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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미국을 지배하고 있는 건 몰락에 대한 '두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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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지금 미국을 지배하고 있는 건 몰락에 대한 '두려움'"

[인터뷰] 월러스틴 "중국의 시대? 체제 자체가 붕괴할 수도"

'근대 세계체제'라는 패러다임을 제시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사회과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81)이 최근 한국을 다녀갔다. 8일 인천 아시아경제공동체 포럼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10일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이 주최한 '석학들의 대화'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프레시안>은 지난 11일 월러스틴 미 예일대 석좌교수를 단독 인터뷰했다. 숙소인 서울 코리아나호텔에서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가 진행한 이날 인터뷰에서 월러스틴 교수는 미국 중간선거 결과, 중국의 부상과 세계체제의 미래 등의 주제를 이야기했다.

월러스틴 교수의 견해는 인터뷰 도중 그가 인용한 성경의 한 구절로 압축될 수 있다.

"거만한 마음가짐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언 16:18)

월러스틴은 '넘어지고 있는' 미국의 현재를 이야기했다. 미국인들이 자국의 몰락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현실을 두려워한 나머지 애써 외면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모순된 선택을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뽑으며 가졌던 기대가 무너지자 그와 정반대의 길을 가겠다는 공화당에 중간선거의 승리를 안겨 주는 부조리의 원인을 파헤쳤다.

떠오르고 있는 중국에 대해서는 '거만한 마음가짐'을 경고했다. 최근 중국이 아프리카나 중남미, 중동 등지에서 보이고 있는 모습은 제국주의 시대의 유럽이나 그 뒤에 헤게모니를 잡은 미국의 행태와 다를 바 없다는 지적이었다. 중국이 그처럼 과거의 실수를 답습하면 헤게모니는 미국에서 중국으로 넘어오는 게 아니라 세계체제 자체가 다른 것으로 변할 수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

사실 월러스틴은 현재의 전지구적 위기를 '구조적 위기'로 규정하면서 세계체제의 극적인 변화 쪽에 훨씬 더 강한 무게를 두고 있다. '중국의 시대'가 오는 게 아니라 새로운 세계체제가 100년 안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혼돈 속에 희망"은 있다고 말하는 월러스틴이 보는 오늘의 세계는 어떤 모습인가. 다음은 이날 인터뷰의 전문이다.

▲ 이매뉴얼 월러스틴 미 예일대 석좌교수 ⓒ프레시안(손문상)

"몰락에 대한 두려움이 오바마의 선거 패배 가져왔다"

김민웅 : 미국이 지금 위기 상황인데,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올바른 선택과 결정을 했다고 보는가? 오바마 대통령과 민주당은 왜 중간선거에서 패했나?

월러스틴 :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다. 오바마의 결정이 올바른 것들이었다고 보기는 매우 힘들다. 그러나 오바마가 무엇인가를 하기에는,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오바마는 A, B, C, D를 했어야 한다'고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가 내 말을 따르려고 시도했다고 한들, 그 목적을 이루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오바마 스스로 설정한 프레임워크 안에 있는 일에 대해서도 그는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다. 하지만 보다 큰 틀에서 보자면, 오바마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오는 제약을 받고 있다고 말하는 게 나을 것이다.

국내정책이건 대외정책이건 보다 진보적인(radical) 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법은 의회에서 통과되지 않았다. 물론 오바마가 과연 더 진보적인 정책을 원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만약 오바마가 진보적인 정책을 추구했다 해도, 그는 미국 정치의 현실에 따른 제약을 강하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김민웅 : 정치 제도 상의 제약에 갇혀 있었다는 말인가?

월러스틴 : 미국의 정치 현실에 따른 제약 요소는 다양하다. 예를 들어 상원에서 공화당은 비록 소수당이었지만 오바마가 하고자 했던 것들을 효과적으로 무력화시켰다.

김민웅 : 상황적 제약을 넘는 것이 지도력이다. 오바마의 리더십으로 그런 제약을 극복할 수도 있는 것 아니었나?

월러스틴 : 물론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오바마가 진정성은 있는 사람이라는 평이 많은데, 그러나 그가 모든 분야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오바마는 자신에 대한 비판에 대해 '나는 충분히 많은 일을 했는데 사람들이 몰라준다'는 식으로 대응하곤 했다. '건강보험 개혁법도 통과시켰다. 비록 아주 좋은 법은 아니지만 지난 50년 동안 아무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진짜 성과가 아닌가. 공화당이 앞으로 이 법을 폐기할 수 없게 쐐기를 박았다. 그 외에도 나는 몇 가지 쓸모 있는 일을 했다.' 이런 식의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그런 성과가 있었건 없었건 중간선거에서 진 이유는 단순하다. 경제 때문이다. 미국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어떤 두려움인가? 단기적으로는 일자리와 주머니 사정에 관한 것이고, 크게 봐서는 미국의 쇠퇴(decline)를 두려워하고 있다. 감정적인 반응일 수도 있지만 미국인들은 현재의 상황에 크게 놀라고 있다. 그러다 보니 누가 권력을 가지고 있건 일단 권력자들을 비난하는 경향이 있고, 그게 선거에 반영된 것이다.

김민웅 : 경제 문제나 미국의 쇠퇴 경향은 오바마가 만들었다기보다 부시의 유산이라고 하는 게 타당하지 않은가?

월러스틴 : 물론이다.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정치를 얘기하고 있다. 당신이나 나 같은 사람들이야 미국 경제가 이 지경이 된 것은 부시의 유산이라고 분석할 수 있지만, 일반 유권자들의 입장에서 부시의 유산이건 아니건 무슨 상관인가. 사실 미국 경제가 이렇게 된 게 전적으로 부시 때문만도 아니다. 물론 부시가 무시무시한 일을 많이 했지만, 부시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위기는 시작됐다.

공화당은 오바마가 은행을 구제하려고 돈을 퍼부었다고 비판하지만 부시 역시 그런 일을 했다. 오바마는 부시가 하던 일을 계속 할 뿐이다. 그런 분야는 수없이 많다. 그러다 보니 오바마를 열정적으로 지지했던 사람들이나 좌파 쪽 사람들은 오바마에게 크게 실망했다.

나는 2008년 대선 당시 오바마를 찍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가 대외 문제에서 큰일을 할 수 있다고는 기대하지 않았고, 경제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누가 미국 대통령이 되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자기가 뭔가 큰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고,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오바마를 찍어야 한다고 했던 것은 오바마의 말을 믿어서가 아니었다. 공화당이 너무나 나쁜 당이었기 때문이었다. 공화당은 정말 형편없이 나쁜 당이 됐다. 지금의 공화당은 부시 때보다 더 나쁘고, 부시 때는 레이건 때보다 더 나빴다.

김민웅 : 차악을 선택하는 의미에서 오바마를 찍었다는 것인가?

월러스틴 : 그렇다. 물론 나는 오바마가 당선됨으로써 공화당을 몰아내는 것 외에 사회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입법도 해낼 수 있다고 기대했다. 의보 개혁 등에서 기대에 어느 정도 부흥한 측면도 있고, 관타나모 수용소 문제처럼 해결하지 못한 것도 있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았겠지만, 정치인으로서 다음 선거에 대한 걱정 때문에 밀어붙이지 못했다. 그런 상황이 충분이 예상됐기 때문에 나는 그리 실망하지 않았다.

김민웅 : 오바마의 가장 큰 잘못 또는 실수는 무엇이었나?

월러스틴 : 집권 초기 무엇인가를 훨씬 공격적으로 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바마는 보수적인 경제학자 타입의 인물들을 중용하는 스타일이었다. 그건 자멸로 가는 길이라고(self-defeating policy) 수많은 사람들이 지적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오바마는 사람들이 합리적일 수 있다고 정말로 믿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정치적으로 중재자(moderator)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매우 지적이고 뛰어난 분석가이다 보니, 공화당과 화해하려고 진정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그건 먹히지 않았다. 다른 정치적 조건 아래에서는 가능했을지 모르겠지만, 오늘날 미국의 현실을 고려할 때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고 큰 실수였다.

하지만 오바마는 아직 그걸 자기의 실수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도 오바마가 가진 문제 중 하나이다. 매우 심각한 문제다. 그 문제를 극복하고 앞으로 12개월 안에 무언가 매우 강력한 것을 하지 않는다면 오바마는 재선에 실패할 것이다.

대외정책에 있어서도 오바마는 클린턴 행정부 시절의 정책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샤프한 정책을 내놓고 국제사회에서 다자적인 합의를 이끌어 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미국이 그런 걸 추진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그런 상황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른 나라들은 오바마 행정부 출범 후 반년 가량 그에게 박수를 쳤지만, 하나 둘씩 환상에서 벗어났다.

김민웅 : 미국 사람들이 가진 두려움 때문에 오바마에게 반대표를 던졌다고 했다. 그러나 미국인들의 그 선택은 공화당에 승리를 주었고, 결국 자신들이 오바마를 찍었을 때 원했던 것과 반대의 길로 가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미국 사람들은 자신들의 선택의 의미를 정말 알지 못하나?

월러스틴 : 그렇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선택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미국인들의 심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2차 대전 후 미국인들이 세계 속에서 미국의 역할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미국인들이 그걸 깨닫고 자신들의 책임을 막 받아들이고 있을 때, 미국의 역할이 쇠퇴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쇠퇴를 받아들이기는 매우 어렵다.

미국은 가장 위대한 나라이고 대적할 상대가 없으며 가장 훌륭한 나라라는 미국 예외주의는 심리적으로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지만, 한편으로 미국인들은 미국이 쇠퇴하기 시작한 현실을 인지하고 있다. 아직은 믿기 싫어 하지만 현실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는데 10~30년 정도가 걸릴 것이다. 그처럼 미국인들은 지금 미국의 쇠퇴를 인식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종의 정신분열적 상태에 있으면서, 뭔가 잘못됐다면서 정부 탓만 하고 있다.

경제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인들은 현재 일자리가 부족하고, 자기네 자식들은 자기들이 누렸던 것보다 못한 미래에서 살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정부가 이런 문제를 해결해주길 원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세금을 내기 싫다'고도 말한다. 매우 부조리하고 모순되어 있다. 정부는 의료보험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서도, 또 정부가 보장하는 (노인들을 위한) 건강보험인 '메디케어'는 건드리지 말라고 한다. 그렇게 모순되는 요구를 하면서도 자신들이 모순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정말로 멍청해서 그런 불일치를 알지 못한다.

김민웅 : 미국의 미래에 매우 비관적인 것 같다. 이런 식이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미국인들에게 남은 대안이 있다면?

월러스틴 : 나는 오랫동안 미국의 쇠퇴에 관해 말해왔다. 여유를 가지고 본다면 쇠퇴라는 게 그리 끔찍한 일은 아니다. 매우 높은 위치에 있다가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밑바닥으로 치닫지는 않을 것 아닌가? 조금 추락하겠지만 그래도 꽤 잘 사는 상태가 이어질 것이다. 영국은 약 100년 동안 추락해왔지만 그렇다고 지금 굶는 건 아니지 않은가.(웃음) 때로는 우아하게, 최상의 순간은 지나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영국 사람들은 실제로 그런 태도를 보였다. 한때 헤게모니 국가였던 네덜란드 사람들도 지금 아직도 잘 살고 있다. 파라과이처럼 갑자기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건 아니다.

ⓒ프레시안(손문상)
"중국과 미국은 상호의존적"

김민웅 : 중국이 부상하고 미국이 쇠퇴하는 일종의 전환기에 접어들었다. 중국은 미래에 어떤 역할을 할 것이라고 보나?

월러스틴 : 나는 두 가지를 주장해왔다. 첫째, 헤게모니 국가가 쇠퇴할 때 다른 나라가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중기적으로 계속된다고 가정할 경우, 중국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 일본, 한국 세 나라가 일종의 '집합적 역할'(collective role)을 하고 있다고 보고, 현재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다. 동북아시아 3개국이 서유럽과 경쟁하고, 미국은 이 지역에서 일종의 하위 파트너(junior partner)로 참여하는 상황이 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체제가 향후 75~100년 간 계속될 수 없다고 주장해 왔다. 2050년까지는 완전히 다른 체제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지금의 위기는 구조적인 위기이다. 한편으로는 체제가 계속되면서 모든 상황이 더 나빠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구조적인 위기와 투쟁이 계속되어 '헤게모니의 승계자'가 아니라 '체제의 승계자'가 나올 것이다.

중국의 지도부는 체제가 바뀐다고 하는 이런 나의 분석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앞으로 75년 후에도 계속되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 가정 하에 중국의 지도부는 두 가지를 걱정한다. 하나는 당면한 문제로, 미국이 너무 빨리 붕괴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한다. 미국의 붕괴 상황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천천히 붕괴했으면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기 내부에 대한 걱정으로, 중국 지도부는 공산당이 이뤄놓은 중국의 통일이 깨지고 다시 분열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고 있다. 타이완이나 신장위구르에 대해 강경한 정책을 취하고 있는 것은 분열에 대한 우려 때문이고, 실제로 정책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김민웅 : 현재 중국의 대미관계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이라고 보나?

월러스틴 : 지난 30~40년간 미국과 중국의 지도자들은 미중관계에서 매우 조심스런 태도를 취했다. 뭔가 중대한 일이 일어나려 할 때면 언제나 마지막 순간에 한 걸음씩 물러났다. '치킨게임' 상황과 비슷했다. 지금까지 미국과 중국은 언제나 충돌 직전에 핸들을 꺾었다. 물론 이것은 아주 위험하다. 핸들을 틀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해온 것이 그렇다.

김민웅 : 만약 중국의 힘이 점점 더 강해진다면 이른바 치킨게임은 자동적으로 끝나고 미중관계가 지금과는 달라질 가능성도 있지 않나?

월러스틴 : 만약 그렇다고 해도 심각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중국 입장에서는 미국과 충돌하는 것보다 미국을 그들의 궤도로 끌어들이는 편이 더 낫다. 무엇보다도 군사력의 측면에서 보면 중국이 미국을 침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웃음) 중국은 미국과의 전쟁을 원치 않으며 '경제 전쟁'도 원치 않는다.

하지만 중국은 멈추지 않고 그들의 목표를 추구할 것이고, 미국에 항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중국은 그렇게 약하지 않으며 중국에 동조하는 나라들도 있다. G20 정상회의를 봐도 중국이 고립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미국이 좀 더 고립되는 것처럼 보였다.

김민웅 : 중국과 미국이 생존을 위해 상호 의존적이라는 것인가?

월러스틴 : 나는 그렇게 보고 있다.

▲ 이날 인터뷰는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왼쪽)가 진행했다. ⓒ프레시안(손문상)

"한-중-일 '동북아연합', 튼튼한 국제관계 구조 될 것"

김민웅 : 오늘날 우리는 동북아에서 중국의 부상을 지켜보고 있다. 중국이 우리의 미래에 모델이 될 수 있을까?

월러스틴 : 아니다. 나는 그런 논의에 언제나 회의적이었다. 어떤 국가가 다른 나라들이 갖지 못한 특별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든가 다른 국가의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중국은 정치적 상황 등에서 일본과 다르고 러시아와도 다르며 영국과도 다르다. 다른 국가가 중국을 똑같이 모방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필리핀에 중국을 모방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처음 몇 단계는 성공적일 수 있겠으나 문화도 상이하고 역사도 달라서 장애 요인이 많을 것이다.

김민웅 : 경제적인 의미의 모델이 아니라 국제정치적인 맥락을 고려했을 때 중국의 역사적 역할에 대해 살펴본다면 어떨까 하는 질문이었다. 미국 등 다른 헤게모니 국가들과는 차이가 있게 될까.

월러스틴 : 물론 중국은 미국, 영국, 네덜란드 등 과거 세계를 지배했던 많은 국가들과 다르다. 만약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중국이 헤게모니를 장악한다면 아마 세계는 미국의 패권 시기와는 좀 다른 방식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런 차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예컨대 나는 2075년이나 2100년이 됐을 때 중국이 어떤 위치에 있을지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또 그 때까지 자본주의 세계 경제체제가 유효할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나의 정치경제학적 감각으로는 중국이 헤게모니 국가가 됐을 때 세계가 어떤 모습일까를 고민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을 필요는 없어 보인다.

김민웅 : 미국, 영국, 네덜란드 등 이전 헤게모니 국가들의 사례를 참고해서, 중국 지도자들에게 '이것만은 꼭 해야 한다'고 충고한다면?

월러스틴 : 중국이 지금의 높은 성장률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장 먼저 말하고 싶다. 이런 성장률은 아주 짧은 기간 동안에만 가능할 것이고, 중국도 세계적인 경제 불황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의 높은 성장률에 의존하지 말라는 것이 나의 첫 번째 충고다.

두 번째로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역사적 관계에서 비롯된 불편한 감정을 청산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중국이 일본에 대해 문화적 모국(母國)이라는 생각이나 지난 50년 또는 75년 동안 일본이 역사적으로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은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일본과 중국은 서로 얻을 것이 많은 관계다. 중국은 한국,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국제적인 협력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중국과 일본이 힘을 합치고 한국이 가세하는 느슨한 형태의 '동북아연합'을 만드는 것 등이 예가 될 수 있다. 이런 연합이 만들어진다면 꽤 튼튼한 국제관계 구조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은 한국·일본과의 국제관계를 잘 풀어 나가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이는 미국과 유럽 간의 관계와 유사하다. 유럽은 미국에 대한 불만을 극복하고 있다. 과거 유럽의 불만은 그들이 미국에 대해 문화적 모국이지만 1945년 이후 국제무대에서 미국이 유럽의 주도권을 빼앗아갔다는 데서 비롯됐다. 물론 유럽인들은 미국에 종속돼 있었다고 느꼈기 때문에 미국이 싫다고 공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지금에 와서는 그런 생각들은 별 의미가 없다. 국제정치의 현실에서는 '힘을 빼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 잠언에도 "거만한 마음가짐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Pride goes with before the fall)라고 나오지 않는가. 중국은 지난 일을 과거지사로 돌리고 현재와 미래를 중시하는 태도를 배워야 한다.

ⓒ프레시안(손문상)

"동북아는 세계 자본축적의 핵심…제국주의 경계해야"

김민웅 : 다소 거창한 질문 같지만, 지금 상황에서 월러스틴 교수는 동북아의 역사적인 중요성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 묻고 싶다. 중국이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고 한반도의 통일과 비핵화는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다. 일본은 전례 없는 위기를 겪으면서 점차 리더십이 쇠퇴하고 있고 미국은 과거와는 위상에서 차이가 나고 있지만 그 동안 이 지역에서 차지했던 위치를 계속 지키려 하고 있다. 세계체제의 전환에 대한 전망과 관련해 동북아 지역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월러스틴 : 동북아는 세계체제의 자본 축적에서 잠재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서유럽이 강력한 경쟁자가 되겠지만 동북아가 더 잘 해낼 것으로 본다. 다음 세기가 '아시아의 세기'가 될 것이라는 분석도 있는데, 내가 실제로 느끼기에도 그렇다. 동북아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 좀 더 희망적으로 느끼는 반면 유럽이나 미국 사람들은 자신들의 미래에 비관적이다.

지금은 어떤 의미에서든 동북아를 무시할 수 없다. 미국은 60~70년 전부터 아프리카나 라틴 아메리카, 아랍 등 전세계에서 자신의 입장을 가지고 개입하는 것을 그들의 '책임'으로 여겨 왔다. 지금은 동북아 국가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 30년 전만 해도 중국이나 일본이 그런 역할을 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나 브라질, 이집트 같은 나라들은 그들의 입장에서 동북아의 부상이 그들에게 어떤 이용 가치가 있는지를 생각할 것이다. 예컨대 남아공에서는 동북아의 부상이 그들에게 이익이 될 것인지를 두고 큰 논쟁이 있다. 유럽이나 미국과의 균형을 맞춘다는 면에서 그들에게는 좋은 결과가 될 수 있다는 의견도 있지만, 예전 유럽 국가들이 (제국주의 시대에) 했던 잘못을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에 거리를 둬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이런 현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한국, 중국, 일본 등 동북아 국가들은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말라위나 잠비아 같은 국가에서는 중국 기업들이 현지에 진출해서 정착하고 중국산 물건을 수입하거나 자원을 중국으로만 수출하는 등 그들만의 공동체를 만들고 있다. 이 기업들이 중국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것은 현지인들을 착취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 유럽이 식민지에서 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런 나라들에 30~40년 기간을 두고 원자재 위주의 현물 상환으로 차관을 제공하는 것도 이런 측면에서 볼 수 있다.

김민웅 : 그런 정책은 드러나게 하거나 또는 보이지 않게 하는 식민지화(化) 정책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월러스틴 : 동의한다.

김민웅 : 마지막 질문이다. 월러스틴 교수도 잘 알고 있겠지만, 한국은 민주화를 이룬 역사적인 경험이 있다. 한국의 이런 경험이 세계체제의 대안을 건설하는 일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월러스틴 : 물론 20년 전 당시 한국의 상황은 대단했다. 노동조합과 민주화운동 세력들이 실제로 국가를 민주화했고, 나에게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경제가 발전하면서 이런 흐름은 지속되지 못했다.

물론 여전히 운동을 계속하는 세력들도 있다. 예를 들어 오늘 한국에서 발행된 영자신문을 보니 지금 한국의 좌파 세력은 한미 FTA에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함께할지, 얼마나 성과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걸 현실에서 잘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움직임이 시작된 뒤 빠르게 성과를 내거나 어떤 전기가 마련되지 못하면 운동은 사그라진다.

예를 들어 지금 프랑스를 보면, 노동조합이 (연금개혁에 반대해) 1주일이나 파업을 했지만 처음 3~4번 정도 집회가 지나가면서 동력이 고갈됐다.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의 연금개혁 법안을 무산시킨 1995년의 성공적인 상황과는 비교되는 부분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한국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다. FTA 반대 운동에 지금 한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참여할 것인지, 얼마나 강력한 흐름이 만들어질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물론 FTA 비준을 막아낸다면 큰 승리가 되겠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이 운동은 거기서 멈추고 말 것이다.

▲ ⓒ프레시안(손문상)
"혼란 속에 미래의 희망이 있다"

김민웅 : 그렇다면 월러스틴 교수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어디에서 찾는가?

월러스틴 : 물론 지금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런 상황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혼란은 근본적인 선택의 문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기회다. 이런 혼란스런 상황에서는, 지금까지의 논쟁점들이나 의문이 제기됐던 지점들은 모두 잊어도 된다고 나는 오래전부터 주장해 왔다. 지금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의미에서 50대 50의 상황이다. 그리고 50%는 결코 적지 않은 확률이다.

실제로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는 많은 (대안적인) 운동들이 진행 중이다. 미국 언론에 별로 보도되지 않아서 한국에서는 알고 있는 사람조차 없겠지만,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사회포럼'에는 미국 전역에서 1만~1만5000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는 매우 인상적인 행사였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미국 내의 모든 세력이 포럼에 참여했다. 이번 디트로이트 포럼은 제2회 포럼이었고 1회 포럼은 2007년에 열렸다.

또한 네브래스카 오마하 같이 미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지역에서도 이 포럼에 참여한 그룹들이 활동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심지어 이런 지역에서 운동 단체들이 개최한 모금 행사도 성공적이었다. 행사를 주최한 단체는 그 행사에서 디트로이트 포럼 참석 경비를 마련했다. 이렇듯 수면 아래에서는 많은 움직임이 진행 중이다. 이것은 진정 놀라운 일이다. 다시 강조하건대, 상황이 이렇게 혼란스럽다는 것이 오히려 희망일 수 있다.

김민웅 : 혼돈은 도리어 창조의 계기다, 이런 의미인가? 긴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하다.

● 이매뉴얼 월러스틴

자본주의를 최초의 전지구적 세계체제로 정의한 월러스틴은 1930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1950년대에 컬럼비아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컬럼비아대에 재직하던 1968년 학생운동 사태에 개입함으로써 학교를 떠났다.

1976년부터 99년까지 빙햄턴대 교수를 지냈고, 2005년까지 빙햄턴대 산하 페르낭브로델센터의 소장으로 있었다. 세계사회학회(ISA) 회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1975년 <근대세계체제Ⅰ>로 미국사회학회가 주는 소로킨상을 수상했다. 2000년부터 예일대 석좌교수로 있다.

한국에는 <근대세계체제>(3권), <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 <자유주의 이후>, <유토피스틱스>, <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 <반체제운동>, <사회과학의 개방>, <이행의 시대>, <미국 패권의 몰락> 등 10여 권의 저서가 번역 소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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