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정상들이 만나 '남북관계 개선'을 강조한 것에 발맞춰 남·북이 대화 재개 쪽으로 한 걸음씩 다가섰다. 북측의 진정성을 요구하던 남측은 '회담에 나가서 진정성을 확인하겠다'고 양보했고, 북측은 남측이 제안한 회담의 의제를 받아들였다.
북한은 20일 오전 김영춘 인민무력부장 명의로 남북 고위급 군사회담 개최를 제의하는 전화통지문을 보내왔다. 김관진 국방장관 앞으로 보낸 전통문에서 북측은 "군사적 현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남북 고위급 군사회담을 하자"고 제의했다고 국방부가 밝혔다.
북측은 특히 회담 의제와 관련해 "천안호 사건과 연평도 포격전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조선(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상태를 해소할 때에 대하여"라고 명시했다. 남북대화가 열리면 천안함·연평도 문제를 얘기해야 한다는 남측의 입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장광일 국방정책실장은 "통상 장성급 이상 회담을 고위급이라고 하는데 국방장관 회담으로 해석해도 틀린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북한은 고위급 회담과 함께 대령급 혹은 장성급이 될 예비회담도 동시에 제안했다"며 예비회담의 날짜와 장소는 남측의 편의대로 정하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전통문 수령 사실을 보고받은 이명박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안보관계 장관회의를 직접 주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결과 정부는 북한의 제안을 받기로 했다. 우선 고위급 군사회담 개최를 위한 예비회담을 수용하겠다는 것이다.
통일부는 이날 저녁 보도자료를 통해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에 대한 책임있는 조치 및 추가 도발 방지에 대한 확약을 의제로 하는 고위급 군사회담에 나갈 것"이라며 "이러한 방향으로 예비회담 등 구체적 사항들을 추후 북측에 제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마지못해' 나간 자리에서 결실 있을까
새해 들어 북한은 적극적인 대화 공세를 펴왔다. 성명, 담화, 언론 보도로 남쪽에 대화를 제의하다가 10일과 12일에는 전통문을 여러 통 보내 개성공단 및 금강산 관광 관련 회담, 적십자 회담, 당국 회담 등을 무더기로 제안했다.
그러나 남측은 남북대화가 열리면 의제는 천안함·연평도·비핵화 문제가 되어야 한다고 지난 10일 통일부 대변인 논평 형식으로 북한에 역제의했다. 따라서 이날 북한이 천안함·연평도를 의제로 하는 고위급 군사회담을 열자고 한 것은 그 역제의에 응하겠다는 뜻이다.
다만 북한이 전통문에서 내놓은 의제에는 비핵화 문제가 빠져 있다. 비핵화는 남북간의 이슈가 아니라 6자회담 및 북미협상에서 다뤄야 할 문제라는 생각에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자 통일부는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 확인을 위해 별도의 고위급 당국 회담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에서 추후 이를 위한 당국 회담을 제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남북대화에서 비핵화 논의를 배제하는 북한의 구도를 수용하는 것이냐는 보수층의 시선을 의식한 말로 풀이된다.
어쨌든 남·북이 기존의 입장에서 이처럼 한 발짝씩 물러선 것은 미·중 정상이 19일 "남북관계의 개선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진정성있고 건설적인 남북 대화가 필수적인 조치라는데 의견을 모았다"고 밝힌 것과 관련이 있다.
북측은 미·중 정상의 요구에 호응해 남북대화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6자회담과 북미대화로 가는 발판을 마련하겠다는 계산을 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한편 남측은 북측이 천안함·연평도 의제를 받겠다고 나왔는데도 또 다시 '진정성'만 요구한다면 미·중과 국제사회에 대화 거부로 비춰질 수 있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통일부는 이날 보도자료에서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에 대한 책임있는 조치 및 추가 도발 방지에 대한 확약,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 확인을 위한 남북 당국간 대화가 필요하다"는 말을 세 차례나 강조했다. 남북대화가 열리면 북한에 매우 강경한 태도를 취하겠다는 뜻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대화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마지못해' 나가서 북한의 선제 행동만을 요구하는 대화라면 돌파구가 마련되기는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북한 역시 천안함 침몰은 남쪽의 '날조극'이라며 공동조사를 요구하고, 연평도 포격에 대해서는 민간인 희생에 대해서만 유감을 표명할 뿐 포격 자체는 남측의 도발에 대한 대응이었다고 주장할 공산이 크다. 이처럼 양측이 팽팽히 맞설 경우 남북대화는 공전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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