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북한을 다녀온 후 1주일 후에 작성·공개한 방북 보고서를 보면, 북한의 우라늄 농축 시설이 핵무기 제조용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직 섣부른 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A4 8쪽 분량의 방북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이들 시설(2000개의 원심분리기를 갖춘 우라늄 농축 시설과 건설 중인 25∼30MWe 실험용 경수로를 의미함)은 북한의 군사적 능력을 증강시키기 위한 것보다는 주로 민수용 핵 발전을 위해 고안된 것으로 보인다. 핵무기 능력 증강은 가동 중단된 5MWe 흑연로를 재가동하거나, 새로운 더 큰 규모의 흑연로를 건설하거나, 추가적인 핵실험을 실시하는 방식으로 훨씬 효과적으로 달성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헤커 박사 및 그와 동행한 존 루이스 교수와 로버트 칼린 연구원)는 영변에서 플루토늄 활동이 지속되고 있다는 어떠한 증거도 보지 못했다."
물론 헤커 박사도 우라늄 농축 시설이 핵무기 제조에 이용되는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으로 전환될 수 있고, 또 다른 농축 시설이 다른 곳에 있을 가능성이 있으며, 경수로에서도 플루토늄 추출이 가능하다는 점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고, 이에 대해 강한 우려도 표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커 박사는 "북한이 더 많은 핵폭탄을 만들려고 하는 것인지, 경제적이고 상징적인 이유를 들어 북한이 원하고 있는 핵 발전을 향해 방향을 전환한 것인지"를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며, 자신이 작성한 보고서가 이러한 판단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한미 양국 정부와 대다수 분석가들은 이러한 충고를 무시하고는 헤커 박사가 전해온 정보를 이용해 북한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이용해 제2의 핵폭탄 제조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단정짓고 있다.
▲ 지난 9월29일 찍힌 북한 영변에 있는 핵 시설의 모습이 담긴 위성사진이다. ⓒ뉴시스 |
북한의 절망어린 선택
헤커 박사는 북한 원자력총국의 고위 관료의 발언도 자세히 전했다. 새롭게 부상한 경수로 및 우라늄 농축 문제를 포함한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역지사지의 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에서 그가 인용·소개한 북한 관료의 발언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1980∼90년대에 2003년까지 2000MWe 경수로를 제공받는 조건으로 우리의 원자로를 포기하기로 했다. 1990년대 초반 우리는 50MWe 및 200MWe 가스-흑연로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들 흑연로는 콘크리트 구조물과 고철만 남겨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우리는 국가의 전력 수요 충족에 기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롭게 시작하기로 했다.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우리 스스로 경수로를 짓기로 한 것이다. (중략) 우리는 6자회담 및 9.19 공동성명을 계속할 의지가 있지만, 긍정적인 합의가 나올 때가지 기다릴 수는 없다. 우리는 전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헤커 박사는 북한이 보여준 경수로 건설 현장과 우라늄 농축 시설 못지않게 플루토늄 생산에 이용되었던 영변 핵시설이 전력 생산용으로 전환될 가능성도 주목했다.
그는 "5MWe 원자로는 가동 중단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며, 이를 재가동하는 데에는 6개월 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추정했다. 더욱 주목할 것은 상당 부분 공기(工期)가 진척되었다가 1994년 제네바 합의에 따라 건설 중단된 50MWe 원자로의 상태이다. 헤커 박사는 이 원자로가 "대형 크레인에 의해 해체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북한은 매년 10개의 플루토늄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원자로 건설을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헤커 박사는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에서도 어떠한 활동도 포착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북한은 분명히 현 시점에서는 더 많은 플루토늄이나 플루토늄 핵폭탄을 만들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결론지었다.
포용만이 희망이다!
물론 헤커 박사의 분석은 언제든 뒤바뀔 수 있는 잠정적인 것이다. 가동 중단된 흑연로와 핵연료 제조 공장, 그리고 재처리 시설은 북한이 작심하면 수개월 내에 재가동이 가능하다. 또한 북한이 전력 생산용이라고 주장하는 우라늄 농축 시설도 핵무기 제조용으로 둔갑할 수 있고, 실험용 경수로에서 나온 사용후 연료봉을 재처리하면 흑연로에서 나온 것보다는 질이 떨어지지만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결과가 북한의 선택과 한미 양국의 선택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점이다. 조속히 대화와 협상이 재개되지 않는다면, 북한의 "핵 억제력 증강"과 한미 양국의 자기충족적 예언은 악순환을 형성하면서 한반도를 벼랑끝 위기로 내몰게 될 것이다.
이를 반영하듯 헤커 박사의 우려는 미국과 한국에게도 향해 있다. 그는 "북한이 미국 및 동맹국들이 내세워온 조건을 충족시키면서 6자회담에 복귀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은 문제를 악화시킬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며,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유일한 희망은 포용에 있다. 미국과 그 파트너들은 북한이 핵폭탄 대신에 원자력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최근의 북핵 상황 변화에 대처해야 한다. 그러한 대처는 북한의 근본적인 안보 불안 해소를 요구할 것이다. 북한의 한 고위 관료는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평양 방문을 가져온 2000년 북미 공동코뮤니케가 훌륭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헤커 박사와 함께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로버트 칼린 연구원과 존 루이스 교수도 비슷한 권고를 했다. 칼린은 미국 내 최고의 북한 전문가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이들은 11월 22일자 워싱턴포스트 기고문을 통해 대북 정책의 전면적인 재검토를 촉구하면서 아래와 같이 충고했다.
"북한에 대해 현실적이 되는 것은 북한의 체제나 정책에 대해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가치나 목표의 관점에서 무언가를 양도하는 것도 아니다.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원점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새롭게 출발하는 현실적인 지점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북한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갖고 있는 주권국가로서 말이다."
그러나 이들의 충고는 '쇠귀에 경 읽기'가 되고 있다. 한국→일본→중국 순으로 순방길에 오른 미국의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는 "포용을 위한 포용이나 단지 대화를 위한 대화를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 강경기조도 여전하다. 그러면서 중국만 쳐다보고 있다. 앞으로가 더욱 걱정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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