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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막힐 듯했던 정원, 이런 '시든 장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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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막힐 듯했던 정원, 이런 '시든 장미'는…

[프레시안 books] 온다 리쿠의 <여름의 마지막 장미>

"이 가을도 이제 끝난다. 산꼭대기는 시커먼 구름에 덮여 있다. 저곳에서 겨울이 온다. 그리고 나는, 그 호텔을 향하고 있다. 그 호화판 감옥에서 세 여자가 기다리고 있다. 거짓말쟁이 여자들. 자신들의 생활은 물론 타인의 인생까지 엮어 거짓말의 태피스트리를 짜온 여자들. 하지만 그 가운데 정말 죄 많은 여자는 단 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국립공원의 산 정상에 있는 고풍스럽고 호화로운 호텔. 매년 늦가을 이곳에서는 재벌가 사와타리 그룹의 세 자매가 주최하는 파티가 열린다. 올해도 수십 명의 손님이 초대받아 모여든 가운데, 어두운 비밀로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세 자매의 친척과 관계자들도 이곳을 찾는다.

세 자매의 조카 류스케, 그의 매력적인 아내 사쿠라코, 사쿠라코의 남동생 도키미쓰, 세 자매 중 둘째 니카코의 딸 미즈호, 미즈호의 매니저 사키, 그리고 그들을 모두를 지켜보는 교수 아마치 등. 만찬 석상에서 세 자매는 언제나 자신들이 어린 시절 겪었던 사건들을 청중들에게 들려주곤 한다.

허구인지 사실인지 분간이 안가는 그 이야기의 끔찍함과 잔인함에 사람들은 경악하거나 의혹을 느낀다. 그런데 올해에는 유달리, 무언지 모를 불길한 기운이 호텔을 잠식하고 있다. "악의가 이곳을 뒤덮고 있어"라고, 모두들 중얼거린다. 이제 이곳에서 누군가가 살해당하고야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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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의 마지막 장미>(온다 리쿠 지음, 김난주 옮김, 재인 펴냄). ⓒ재인
2004년에 출간된 온다 리쿠의 스물여섯 번째 작품 <여름의 마지막 장미>(김난주 옮김, 재인 펴냄)는 온다의 소설 중 '어른스러운' 계열에 속한다. 본래 온다 리쿠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10대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10대가 주인공이거나 혹은 10대 시절의 기억에 사로잡힌 채 영원히 그 안에 갇힌 어른-아이들이 주인공이거나.

<여름의 마지막 장미>의 등장인물들 역시 온다 리쿠 특유의 '살아남은 아이들', 작가 본인의 표현에 따르면 "온갖 시련을 견뎌내고 남은 아이들"로부터 출발하지만, 의외로 어린 시절 감수성에서만 맴돌지 않는다. 전체적인 톤은 꽤나 건조하고 차갑다. 아마도 그건 <여름의 마지막 장미>가 애거사 크리스티 계열의 고딕 미스터리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폐쇄된 저택에서 벌어졌던 4년 전 살인사건의 전말을 캐 들어갔던 <목요조곡>(김경인 옮김, 북스토리 펴냄) 역시 그랬다. <목요조곡>과 <여름의 마지막 장미> 두 편 모두 어른들이 주인공이라는 것 외에도 과거의 사건이 기억의 교묘한 조작에 의해 전혀 다른 각도로 재조명될 수 있다는 트릭을 구사하는 미스터리 장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물론 온다 리쿠가 정통 미스터리 작가가 아니라는 건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녀의 본령은, 그리고 그녀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아름답지만 무정한 소년소녀들이 비밀스런 악의를 품고 그들이 속한 세계에 조금씩 치명적인 균열을 내가는 과정을 묘사하는 고딕-순정-로망에 가깝다. 다시 말해 고딕 로맨스 풍 줄거리에 과거라는 한정된 시공간에 집중한 채 '그때 그 죽음의 기억'이 어긋나있고 감춰져있다는 미스터리를 기분 좋게 한 겹 겹쳐둠으로써 고딕의 향미를 더하는 쪽이다.

알랭 로브그리예의 시네-로망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알랭 레네는 이것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작가 스스로 밝힌 것처럼, <여름의 마지막 장미>는 행위의 반복을 통해 환상과 현실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는 과정에 더 집중한다. 과거 누군가의 죽음에 관한 비밀도, 6개의 챕터마다 자연스럽게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하나씩 밝혀진다. 미스터리 구조를 차용했으나, 죽음의 비밀이 밝혀진다고 해서 대단히 달라질 건 없다. 죽은 이는 말이 없고, 살아남은 등장인물들은 변함없이 권태롭고 호사스런 일상을 영위한다.

온다 리쿠의 소설을 읽는다는 행위는 세상의 대단한 진리나 새로운 시각을 맛보기 위함은 결코 아니다. 그녀의 소설은 그야말로 읽는 쾌감에 집중해야 한다. 글자를 눈으로 더듬으며 이 단어들이 상찬하는 요염하고 은밀하고 탐미적인 어떤 세계, 서양을 배경으로 한 일본 순정만화가 그러하듯 미묘하게 양쪽의 특성이 뒤섞인 세계에 대한 황홀한 동경을 심어주는 텍스트기 때문이다.

더불어 일본의 수많은 대중 소설이 그러하듯 연재를 통해 장편으로 묶여 나오기 때문에, 매 장마다 긴장과 기대를 자아내는 극적인 순간 즉, '클리프 행어(cliff hanger)'가 충분히 제시되고 독자들로 하여금 마지막 장으로 빠르게 전진할 수밖에 없는 긴장감과 오금저리는 조바심으로 충만하다. 그것이 온다 리쿠의 소설이다.

하지만 <여름의 마지막 장미>는 독자의 그런 설렘을 어느 정도 차단하는 편이다. 이를테면 <여름의 마지막 장미>를 읽을 때, <맥베스>의 세 마녀와도 같은 세 자매가 꾸며내는 이야기가 더 다채롭길 바라는 건 온다 리쿠의 최고작 <삼월은 붉은 구렁을>(권영주 옮김, 북폴리오 펴냄)의 애독자라면 당연한 심리다.

그러나 온다 리쿠는 세 자매의 과거가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친척과 지인들의 삶을 더 주목한다. 밝혀내야 할 과거 비밀의 부피는 예상보다 작았고, 등장인물은 현재 삶을 조금 더 낫게 영위하는 쪽에 더 관심이 쏠려있다. 매 챕터마다 과거에 잠시 몸을 담갔다가 현재로 돌아오는 등장인물들의 패턴이 반복되다보니, 종국엔 영화 속 주인공들이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것처럼 보였던 마리앙바드의 정원에 온다 자신도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

알랭 로브그리예와 애거사 크리스티의 세계에 어중간하게 걸쳐, 다소 진지한 엔터테인먼트 문학의 가능성을 실험하고자 한 것일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온다 리쿠만의 기묘한 비일상의 세계를 사랑했던 이들에게, <여름의 마지막 장미>는 <금지된 낙원>(현정수 옮김, 황매 펴냄)처럼 너무 많이 나가지 않았지만 <유지니아>(권영주 옮김, 비채 펴냄)처럼 숨 막힐 듯한 긴장감과 격정을 주지 않는, 애매한 중간에 위치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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