국자도 "(메시지를 보내는) 구체적인 전술을 딱 정해놓고 있지 않다"며 "전술을 소개할 상황이 못 돼서 포괄적으로만 말하는 것"이라고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스타인버그는 27일 일본을 거쳐 28일 중국을 방문해 이 문제를 논의할 예정이다. 하지만 한·미·일이 안보리 회부를 합의한다고 해서 중국이 받아들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 고위당국자는 "중국은 UEP를 막아야 한다는 기본 원칙에는 동의하겠지만 구체적인 방책으로 들어가면 한반도의 안정, 북한의 반발을 우선 이야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대 관심사였던 UEP 대책에 대해서는 이렇게 '싱거운' 말만 나오고 말았다.
▲ 제임스 스타인버그 미 국무부 부장관이 26일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시스 |
스타인버그 방한 계기로 6자회담 조건 완화?
쟁점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거졌다. 스타인버그 부장관과의 협의 내용을 설명하는 고위당국자에게서 이런 말이 나오면서부터다. "천안함·연평도 사건에 대한 북한의 책임 있는 조치가 6자회담 재개의 직접적인 조건은 아니다. 정부의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6자회담과 직접 연계되어 있지는 않다. 6자회담으로 가기 위해서는 비핵화에 대한 북한의 진정성을 행동으로 확인해야 하는데, 그 조건들은 따로 있다."
그러자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졌던 논리가 변한 듯 보였기 때문이다. 한·미는 '선(先) 남북대화 후(後) 6자회담'을 합의했다. 정부는 남북대화가 열리면 천안함·연평도 사건과 비핵화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는 곧 6자회담이 되려면 남북대화에서 천안함·연평도 및 비핵화 문제에서 진전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로 귀결된다. 그러나 고위당국자의 이날 말은 그게 아니었다.
기자들의 질문에서 초점은 '천안함·연평도 사건에 대한 북한의 시인·사과가 6자회담의 전제조건에서 분리된 건 스타인버그 부장관의 이번 방한 때문이냐'는 것이었다. 고위당국자는 강력히 부인했다. 그는 "종래 해오던 입장을 이번에 명확히 한 것으로 봐 달라"며 "천안함·연평도는 남북간의 문제로 좁혀졌다고 쓰면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사실 이 당국자의 말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그의 당부는 무위로 돌아갈 듯하다. 일례로 <연합뉴스>는 그의 설명이 나온 후 곧바로 "정부가 천안함·연평도 사건과 6자회담을 분리하는 이른바 투 트랙 전술을 구사할 태세"라고 규정했다.
최근의 정황으로 볼 때 언론이 고위당국자의 말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미국은 최근 남북대화를 부쩍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는 남북대화라는 징검다리를 짚고 6자회담으로 가야 한다는 조급함이 배어 있다. 작년 말 터져나온 UEP 문제의 시급성 때문이다. 스타인버그 부장관은 "한국 정부가 고위급 군사 예비회담을 제안한 것을 비롯해 북한과의 대화 노력을 하고 있는데 대해 감사한다"고 말했다. '오바마 정부의 네오콘'이라고 불리는 스타인버그마저 이런 말을 한다는 건 한국에 대한 일종의 대화 압박이다. 그런 상황에서 고위당국자의 그같은 발언이 나왔으니, 정부가 미국의 뜻을 받아들여 기존의 방침을 조정했다고 해석하는 건 자연스럽다.
본질 벗어난 말장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명박 정부가 종래의 입장에서 후퇴해 6자회담의 문턱을 낮췄다고 보는 건 과장이다. 설령 천안함·연평도를 6자회담과 전혀 별개의 것으로 떼어버렸다고 하더라도, 정부가 정해 놓은 6자회담 문턱은 여전히 높기 때문이다.
정부는 현재 6자회담 재개를 위한 전제조건으로 △ UEP를 포함한 모든 핵 프로그램 중단과 핵시설 모라토리엄 선언 △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 복귀 △ 9.19 공동성명 이행 확약을 포함한 비핵화 조치, 이렇게 세 가지를 내걸고 있다.
북한에 대한 이러한 요구 자체가 잘못된 것은 물론 아니다. 모두 시급하게 실현시켜야 할 중요한 과제들이다. 문제는 그걸 회담 재개의 전제조건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회담을 열어서 논의해야 할 사안들을 전제조건으로 만듦으로써 결과적으로 회담이 열리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조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위당국자도 "우리가 6자회담으로 가는데 설정한 여건도 호락호락한 게 아니다. 터프한 것들이다"라고 말했다. '6자회담 조건을 완화한 것이냐'는 보수 여론의 추궁에 대비해 미리 방어막을 치는 말이었다. 그러나 "터프한"이라는 표현은 액면 그대로 맞다. 북한이 받기 어렵고, 북한의 비핵화를 유도하기 위한 협상장인 6자회담은 멀어진다.
이명박 정부가 6자회담에 장벽을 치고 있고, '결과적으로' 북한의 비핵화를 어렵게 하고 있다는 평가는 억울하다고 말하려면 정부가 비핵화로 가는 작은 실마리라도 있으면 잡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 미국 뉴멕시코 주지사 빌 리처드슨이 12월 방북해 북한과 합의한 IAEA 사찰단 복귀, 사용 후 핵 연료봉 해외 판매 같은 실마리를 잡고 엉킨 실타래를 풀려고 했어야 했다. 그러나 정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북한의 선전에 놀아난 것'이며 '새로운 내용이 없다'고 폄하하며 전제조건만을 되풀이했다.
천안함·연평도는 6자회담의 전제조건이 아니라는 고위당국자의 말은 이런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그는 "대외적으로 우리가 미·일·중·러에 '천안함·연평도 문제에서 북한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6자회담에 안 간다'고 하고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한국이 6자회담 재개를 어렵게 하고 있다는 대외적인 시선을 피해가기 위한 수사일 뿐이라는 것이다. 과거 6자회담에서 납치자 문제를 다뤄야 한다고 고집하다가 나머지 5개국으로부터 '이지메'를 당했던 일본 같은 신세가 되지 않기 위한 제스처일 뿐이다. 고위당국자의 말에서 빚어진 논란은 이처럼 본질을 흐리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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