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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후계체제, '인물'과 '현실'이 빚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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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후계체제, '인물'과 '현실'이 빚어낸다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한반도포커스'] 김정일 후계의 경험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가 발간하는 <한반도포커스> 9호(2010년 9·10월호)를 전재합니다.

<한반도포커스>는 극동문제연구소의 교수진과 외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한반도 문제 관련 정책소식지입니다. 이번 9호는 '북한의 후계체제 : 현황과 전망'을 주제로 5편의 글이 실렸습니다. 9월 첫째 주 동안 매일 1편씩 소개됩니다.

1972년 설립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는 북한·통일 문제에 관한 연구와 정책 제안 활동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는 최고의 민간 연구기관입니다. <편집자>


<전체 내려받기>

제1호(2009년 5~6월호) 북한의 미래와 한반도

제2호(2009년 7~8월호) 2차 북핵실험 이후 한반도 정세

제3호(2009년 9~10월호) 한반도 정세, 국면전환은 가능한가?

제4호(2009년 11~12월호) 북핵문제 해결의 전망과 과제

제5호(2010년 1~2월호) 2010년 북한 신년 공동사설과 한반도


제6호(2010년 3~4월호) 남북정상회담, 가능성과 조건

제7호(2010년 5~6월호) 천안함과 6자회담 : 전망과 과제
제8호(2010년 7~8월호) 임기 중반 이명박 정부의 외교안보대북정책 : 평가와 과제

제9호(2010년 9~10월호) 북한의 후계체제 : 현황과 전망

1. 들어가며

최근 들어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북한 후계에 대한 논의가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북한의 정치체제에서 후계 및 후계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북한의 정치체제가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유일체제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 후계체제의 향방은 북한 체제의 향방과 직결된 것이자, 동시에 남북관계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 북한에서 진행되고 있는 후계체제 구축의 과정은 외부의 관찰자들에게는 파악되기 대단히 어렵다. 그것은 북한 체제 내부의 상황을 들여다보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후계 구축의 법적, 제도적 장치가 공식적으로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적인 당 및 국가 권력의 지도자를 구축하기 위한 절차는 분명 규정되어 있지만, 북한이 주장하는 '혁명의 지도자'로서의 후계자 구축은 별도의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의 경험과 그들이 내세우는 '후계자론'을 통해 앞으로의 후계체제 구축 과정을 평가하고 예견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이 글은 김정일의 후계자로서의 선택과 후계체제 구축의 역사적 과정을 평가하고, 이에 기반하여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새로운 후계체제 구축에 대한 시사점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 후계 필요의 배경

1956년의 '8월 종파사건'은 북한 정치에서 최대의 권력 투쟁이었지만, 결과는 김일성의 절대권력이 더욱 강화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8월 종파사건'을 계기로 북한은 김일성의 역사가 전통화되고, 항일무장투쟁 세력이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1967년 '갑산파 사건'을 통해 마침내 김일성은 '수령'으로 호칭되고 그의 권위와 권력은 '도전받지 않는' 절대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 강화의 이면에는 북한 체제의 심각한 고민이 깃들어 있었다. 즉, 1956년의 종파사건은 스탈린 사후 벌어졌던 소련 및 동유럽에서의 탈스탈린주의화의 물결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핵심은 스탈린주의 지도자들의 교체였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문제는 이후에도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의 임표 반란, 김일성의 연령과 건강, 그리고 2인자를 둘러싸고 벌어진 권력 투쟁이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북한 사회주의의 미래를 둘러싼 사상투쟁이 놓여있었고,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항일무장투쟁 세력과는 달리 소련 및 동유럽의 수정주의 사조의 영향을 받은 일련의 테크노크라트의 집단적 움직임이 존재하고 있었다.

1967년의 '갑산파'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김일성 다음의 2인자를 위한 투쟁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당시 북한 사회에서 나타난 성장 이후의 부정적 효과 즉, 사회적 피로 현상,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둘러싼 노선 차이 그리고 핵심적으로는 김일성의 항일정통에의 도전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또한, 1969년에 일어난 '군부 강경파' 사건 역시 당의 유일체제에 대한 도전과 2인자를 위한 투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사건들을 맞이하면서 북한의 최고지도부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2인자의 안정적인 구축 즉, 후계체제의 안정적인 구축이 자신들이 선택한 '수령제 체제'의 발전과 지속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이었다. 특히, 중국에서의 임표 반란은 살아있는 수령에 대한 도전이라는 측면에서 항일 1세대들에게 미친 영향은 심대한 것이었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은 김일성의 이후를 책임질 후계 문제를 체제의 지속과 발전에 핵심적인 의제로 상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강력한 수령제를 고수하고 혁명의 지속성을 담보할 수 있는 후계체제의 필요성을 절실히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즉, 권력의 문제이자 동시에 발전의 문제였고, 개인주의에 대한 집단주의적 발전전략, 수정주의적 역사에 대한 혁명 전통의 역사관 확립, 그리고 경제적 실리에 대한 사상의 우선성을 담보할 정치체제 - 사회체제의 건설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보자면 김일성에서 김정일로의 후계체제의 문제는 단순한 권력의 승계를 넘어서서 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지속과 발전의 문제가 응결된 문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김정일의 후계 요건과 검증

1960년대 중후반부터의 일련의 상황 즉, 국제적인 수정주의 움직임의 강화, 중국 문화대혁명의 혼란, 북한 내부에서의 수정주의 움직임 그리고 사상투쟁의 표면화 등에 따른 변화는 북한으로서 필수적으로 맞닥뜨려야 하는 도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선택한 선택지는 확립된 '수령제' 체제를 공고히 하고, 자신들이 지향하고 있는 유일체제를 정치, 경제, 군사, 사회문화 등의 모든 분야에서 사상적, 제도적으로 구조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한 가장 시급한 과제는 곧 수령의 혁명사상과 위업을 고수하고,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즉, 유일사상체계의 연속성이자 동시에 발전·풍부화였다. 이는 또한 수령의 다음세대 즉, 혁명 2세대로부터 후계자를 선출하고 그에게 이러한 과제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북한의 혁명 1세대는 이와 같은 과제를 실현할 수 있는 인물로 김정일을 선택하였다.

김정일의 선택은 수령의 아들이라는 이점이 분명히 작용하였다. 즉, 어려서부터 혁명 1세대들과의 친분 및 그들의 정치방식에 대한 학습, 특별 교육의 혜택 등이 작용하였다. 특히, 1964년 그가 처음으로 중앙당에 발을 내디뎠을 때 그에게 직접 정치를 익히게끔 도와준 혁명 1세대의 관심은 그가 가진 최대의 자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김정일 스스로가 보여준 노력과 북한식 검증을 성공적으로 거쳤다는 점 역시 강조되어야 한다. 김정일은 특히 혁명 1세대에게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검증하여 보여주어야 했다.

먼저, 김정일은 1967년 '갑산파'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수령의 충성심과 당 조직의 운영이라는 측면에서 자신의 능력을 검증해보였다. 사실상 '갑산파' 사건은 김정일이 처음부터 조사하고, 마무리했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갑산파' 사건에 뒤이어 1969년의 군부강경파 사건 역시 김정일에 의해 조사되고, 마무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을 통해서 김정일은 혁명 1세대에게 김일성 수령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과 당 내의 수정주의적 움직임을 파악하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조직 동원 능력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1960년대 일련의 사건과 함께 당내의 무서운 신인으로 떠오른 김정일의 당의 장악과 실무 능력은 1970년의 당 제5차 대회에서 충분히 보여졌다. 숙부인 조직지도부장 김영주의 병환, 선전부장 김국태의 병환 등으로 당대회를 준비해야 할 2대 부서가 모두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김정일은 조직부와 선전부를 동시에 지도하면서 당대회를 성공적으로 준비해 나갔다. 당대회의 토론문을 일일이 검열하고, 손 보아주면서 당에 대한 지도력을 검증해 보였다.

둘째로, 그의 후계자 성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는 바로 문화선전사업에서의 성과이다. 오늘날 북한의 문화예술 분야는 그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의 문화예술 사업의 방향은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당시의 문화예술에 대한 복원이자, 이의 혁명전통화였다. 이는 단순한 문화예술작품 만들기가 아니라 바로 '항일혁명투쟁'의 사상과 역사를 전통화하는 것이었고, 곧 사상투쟁의 과정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서 김정일은 혁명 1세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이러한 업적이 후계자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김일성을 비롯한 그의 가문을 상징화·역사화하고 전국 도처에 김일성의 사적지, 유적지 등을 조성함으로써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역사를 사상예술적으로 완성시켰다. 이러한 과정은 항일혁명 1세대들에게 김정일에 대한 신뢰를 확립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1974년 2월 김정일은 정치국 위원으로 진입함으로써 수령의 후계자로 결정되었다. 그가 후계자로서 가장 먼저 수행한 일은 바로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위한 10대 원칙'을 만들고 이를 전당, 전국에 확산, 확립한 일이었다. 김정일에 주어진 과제는 수령의 유일적 영도체계 확립을 핵심으로 한 유일사상체계의 확립, 당의 조직사상적 강화, 그리고 전당·전군·전국에 자신의 후계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위한 10대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김정일은 먼저 수령에 대한 절대성, 무조건성, 신조화, 신념화 등의 소위 '충실성의 4원칙'을 확립하고 이를 생활화하도록 하였으며, 당에 대해서는 새로운 당 생활총화 체계를 확립하여 실행토록 하면서 당을 조직사상적으로 일색화하였고, 3대 혁명소조운동의 성공적인 지도와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을 통한 새로운 대중운동의 지도를 통해 세대교체와 더불어 자신의 지도력을 전 단위에까지 확립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김정일은 마침내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당의 유일한 후계자로서 공식화되었고, 공개되었다. 김일성에서 김정일로의 승계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결국 '수령' 김일성의 유일사상체계를 전당, 전군, 전국에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수령 김일성의 사상을 체계화, 이론화하는 과정을 거쳐 사상의 지도자로서 검증받았던 것이다.

1970년대 김정일의 후계자로서의 활동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의 하나는 바로 김일성의 '말씀'으로만 존재하던 주체사상을 이론화, 체계화하고 마침내 1980년대 중반 이를 체계화된 『총서』로 발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지도자는 사상의 지도자이며, 이는 후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사상의 후계자여야 한다. 북한의 문헌도 주체사상을 설명하면서 자주성, 창조성의 원리는 김일성에 의해, 그리고 의식성의 원리는 김정일에 의해 정립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주체사상의 정립 과정에서 김정일의 역할이 막중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당시 김정일에게 유일사상체계의 확립은 곧 김일성의 혁명사상을 주체사상으로 정식화하고, 이를 당의 유일한 사상으로 일색화하는 것이었다. 1970년대 '김일성주의'가 공식화되고, 80년대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김정일의 사상이론적 활동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김정일의 후계자로서의 요건은 '수령제'체제의 완성을 위해 요구되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그가 가지고 있던 비교 우위의 장점과 함께, 제기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사상이론적, 당·조직적, 그리고 군중운동에서의 활동이 혁명 1세대에 의해 성공적으로 검증 받고, 인정받았던 데에 있다.

▲ 지난해 북한 <조선중앙TV>가 25일 방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일대기를 그린 기록영화 '누리에 빛나는 선군태양'의 한 장면. 김 위원장이 아버지인 고(故) 김일성 주석의 군부대 시찰에 따라 나선 모습이다. 촬영 시기는 밝혀지지 않았다. ⓒ연합뉴스

4. 성공적인 후계와 이론의 구축

북한의 성공적인 후계체제 구축은 1980년대 김정일이 공식적인 후계자로 등장한데서 잘 드러난다. 비록 1994년 김일성 사망을 전후한 시기에 권력 지위가 하나씩 김정일에게 이양되었지만, 이미 1980년대 이후에는 김정일에 의해 북한 사회가 통치되었다고 할 수 있다. 김정일의 후계자로의 결정 시기인 1974년을 '김일성-김정일 공동정권'이라 규정할 수 있다면, 1980년을 기점으로는 '김일성은 군림하고, 김정일은 통치'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증명하듯이, 1980년대 초반부터는 김정일에게도 '영도'라는 단어가 쓰이기 시작했다.

물론, 김정일의 후계체제 구축의 과정에서도 시련은 있었다. 1975년경의 '김동규 사건'과 76년 '판문점 사건' 등은 후계자 김정일의 급진적인 활동이 반대에 부딪히고, 문제로 제기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미 1974년 결정된 사항을 되돌리기에는 김정일의 그간의 능력과 위치가 어느 정도 확고해진 시기였다. 또한, 혁명 1세대 대다수 역시 김정일에 대한 신뢰는 여전하였다.

결정적인 것은 김정일이 시련을 겪던 시기 김일성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문제 해결에 나섰다는 점이다. 후계자에게 힘을 실어주고 그의 권위를 확립하는 데 수령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험들은 후계자론을 통해서 체계화된 이론으로 확립되었다. 물론 북한에서 공식적인 후계자론을 내놓지는 않고 있지만, 사실상 김정일의 후계 경험과 수령론의 필연적인 구성물로서 후계자론이 요구되었고,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이론이 현실의 구체화된 경험을 총화한 것이라고 한다면, 구축된 이론은 미래의 행위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후계자론 역시 앞으로 북한의 후계체제 구축을 위한 '준비 - 실행 - 평가'의 중요한 이정표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현재 북한의 후계자론은 김일성에서 김정일로의 승계 경험이 총화된 것으로서 성격을 갖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를 절대화하는 것도 피해야 할 것이다. 단 한번의 경험이 보편성을 갖기는 어려울 것이며, 또한 북한이 후계자론을 공식화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이론으로부터의 자율성'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후계자론은 말 그대로 '후계자'론으로 규정되어 있다. 즉, 후계론이 아닌 것이다. 이는 후계 구축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역시 인물의 문제로 집중됨을 의미한다.

후계자론은 후계자의 자질을 의미하는 '인물론', 후계자의 지위, 역할과 관련된 '계승론' 그리고 후계자의 권력 구축과 관련된 '지도론' 등의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수령에 대한 충실성을 핵으로 하는 '인물론'이 후계자론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이에 기반하여 수령의 사상과 혁명전통을 계승·발전시키며, 수령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사업을 가장 우선적으로 수행해야 할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즉, 사상, 이론, 방법의 전 영역에서 수령의 위업을 보좌, 계승해야 한다. 그리고 이에 기초하여, '계승'을 위한 후계자의 지도체제가 요구된다. 수령의 '영도'하에 후계자는 자신을 중심으로 한 '지도체제'를 구축해야 하며, 이렇게 할 때만이 그 어떤 공백도 없이 계승이 보장될 수 있다. 따라서 후계자는 수령의 생존시에 자신의 유일지도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북한의 후계자론은 성공적인 경험에 대한 총화이자 수령론-후계자론으로 이어지는 이론적 구성물로서 위치한다. 이러한 후계자론이 앞으로의 후계구도에서도 그대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분명 수령에 대한 충실성과 현 수령 즉, 김정일의 사상, 이론적 업적을 계승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한 원칙으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5. 오늘에 주는 시사점

김정일 이후의 새로운 후계체제가 논의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김일성-김정일의 후계체제 구축의 시기와는 분명 구분된다. 시대적 배경도 다르고, 당면 과제도 다르다. 김정일의 후계체제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시기에 이루어진 것임에 반해, 지금의 후계 체제 구축은 위기의 시기에 이루어진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체제의 지속성이 안정적인 후계 체제의 확립에 있다고 한다면, 전혀 다른 방식을 시도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수령에 대한 충실성'과 수령의 사상, 이론, 방법에 대한 충실한 계승, 그리고 당을 중심으로 한 유일 지도체제를 구축해야 하는 '최소주의적 계승 원칙'은 고수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이러한 계승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당면의 과제를 해결하기 쉽지 않은 조건에서 이 모든 것을 다 충족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즉, 후계의 핵심은 '인물'에 있으며, 나아가 그 인물을 둘러싼 '세력'에 있다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새로운 후계자가 자신의 능력을 당과 대중 앞에 검증받고, 자신의 지도체제를 얼마나 제대로 구축할 수 있는가가 순조로운 후계체제가 구축될 수 있을 것인지를 결정할 것이다.

김정일의 경우, 자신의 능력을 검증받고 '유일 지도체제'의 성공적인 구축을 통해 마침내 후계 수령으로서의 지위와 역할을 부여받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새로운 후계 역시 이 과정은 필연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현재 북한 내부에서 후계체제 구축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 알기 힘들지만, 북한식 검증과 후계자를 중심으로 한 지도체제의 구축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의 결과로 그 공식화의 시기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 북한의 후계 역시 현실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되어야 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현실의 요구일 것이다. 즉, 현실에서 제기되는 문제로서 당면의 경제난 해결의 정도, 불안정한 한반도 상황의 극복, 그리고 남북관계의 미래가 후계 체제 구축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또한, 이는 앞으로 이러한 과제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가에 따라 후계자의 지도력과 그 스타일이 규정받을 것이다.

즉, 김정일이 1970년대 제기되었던 '수령제' 체제의 제도화 과제를 안고 있었다면, 새로운 후계자는 현재의 선군정치 및 강성대국 건설의 과제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가에 따라 리더십의 방향과 그 내용이 규정되게 될 것이다.

새로운 후계자에 대한 부정확한 혹은 불충분한 인물 정보에 기반하여 인물평에 머무르는 현재의 논의는 이런 점에서 북한 후계 체제에 대한 잘못된 이해 혹은 일방적 규정일 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역사적 경험, 그를 총화한 후계자론에 대한 이론적 분석과 현실에서 제기되는 과제에 대한 종합적 분석이 이루어질 때만이 '누구'인가를 넘어서서 '후계자'와 그 구조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의 '북한'과 '미래의 북한'에 접근하는 길일 것이다.

* 원제 : 김정일 후계체제의 역사적 경험: 평가와 시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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