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공포증'(Islamophobia)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말하기라도 하는 듯 미국의 '반이슬람 십자군'들의 관심이 이번에는 프랑스판 '배트맨' 만화에 쏠렸다. 문제의 만화는 '배트맨' 시리즈의 주인공 브루스 웨인이 세계 주요 도시마다 자신의 대변자를 둔다는 내용이다. '십자군'들이 문제로 삼은 것은 알제리계 프랑스 청년을 '프랑스의 배트맨'으로 그린 것. (☞'이슬람 공포증' 관련기사)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와 프랑스 <AFP> 통신 등 외신은 7일(현지시각) 이같은 논란을 전하며 미국 극우파 블로거들의 행태를 비판했다. 극우파 블로거들은 미국 출판사 'DC코믹스'가 발간하는 만화 잡지 <디텍티브코믹스 애뉴얼>과 <배트맨 애뉴얼>의 2월호에 등장할 영웅 중 배트맨이 프랑스 수도 파리를 수호할 인물로 점찍은 인물이 알제리계라는 이유로 "그는 무슬림이지, 프랑스인이 아니다"라며 공격했다.
'배트맨'은 가면을 쓴 영웅이 범죄를 저지르는 악당과 맞서 싸운다는 내용이다. 이 만화에서 파리의 수호자로 새로이 등장할 캐릭터는 '나이트러너'(밤의 질주자)로, 극중에서 알제리계 혈통의 22세 프랑스 청년으로 그려진다. 나이트러너는 파리 북부 교외의 주택 지대인 클리시 수 부아 출생으로 설정돼 있는데 이 지역에서는 실제 2005년 11월 이민자들의 폭동 사태가 발발한 바 있다.
당시 이민자 청소년 2명이 경찰 추격을 피해 달아나다 감전 사고로 숨진 뒤 인종차별과 만성적인 실업 등 이민 사회의 불만이 폭발하면서 두 달에 걸쳐 건물 300여 채와 차량 1만여 대가 불타는 등의 사태가 빚어졌다. 만화의 주인공인 나이트러너 역시 이 폭동에서 시위자로 오인돼 경찰에게 붙잡혀 억울하게 구타를 당하면서 사회 정의에 눈을 뜨게 된다는 설정이다.
▲ '배트맨' 시리즈는 한국을 포함해 전세계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사진은 이 시리즈를 원작으로 제작된 영화 '다크나이트'의 한 장면. ⓒ뉴시스 |
미국 극우파 "알제리계 이민자는 '진짜 프랑스인' 아니잖아"
미국 우익 논객들은 원칙적으로 유럽에 미국 만화를 수출한다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그들은 베레모를 쓰고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백인 청년이 아니라 알제리계 이민자의 후손이 '영웅'으로 선정된 것에는 불만을 드러냈다.
우익 블로거 워너 휴스턴은 자신이 운영하는 웹진 '퍼블리우스 포럼'을 통해 "분명 배트맨은 프랑스의 수호자가 될 진짜 프랑스인을 찾을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며 "무슬림 청년들이 프랑스를 테러 공포에 몰아넣고 있고 세계가 이슬람 테러리즘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이런 시기에 '배트맨'을 읽는 독자들은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혼란을 느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극우 성향의 웹사이트 '어스튜트 블로거스'의 에이비 그린은 "프랑스로 간 브루스 웨인이 정의에 대한 감각이 있는 순수한 프랑스인 젊은이들이 아니라 '억압받는' 소수파를 (자신의 대변자로) 고용했다"고 비아냥댔다.
프랑스인들은 이 논란을 매우 재미있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한편으로 만화 속에 그려진 프랑스의 모습이 사실과 다른 데 놀라기도 했다고 <인디펜던트>는 전했다. 2005년 폭동은 '무슬림 폭동'이 아니었으며 매우 다양한 인종적 배경을 가진 젊은이들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고 신문은 지적했다. 또 신문은 "휴스턴이나 그린이 뭐라든, 알제리계 젊은이도 '진짜', '순수' 프랑스인"이라고 일축했다.
배트맨 시리즈에서 '정치적'인 등장인물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현재 이 시리즈물의 여주인공 '배트우먼'은 레즈비언이며, 나이트러너 역시 프랑스 교외 가난한 서민층 젊은이들이 즐겨 입는 헐렁한 모자 달린 티셔츠 차림으로 그려진다. 이 만화의 작가 데이비드 하인은 'DC코믹스는 미국 외의 다른 나라에서 새로운 배트맨 시리즈를 만들 때 기존의 정형적인 틀을 고수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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