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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못 따라가는 아이…병에 걸려서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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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못 따라가는 아이…병에 걸려서라고요?

[민들레 교육 칼럼] ADHD에 관한 불편한 진실 下

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약물치료, 과연 최선일까? 혹시 학교를 위한 최선은 아닐까? 부모의 불안 심리를 이용한 불안 마케팅과 맞물려 ADHD 시장은 점점 커지고 있다. 어쩌면 ADHD는 애초부터 실체가 없는, 불안이 만들어 낸 상상 속 괴물인지도 모른다. 개인의 주의력 결핍과 과잉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인간에 대한 이해 결핍, 과잉 불안이 빚어낸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호노스 웹에 의하면 ADHD로 진단 받는 아이의 대부분은 창의성, 직관력, 민감한 감수성, 높은 에너지 수준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런 성향을 지닌 아이들일수록 지금의 학교 시스템에 맞지 않아 오해와 고통을 받고 있다. 부모들은 아이가 학교에서 뒤처지고 사회에서 낙오자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약물치료를 받는다.

'스스로 서서 서로 살리는 교육을 여는' 격월간 <민들레>는 올 한 해 이처럼 왜곡과 편견으로 얼룩진 ADHD 문제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 첫 발걸음으로 책 <ADHD는 없다>를 펴낸다. <ADHD는 없다>의 저자 김경림 씨는 아이가 ADHD 진단을 받은 일을 계기로 삶의 방향과 태도를 바꿨다. 현재 그는 학교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과 그 부모들을 위한 블로그 'ADHD로부터 아이 구하기'와 혼자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싱글맘을 위한 블로그 '마리네 삼층집'을 운영하고 있다. <편집자>

우리 아이는 초등학교 1학년 때 ADHD 진단을 받았다. 담임선생님으로부터 "ADHD가 의심되니 병원에 한번 가보라"는 말을 듣고 병원에 갔다. 의사는 만난 지 15분 만에 진단을 내리고 약을 처방했다. 나는 그 약이 어떤 약인지 상세히 물었다. 그 약이 원인을 치료하는 약이 아니라 단지 행동을 조절하는 일시적인 각성제이고, 그 부작용으로 잘 못 먹고 잠을 못 잘 수도 있다는 소리를 듣고 나니 도저히 아이에게 먹일 수가 없었다. 약물치료 외에 다른 치료방법이 있는지 물었더니 ADHD 치료는 약물치료가 기본이 되어야 하고 거기에 보조적으로 행동치료나 심리치료가 병행될 수 있다고 했다. 그 후 다시는 병원을 찾지 않았다.

처음에는 단지 약물치료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다른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숱한 책들을 찾아 읽고 공부를 하다 보니 명쾌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ADHD는 병도 아니고 장애도 아니라는 것, 그냥 아이가 가진 어떤 특징이고 성향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어떤 측면에서든 '대다수의 아이들과 다른' 아이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어떤 아이는 절대음감을 가지고 태어나고, 어떤 아이는 놀라운 통찰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예를 들어, '착하고 수동적이고 갈등을 피하고 싶어 하고 말과 행동이 느리고 소극적인' 특성을 가진 아이들을 모아서 어떤 병명을 붙인다면 어떻게 될까? '왕따 유발자'와 같은 부정적인 가치가 들어간 이름으로 분류해서 비정상으로 취급하며 병원으로 보낸다면? 그래서 그 아이들이 비정상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증명해야만 한다면? 지금 ADHD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들이 딱 이렇다.

ADHD를 병이나 장애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미 많다. 이 아이들의 남다른 재능과 장점에 주목하는 학자들도 많다. 나는 아이를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오랜 시간 지켜보며 키운 엄마로서 그들의 관점에 너무나 깊이 공감한다.

ADHD로 진단받는 아이들은 창의적이고, 사람의 진심을 꿰뚫어보는 직관력이 있고, 정서적으로 민감하고, 에너지가 많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사실은 '이런 특성을 가진 아이들이 ADHD 진단을 받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해야 더 정확할 것이다. 창의적인 아이들은 틀에 박힌 수업을 따라가는 것 자체가 힘들고, 이미 정해진 답을 알아맞히는 식의 공부를 하기가 매우 힘들다. 무의미한 반복과 획일적인 지시에 따르는 일이 창의성을 가진 아이들에게는 엄청나게 힘든 일이다. 이렇게 힘든 일을 견디고 있는 데 따르는 대가는 오히려 무능하고 열등하다고 평가받고 소외되는 것이다.

이 아이들은 직관이 뛰어나고 정서적으로 민감하기 때문에 일부러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사람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간파하는 능력이 있다. 따라서 부모나 교사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여과 없이 알게 되고 그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 정서적으로 민감한 아이에게 그 고통은 대단히 견디기 힘든 것이고, 그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방어기제를 작동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부주의로 인한 실수, 과제 수행의 어려움, 산만한 행동, 충동적이거나 돌발적인 행동, 상식에 맞지 않는 행동 등으로 나타난다. 이 아이들은 어른의 권위에 의해 또는 시스템에 의해 자기 가치가 과소평가되거나 자기 존재가 거부당하는 데 대한 자각도 빠르고 정확하다. 이 아이들은 이런 자각을 매우 고통스러워하고, 한계에 부딪쳤을 때 분노를 폭발하기도 한다.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이 아이들에게 ADHD라는 진단을 내리고 약물을 투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고통과 절망, 분노 속으로 이 아이들을 밀어넣는 일이다.

이 아이들을 보호하고 도울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아이를 독립된 존재로서 존중하는 것이다. 아이의 가치를 알아봐주고 그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 그거면 된다. 직관이 뛰어난 이 아이들은 부모가 자기를 알아주는지 아닌지, 인정하는지 아닌지 그냥 안다. 그리고 그걸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거기서 시작된 문제였기 때문에.

아이를 권위로 굴복시키거나 복종시키려 할수록 사태는 더 악화된다. 부모가 아무리 아이를 위해 애가 닳고 마음을 쓴다 해도, 아이를 통제의 대상으로 놓고 '잘했어/잘못했어', '맞았어/틀렸어', '옳지/안 돼'라는 식의 태도로 대한다면 어림도 없다. 나는 내 아이를 학교에서 요구하는 이른바 '정상적인' 아이로 고쳐보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아이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자기 고유의 것을 잘 지키면서 건강하게 자랄 수 있게 해주는 게 부모로서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약은 애초부터 단 한 알도 먹인 적이 없고, 행동치료도 받은 적이 없다. 아이를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아이에 대해 더 잘 알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아이와 같은 편이 되자, 아이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본래의 자기 자신을 찾아가기 시작했고, 놀랄 만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협력자가 되었다. 대상이 아니라 주체가 되었고, 엄마와 동지 같은 관계, 협력자 관계가 되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났고, 아이는 지금 중학교에 들어가서 학교 생활도 명랑하고 씩씩하게 잘하고 있다. 학기마다 공개수업이나 학부모 면담에 가서 담임선생님을 만나보면 '어른스럽다', '생각이 깊다'는 칭찬 외에는 다른 얘기가 없다. 몇 년 전 경험이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학교 선생님들은 원래 학부모 앞에서 이렇게 칭찬만 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너무 다른 경험을 한 셈이다. 지금 선생님들에게 '사실은 이 아이가 몇 년 전에 ADHD 진단을 받은 적이 있다'고 얘기해주면 아마 다들 깜짝 놀라리라. 최근 몇 년간의 담임선생님들과 초등학교 저학년 때 담임선생님들을 한번 만나게 해주고 싶다. 정말, 진심으로.

우리 아이가 예전에는 다른 아이들과 달랐으나 지금은 다른 아이들과 똑같아졌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 아이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냥 있는 그대로 자기 자신일 뿐이다. 예전에는 뭔가 잘못된 걸 고치려고 애를 썼던 것이고, 지금은 자기가 가진 성향과 자질을 최대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스스로 이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예전에는 없었고, 지금은 생긴 것뿐이다.

나는 아이와 함께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정말 귀중한 깨달음을 얻었다.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 언제나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는. 눈앞에 드러나는 현상에 초점을 맞추면 현상 그 너머, 그 안쪽 깊은 곳에서 정작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일 수 있을 때 가장 행복하고 편안하다는 것, 사람은 누구나 편안하고 충만한 상태에서는 자신과 주변을 이롭게 하는 방향으로 에너지를 발산하게 된다는 것, 이것이 본질이다.

우리 아이가 겪은 이 모든 일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ADHD는 약물치료가 아닌 부모와 환경의 변화로 충분히 극복될 수 있다'고 봐야 할까, 아니면 '애초에 ADHD가 아니었다'고 봐야 할까. 어쨌든 둘 중 하나일 것이다. ADHD였다면 약물치료 없이 좋은 결과를 본 사례가 될 테고, 만약 ADHD가 아니었다고 한다면 오진으로 인해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받은 사례가 될 것이다. 만약 우리 아이가 잘못된 진단으로 인해 몇 년간 약물을 복용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그 약 때문에 나은 것이라고 할 테니 억울한 약물복용의 피해를 증명할 방법은 없는 셈이다. 실제로 이렇게 억울하게 약을 먹고 있는 아이들이 많을 것이다.

ADHD 유병률은 전체 학령기 아동의 7.6퍼센트가 넘는다고 하고, '조용한 ADHD'니 '성인 ADHD'니 해서 ADHD는 무슨 유행병처럼 점점 더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이것은 ADHD만 따로 떼어서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더 큰 맥락에서 사회현상으로 볼 필요가 있다. ADHD가 병인가 병이 아닌가를 두고 토론하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양악수술을 두고 사각턱이 정상이냐 비정상이냐 논쟁하는 것이 무의미하듯 말이다. 고통스럽고 위험하고 불필요한 수술이라고 아무리 경고해도 수술을 받겠다는 수요가 끊이지 않으면 그 수술의 타당성이나 위험성에 대한 논의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ADHD가 병이든 아니든, 그 약이 어떤 약이든, 그런 문제들이 전부 뒷전이 될 만큼 부모들을 압도하는 것은, 어쩌면 '내 아이가 이 사회에서 뒤처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남들은 네다섯 살 때부터 영어유치원에 보낸다는데, 4학년 성적이 대학을 결정한다는데…,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가 학교 수업 따라가는 것조차 힘들다는 소리를 들으면 부모는 불안에 휩싸이게 되고, 당장 눈앞의 문제를 없애줄 수 있는 해결책에 의지하고 싶어진다. 초등학교에 입학시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이가 학교 다니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소리를 들으면 부모는 불안을 넘어 공포를 느낀다. 이대로 뒀다가는 영영 이 사회에서 낙오자가 될 것만 같은 공포에 휩싸인다. 'ADHD는 질병이나 장애가 아니다. 학교교육이 아이에게 잘 맞지 않을 뿐이다'라고 아무리 얘기해 봐야 부모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그게 병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인가. '아이가 학교교육에 맞지 않는' 바로 그것이 무시무시한 문제인데….

부모의 이런 불안 심리에 기반해서 ADHD 시장은 점점 더 커져간다. 신경정신과는 물론이고 한의원까지 이 시장에 뛰어들어, 좌우뇌 불균형이 ADHD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침술이나 한약으로 ADHD를 고칠 수 있다고 광고하는 한의원들이 넘쳐난다. ADHD 치료비로 몇 천만 원이 들었다는 사례가 보도되기도 한다. 부모의 불안과 이를 이용한 불안 마케팅이 서로 맞물려 ADHD는 실제 이상으로 부풀려졌다. ADHD는 애초부터 실체가 없는, 불안이 만들어낸 상상 속의 괴물인지도 모른다. ADHD는 개인의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인간에 대한 이해 결핍, 과잉 불안'이 만들어낸 문제라고 봐야 한다.

* 위의 글은 <민들레> 85호 "교육, 마을에서 길을 찾다"에 실린 글입니다. (☞<민들레>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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