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7년 전 이런 산과 강으로 둘러막힌 곳에서 신라 경주의 역사 900년이 펼쳐졌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땅은 멀리 있고 백제는 그 자취가 많이 흩어졌다. 하지만 한때 역사의 승자였던 신라의 자취는 '알'의 시작서부터 말년의 흐드러진 풍류가 벌어진 포석정 자리까지 많이 남았다. 불교문화의 정수 불국사와 석굴암은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됐다.
▲ 경주박물관에서 본 천마총출토 달걀들. 회색 토기에 담긴 1500년전 달걀은 박혁거세 석탈해 김알지 같은 신라인을 상기시켰다. ⓒ 이순희 |
경주박물관에는 몇 년 전만해도 못 보던 전시품들이 순환 전시되거나 새로 발굴되면서 처음 보는 유물들이 많다.
한 소년이 "달걀 세 개는 어디 있어요?" 하고 분주히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천마총에서 토기에 담겨져 나온 1500년 전의 달걀 - 회색 장군토기에 얹혀 하얗게 빛나는 세 개의 달걀은 박혁거세부터 석탈해 김알지 같은 신라 초기의 인물들이 모두 알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보기에 경이로웠다. 이런 유물을 가진 나라가 또 있을까?
3세기 유물, 투명하게 빛나는 커다란 수정 목걸이는 최근 한국문화재 보호재단에서 발굴했다. 얼마나 단순하고 예쁜지 보고 또 보고 즐거웠다. 아마 국가적 보물이었을지 모른다. 금의 바다를 이룰 만큼 유명한 금관 금귀걸이 등은 여전히 황홀했다. 말 관련 유물이 점점 많아지는 게 보였다.
▲ 3세기 신라의 수정목걸이.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최근 발굴했다. ⓒ이순희 |
전에는 경주에 올 때마다 이 비천상 탁본을 샀다. 비천상 2개의 동판을 만들어 두고 일일이 손으로 두들겨 탁본한 것인데 두 비천상의 꽃줄 무늬가 약간씩 다르다는 것을 이 탁본을 보면서 알았다.
밤에도 새벽에도 계림 숲에 갔다. 그 곳은 신라의 시작을 확인해주는 현장이기도 했다. 신라궁궐 반월성에 연이은 7000여평(2만 3023㎡)의 평지에 1000~2000살이 되리라는 회화나무 단풍나무 거대한 고목 등 100 그루 가까이 남아 있다.
▲ 계림 숲의 비각(김알지 사당). 고목들이 에워싸고 있다. ⓒ이순희 |
▲ 계림 나무새로 보이는 내물왕능. 김알지의 후손으로 김씨성 신라왕이 된 사람이다. ⓒ이순희 |
오래된 나무의 구부러진 모양새가 세월을 말해주고 뿌리가 줄기처럼 돼서 땅에 드러나 보여 나무 전체의 아름다움이 보이고 강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그 새로 냇물이 흘렀다. 공기는 상쾌하고 김알지의 사당인 팔각정이 담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그런데 그 조금 옆에 공중화장실이 있다).
▲ 내물왕능과 고분 뒤로 보이는 계림숲 ⓒ이순희 |
황금궤 속에 알로 들어있음을 닭이 알린 신성한 장소 8각정, 그의 후손으로 김씨 성으로 연달아 신라왕권 시대를 연 내물왕의 무덤이 계림 숲에 같이 있다.
그 구도는 애초부터 의도적인 배치 같았다. 밤이었지만 숲 밖으로는 큰길로 지나는 수많은 관광객들의 행렬도 보이고 환한 조명을 받는 첨성대와 각종 조명 불빛으로 숲속에 갇히는 느낌은 없었다. 1965년 처음 계림을 지나칠 때는 언뜻 거칠게 보였다. 숲이 감춘 신비로운 무엇이 있잖을까 늘 궁금했어도 이곳을 천천히 걸어볼 여유를 내지 못했다. 지금은 큰 나무를 보는 것, 계림이라는 것만으로도 어느 코스와 다르다.
▲ 밤에 보는 내물왕능과 고분 뒤편의 계림숲 ⓒ이순희 |
▲ 밤에 보는 계림 ⓒ이순희 |
백마를 통해 박혁거세가 '알'로 등장했음을 알린 나정은 계림에서 남쪽으로 2km 떨어져 오릉옆 길가에 있다. 여기도 박혁거세의 탄생과 죽음이 한자리에 나란하고 그의 정치세력을 상징하는 6촌부 촌장을 받드는 양산재 건물이 주변에 있다. 하지만 나정에는 계림의 오래된 숲같은 분위기는 없고 규모도 작고 오랜동안 버려진 곳처럼 보였다.
순조가 1802년 여기에도 계림에 세운 것 같은 신라시조 유허비를 세웠는데 순조때 박혁거세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뭐라도 나와 있으려나 직접 보고 싶지만 한문글귀는 알아보기 어려웠다. 최근 몇년새 발굴작업이 있어 우물과 팔각정 건물터가 확인됐다.
▲ 박혁거세가 등장한 곳 나정. 최근 발굴하면서 우물과 팔각정터를 찾았다. 오릉과 양산재 등 박혁거세 관련 유적들이 있는 탑동에 있다. ⓒ이순희 |
알에서 나온 신라의 세 인물은 각각 상징하는 세력이 다르다. 박혁거세는 말, 그중에서도 백마로 배경을 삼았다. 무속적인 지배논리와 함께 기마군인이라는 실전적 느낌이 온다.
그의 정치 배경에는 6촌부의 의결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석탈해는 재상인 호공의 집터 반월성을 뺏어가질 때 자기네가 '조상대대 대장쟁이'라고 속여 성공했다. 철기와 연관된 세력을 내세운 것인지 모른다. 금을 상징하는 김알지의 등장은 탈해에게 집을 뺏긴 호공에 의해 이뤄졌다. 날 때부터 황금상자 속에 들어있었다는 신화로 무장된 김알지는 신라를 오늘날 금의 나라로 인식케 하는 금제련과 관련된 세력일수 있다.
박혁거세, 석탈해 때부터 재상을 지낸 인물로 역사서에 나오는 호공은 아주 흥미롭다. 어떠면 신라 권력투쟁의 한 핵이었을 것도 같다. 결국 금을 다루는 일파 김알지의 후손들이 득세해 말(馬)의 박씨, 철기의 석씨를 제치고 왕권을 대대손손 차지했다. 17대 내물왕은 13대 미추왕 이래 김 씨 신라왕권의 세습체계를 이룩한 업적으로 직계 조상인 김알지 옆자리에 묻혔나 보다.
조선시대 종묘가 궁궐인 창경궁 옆에 붙어있는 것처럼 계림도 반월성에 붙어있는 신성한 곳이다. 고대 신라의 말, 철기, 금이 상징하는 지배논리가 오늘날에도 드러나는 것을 보면 역사는 너무나 흥미롭다. 계림에는 탄생과 죽음과 권력투쟁의 신라사가 숲의 공기 중에 스며있다.
▲ 계림 숲에 흐르는 냇물과 숲밖으로 보이는 첨성대 ⓒ이순희 |
반월성 주변으로 볼 데가 많았다. 왕권이 상징하는 모든 권력기구와 귀족적 생활 유적들이 반월성 주변에 많이 있어 이 지역은 계속해서 몇 번씩이나 지나쳐갔다. 8월, 더운 날씨 때문인지 밤늦게 나와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왕권에 필수적인 천문권력의 도구 첨성대도 큰 길가에 마치 불켜진 화병처럼 보였다.
첨성대에 관련된 돌의 숫자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범상함을 넘는 과학의 논리가 느껴졌다. 4계절, 12달, 24절기, 362 음력 1년 일수와 365-366 양력일수에 맞춰지는 돌, 정확한 4방위, 네모와 원 등.
세상에 둘도 없는 이런 유적보기를 '돌'같이 하던 시절, 첨성대 옆으로 마구 지나다니던 차의 진동으로 첨성대가 10도나 기울어졌다. 사람들이 놀라서 반대편으로 잡아당겨 지금은 5도만 기울어져 있다는 전문가 해설을 보았다. 그때 광경이 어땠는지 생각하는 게 첨성대 보존에 무슨 도움이라도 될까. 그러나 첨성대는 이제껐 단 한 번도 공식절차를 거쳐 국가적으로 보수된 적이 없다.
기이한 것은 경주를 다니는 동안 정보수색을 공들여 샅샅이 하지 않는 한 상식적 문화재 해설 이상의 내용은 하나도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길에서 보면 약간 떨어져 첨성대의 한 면만 보이지만 입장료를 내면 첨성대 주변을 돌아가며 가까이서 볼 수 있는데 그게 전부였다. 무얼 좀 깊이있는 사실을 쉽게 알려주면 안되는 것일까.
너무 더워 '아이스께끼'를 먹으면서 첨성대 옆 넓은 벌판을 지나갔다. 조명 불빛 때문에 벌판에 가득한 달빛의 교교함은 없지만 반월성 숲이 저만치 보이는 곳 전체가 온통 황화코스모스 황갈색 꽃이 가득한 신라의 달밤이었다.
입구의 가게에서 찬물이랑 기념품을 파는데 천마도가 그려진 손수건이 있었다. 그걸 들고 보니 천마도의 백마가 옆에서 달릴 것 같은 상상이 즐거웠다. 근년에는 여기에 가끔 몽고사람들과 말이 초대돼 와서 겔(몽고주택)을 세우고 행사도 벌였다. 경주에서 말은 이곳 저곳 모습을 나타내는 중요한 존재다.
경주행은 열기를 머금은 발걸음으로 신라의 달밤을 걷는 데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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