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중순 서울에서 열렸던 국제 학술회의에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이 참석했었습니다. 키신저는 그때 미국의 힘이 쇠퇴하고 있다는 말을 했었어요. 키신저 같이 대단한 미국 중심주의자가 그걸 자인할 정도로 미국은 '쇠퇴하는 강국(declining power)'이 되었습니다. 쇠퇴라는 건 상대적인 개념인데, 중국이 '부상하는 강국(rising power)'이 되었다는 말과 표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중국의 힘은 2008년 미국발 국제 금융위기 상황에서 확실하게 확인됐어요. 우리 이명박 정부는 미국만 바라보고 있지만, 오바마 시대에 들어와서 미국은 중국의 힘이 날로 막강해져 가는 것을 더욱 실감하고 있을 겁니다. G2라는 말이 오바마 집권 이후부터 등장했잖아요.
부시 시절까지만 해도 중국이 G4, G5로서 미국을 압박할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부시와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마저도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데 중국의 협조를 받아내겠다는 엄두를 냈었습니다. 그 정도의 협조관계를 유지하면서 동북아시아의 상황을 관리할 수 있다고 봤는데, 그 후로 중국이 워낙 빠르게 치고 올라오니까, 이제는 중국 위협론이 미국 사람들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을 겁니다.
나는 오바마를 이상론자라고 봐요. '핵무기 없는 세계'를 건설하겠다고 하고 적대 국가의 지도자도 만날 수 있다고 대선 과정에서 말했습니다. 핵무기 없는 세계를 주창해서 노벨평화상도 미리 받았고, 그래서 우리도 오바마가 상값을 하리라고 기대를 많이 했는데...오바마의 그런 장미빛 공약은 사실 오바마가 미국이 지금 어떤 지경에 처해 있고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냉철한 판단이 모자라서 제시했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미국이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을 하면서 알카에다와 대량살상무기를 구실로 삼았지만, 테러집단이나 대량살상무기는 구실일 뿐이고 실제로는 다른 더 깊은 속내가 있었다고 봅니다.
미국의 중동 정책은 '오일 폴리틱스(Oil Politics)'라는 시각에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미국이 석유 공급기지인 중동을 정치적·군사적·경제적으로 장악해서 경쟁 국가들의 경제 성장 속도를 좌우하겠다는 밑그림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고 봐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미국의 국익 앞에서는 공화당과 민주당, 진보와 보수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 천안함 사건 이후 한국의 모든 요구 사항을 기꺼이 들어줬던 미국이 드디어 청구서를 내밀기 시작했다. 로버트 아인혼 미 국무부 대이란.대북 정책 조정관(오른쪽)이 지난 2일 한국에 와서 가장 관심이 컸던 주제는 대북 제재가 아니라 대이란 제재에 한국이 동참하는 문제였다. ⓒ뉴시스 |
중국 견제의 첨병이 된 한국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요새 한국을 대하는 걸 보면 자기들의 세계전략을 이행하는데 있어 한국을 첨병처럼 연루시켜 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바마 정부는 처음에는 북한에게 미북수교와 평화협정 체결을 제시하면서 북핵문제 해결을 서둘렀어요. 그리고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과 북한 때리기를 조금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대북정책 때문에 한미관계가 김영삼 정부 시절처럼 불편할수도 있다고 봤는데, 천안함 사건을 기점으로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미국은 한국의 북한 때리기에 적절히 보조를 맞춰 주면서 대중 압박을 본격화하고 있고, 이란 제재에도 동참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동맹관계가 이완될 가능성이 보이면 상대적으로 약한 국가는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방기(放棄)의 공포'에 빠집니다. 1970년대 초 미·소 데탕트, 미·중 화해로 가는 과정에서 안보 후견국가로부터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남북간에도 대화가 한때 성사됐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 소위 '방기의 공포'를 느끼는 경우 70년대 초 남북처럼 적대하면서도 서로 안전을 위해 자구책을 챙기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동맹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국가들은 동맹체제에 매달리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되면 힘을 가지고 있는 쪽의 요구를 다 들어줘야 하는 '연루(連累)의 덫'에 걸리게 됩니다. 지금 한미동맹이 딱 그 상황이에요.
물론 '연루의 덫'은 강국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한국이 북한 때리기에 미국을 끌어들이려고 하는데 미국이 한사코 외면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도와달라고 매달리면 할 수 없없습니다. 도와줘야지. 그래서 우리 속담에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 된다"는 말도 생겼을 겁니다.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이명박 정부가 대북압박을 위해 군사 시위를 하고 싶어 했는데 처음에는 미국이 별로 적극적이지 않았어요. 6월 초까지만 해도 우리 정부 당국에서는 한미 합동훈련이 곧 시작될 것처럼 얘기했지만, 미국은 준비 부족을 이유로 자꾸 미루지 않았어요? 대북 제재 문제를 놓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도 한국이 앞장서면 미국은 지지하겠다는 식으로만 말했고요.
그러던 미국이 어느 순간부터 한국의 북한 때리기에 동조하는 척 하면서 사실은 중국을 압박하는 식으로 서서히 바뀌어 갔습니다. 그걸 보면서 중국이 빠른 속도로 치고 올라오니까 미국이 드디어 중국에 대한 '예방적 공격(Preventive Attack)'을 시작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국이 더 커지기 전에 기를 꺾어 놓겠다는 거예요.
정치인류학이나 정치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면 국제정치의 세계에서 패권다툼은 어떤 점에서 조폭세계의 세력다툼이나 크게 다를 게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근 미국과 베트남 관계도 더 밀접해 지고 특히 원자력 분야에서 협력이 추진되고 있는데, 그것도 일종의 중국 포위 전략이고 예방적 조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이 북한 때리기에 우리 편 들어 주는 것을 놓고, 이명박 정부는 그걸 외교적 성과라고 말하고 있고 국민들도 대개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특히 보수적인 분들은 한미동맹이 강화되면서 북한의 굴복이나 붕괴가 가까워지고 있고, 우리 국익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국익 차원에서 보면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날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북관계 때문에 미중관계가 나빠지면서, 한국을 경제적으로 제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중국으로부터 이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은 사실 중국 때문에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중국이 한미 군사동맹에 대한 견제의 일환으로 한국에 경제적 불이익을 주면 그 파급효과는 엄청날 겁니다. 중국에 진출한 우리 기업에 대해서 중국 정부 차원의 협조가 제대로 안 이루어지면 곧바로 우리의 불이익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이게 과연 바람직한 외교정책일까요?
또 미국은 지금 이명박 정부의 북한 때리기에 동참해주는 대가로 이란 제재에 동참하라고 요구하고 있어요. 그리고 한미 FTA에서 자동차와 쇠고기 문제를 새로 협상해야 한다고 하는 등 노골적으로 압박하고 있습니다. 이건 여우 피하려다가 호랑이 굴에 들어간 셈입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는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뒀어요. 미국과 잠재적으로 불편한 관계에 있는 국가들과도 적절하게 지내면서 경제적으로 손해는 보지 않았어요. 외교라는 게 원래 그런 거 아닙니까?
그런데 너무 대미편식을 한 결과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게 된 상황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갑자기 돌아서서 미국을 허망하게 할 수는 없을 것 아닙니까? 참모들의 대외관이나 속성으로 봐도 그렇게 못할 겁니다. 연루의 덫에서 빠져 나오기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런 연유로 우리가 이란 제재에 동참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란에서 들여오는 석유가 전체 수입량의 10%인데, 이란이 우리에게 불이익을 준다면 우리 경제가 받는 타격은 상당할 겁니다.
난 리비아에서 외교관이 추방된 사건도 개별 사안이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가 미국과 너무 가까이 지내다 보니까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는 측면이 있었을 겁니다. 리비아-북한 커넥션과 관련한 정보를 수집하다가 그렇게 된 걸로 보도됐는데...미국이 리비아에서 견제를 당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운신에 여유가 있는 한국의 정보원이 미국에 협조하다가 그런 불상사가 생겼다고 봐야 하지 않나...그 역시 한미동맹 차원에서 너무 적극적으로 협조하다가 그렇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이명박 정부는 중국과 중동 양쪽에서 외교적으로 아주 곤란한 상황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아니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아주 불리해지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 지도부와 참모들의 대북관과 국내정치적으로 보수를 결집시킬 필요가 있다는 판단 때문에 이전 정부 대북정책을 뒤집고 북한 때리기를 계속하다가 이렇게 됐습니다.
개각에서도 천안함 3총사(통일·외교·국방 장관)를 그대로 둔 걸 보면, 적어도 11월 G20 정상회의까지는 5.24기조로 가겠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나아가서는 적어도 금년 말까지는 그 기조로 끌고 가겠다는 메시지라고 봅니다.
석유 적게 들여오고 판로 막히면 뭘 먹고 사나?
북한 때리기를 계속하면 북중동맹은 한미동맹에 비견될 만큼 강화될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되면 중국은 도리 없이 한국에 불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보수층에서는 중국이 안보리 상임의장국으로서 국제적 책임을 다 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지만,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국제적 책임은 그 의미와 내용이 다를 겁니다. 동북아의 대국으로서 역내 불안요소를 줄이는 것 아니겠어요? 한국과 미국이 6자회담을 미뤄놓고 북한을 압박하는 과정에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면서 중국 경제가 타격을 입는 것을 막는 것이 시급하지 않겠습니까? 국제적 책임이라는 것도 자기 이익이 우선되는 한도 안에서 규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중국으로서는 자국 경제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정세 악화를 막는 게 기본인데, 한미가 자기들의 정치·군사적 이익의 연장선상에서, 더구나 군사행동까지 하면서 중국의 협조를 바란다는 것은 그야말로 연목구어(緣木求魚)입니다.
우리는 국내시장이 작아서 수출을 통해 먹고 살아야 하는데 최대 수출시장인 중국이 우리한테 보복을 하고, 수출 상품을 만드는데 필요한 에너지가 오는 중동에서 불이익을 받는다면, 어떻게 물건을 만들고 어디에 내다 팝니까?
지금 대중 수출이 대미, 대일 수출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습니다. 일본과의 무역에서는 만성적자이고 미국과의 무역에서는 흑자를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흑자가 계속되면 무역역조를 시정하라고 당장 압박을 하고 들어오니까...
그런 점에서 우리 국민들은 이명박 정부의 외교정책에서 어디가 잘못됐는지 좀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특히 보수적인 분들도 단지 이념적인 이유로 무조건 잘 한다고 박수만 칠 수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경제적 불이익의 쓰나미가 몰려올지도 모른다는 전제하에 다시 한 번 외교정책과 대북정책에 대해 근본적으로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2년 반 넘게 제가 이런 얘기를 계속 해왔는데 드디어 문제점들이 종합선물세트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했어요.
지금 이 국면이 나중에는 어떤 식으로건 매듭이 지어질 텐데, 그렇게 되면 후세의 사가들은 아마 이렇게 쓸 겁니다. '동북아에서 2010년을 전후한 시점에 신냉전 질서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과거 2차 대전 후에는 미국과 소련이 냉전을 시작하고 버팀목 역할을 했는데, 2010년에는 미국과 중국이 외형적으로 주역이었지만, 남북한이 신냉전을 촉발했고 심화시키는 주축 역할을 했다. 거기에서 남한 정부의 대북정책과 편향적인 외교정책이 큰 몫을 했다. 물론 북한의 전통적인 벼랑끝 전술도 한 몫을 했다.' 이런 식으로 평가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 '정세토크'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 한반도평화포럼 상임위원)이 한반도 문제에 관해 자신의 경험과 견해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격주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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