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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기를 끝내며 (2)

[김정헌의 '예술가가 사는 마을']<42>

모든 것은 변한다. 진화하기도 하고 퇴화하기도 한다. 정권이 바뀌면 이 변화의 강도가 더 세게 느껴진다.

이명박 정권으로 바뀌면서 내 개인 신상에도 폭풍이 몰아쳐 위원장으로부터 해임을 당했지만 나 같은 경우는 아주 약과다. 사회 곳곳에서 신음소리가 낭자하다. 광우병 사태를 비롯하여 용산 참사, 쌍용차 사태, 4대강 살리기로 포장한 4대강 죽이기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끔찍한 사건 사태들이 줄을 이었다.

초기 내각을 구성할 때부터 '강부자, 고소영' 인사로 온 국민의 원성을 사더니 이번 개각에서는 그야말로 부정부패로 얼룩진 인사들을 내세웠다 자진해서 철회하는 개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불공정 사회'의 표본을 스스로 들어낸 것이다.

이 정권은 대놓고 거짓말을 일삼는다. '반서민'으로 일관하면서 '친서민'을 내세운다. 그냥 토건 삽질에 불과한 국책사업을 꼭 '녹색성장'이라고 이름 붙여 국민들을 헷갈리게 한다.

대통령부터 자기 자신이 '불공정'의 화신이면서 '공정'을 내세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문제가 있고, 다른 나라들에 비해 검역 조건을 불리하게 협상하면서도 그렇지 않다고 국민들을 속인다.

최근에 일어난 '천안함 사건'도 그렇다. 과학자와 전문가들이 나서서 제기하는 의문들을 제대로 해명하지 않고 초기에 발표한 대로 북한의 소행으로 몰고 간다.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과학적이고 투명한 설명이 없다. 이렇게 발표했다 불리하면 또 저렇게 뒤집는다.

4대강 사업도 보를 만들어 흐르는 물을 가두어 놓으면 강이 죽는다는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막무가내로 공사를 강행한다. 시민사회뿐만 아니라 종교계와 예술계가 다 나서서 말려도 소용이 없다.

삽질 귀신에라도 씐 모양이다.


이렇게 사회가 온통 소용돌이치는 데 한가로이 웬 '마을' 타령이냐고 할지 모르겠다.

애초에 '예술과 마을 네트워크'를 만들면서 예술을 통한 마을의 활성화와 마을 공동체의 복원을 목표로 내세웠다. 마을공동체가 무너진 채로는 아무리해도 사회가 발전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가장 하부의 사회 단위인 마을이 죽어 있으면 그 위로 구축된 사회는 어떻겠는가?

여러 번 밝혔듯이 이 '마을의 죽음'은 이미 오래 전부터 계속되었다. 일제 식민지에서의 수탈과 강압으로 전통적인 마을의 두레 공동체는 깨어졌으며, 해방공간에서의 좌우대립과 6.25 전쟁으로 인한 마을의 파괴, 박정희시대의 산업화로 인한 농업 인구의 도시집중, 마을의 공동화, 새마을사업으로 인한 전통적인 가치의 붕괴 등으로 인해 마을은 점점 더 파괴되어 왔다.

새로운 세기라는 2000년대 들어오면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의한 농업과 마을의 붕괴는 더욱 가속화 되고 있다.

한 세기 이상 붕괴되고 해체되면서 마을은 자본의 약탈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이제 더 이상 약탈할 것이 없게 되자 국가와 자본은 마을을 자연사하도록 방치해 놓고 있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는 오묘하다.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듯이 보이는 마을들은 오히려 자본의 약탈 대상으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그런 조짐이 여기저기 보인다.

우리의 예술과 마을 네트워크 활동도 그러한 조짐의 일부다.


내가, 또는 마을을 생각하는 예술인들이 내건 '예술을 통한 마을의 활성화'는 사실 '마을을 통한 예술의 활성화'에 다름 아니다.

진정한 예술인들은 중심이 아닌 곳을 본다. 버려지고 죽어가는 뭇 생명들을 본다. 낯선 타자들을 본다.

우리는 변두리에서, 저 낮은 곳에서 무한한 생명력을 얻는다.

예술가들이 듣고 보고 생각하면 거기에 상상력이라는 생명이 움튼다. 마을에 방치된 독거노인의 중얼거림에서 밑에 깔려 있는 미세한 삶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 가끔씩 흥이 올라 어깨가 들썩이는 노인네의 몸짓에서 우리는 그 동안 숨죽여 온 그들의 신명을 읽을 수가 있다.

특히 그들이 살아 온 내력(이야기)들은 예술가들의 내면에 죽어 있는 삶의 유전자들을 다시 일 깨운다. 우리가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때 화자나 예술가들의 내면(감각)은 서로 소통한다.

예술가들이 마을을 치유하는 게 아니라 마을이 예술가들을 치유한다. 우리가 마을에 아직도 남아 있는 가치와 자원을 발굴하고 기록하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서 우리는 그 것을 빌려 우리 예술가들의 가치와 자원으로 삼으려고 한다. 그러므로 마을은 메마른 예술가들의 샘에 물줄기를 갖다 대 '야생의 감각'을 되살리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확신을 나는 가지고 있다.

여기에 예술과 인문학이 왜 필요한지를 역설한 나이젤 비거의 글(녹색평론 114호 <대학은 무엇 때문에 있는가?> 중에서 인용)을 참고로 싣는다.

"예술과 인문학이 가져다주는 비할 바 없이 귀한 선물은 그것이 낯선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는 것이다. (…중략…) 또한 예술과 인문학은 우리를 낯선 세계로 인도할 뿐 만 아니라 그 낯선 세계를 잘 다룰 수 있도록 가르쳐준다는 것이다."

그렇다 이미 도시생활에 익숙해져 우리에게 낯설어지고 타자화 된 마을에서 우리 예술가들은 다시 판을 벌려보고자 한다.

자! 마을 속으로…


그 동안 '예술가가 사는 마을'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적지 않은 답사기를 연재했다. 엉성한 글 솜씨에 독자들의 짜증스러운 반응도 예상되었으나 그래도 우리 모두가 마음에 그리는 사회의 원형 '마을'에 대한 답사기라 대부분 격려차 좋은 말씀들을 해 주셨다.

이를 바탕으로 정말 꾸준히, 그리고 천천히 예술과 마을이 상생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답사 중 만났던 예술가와 마을주민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앞으로는 '마을에서 바라 본 세상'을 틈나는 대로 글을 올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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