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개각에서 관심을 모았던 외교·안보·통일 분야 장관들도 모두 유임됐다. 현재 대북기조를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김태효 안보전략비서관도 자리를 지켰다. 청와대 내에서조차 현인택 통일부 장관과 김태효 안보전략비서관에 대해 "북한에 대해 강경한 것도 좋은데, 목적 없이 그저 강경하기만 하다"는 비판이 나오고, 통일부에서는 '이렇게 한가한 것이 나중에 부서 폐지의 근거가 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는 말까지 나온다고 한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은 기존 외교안보라인의 유지를 선택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정부 정책이 바뀐 것도 아닌데 지금 외교안보라인을 교체하면 북한에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과의 대북 제재와 군사훈련 등이 예정된 상황에서 최소한 올 하반기까지는 대북 기조를 바꾸지 않겠다는 뜻이다.
통일부는 올해 국회에 제출한 '2009 회계연도 성과보고서'에서 "남북관계 및 한반도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했다"며 "대북정책과 관련한 주변국과의 국제공조를 강화 유지하고 새로운 남북관계 전환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자평했다. 통일부는 또한 일관성 있고 원칙있는 정부의 대북·통일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대와 공감대도 확산됐다고 평가했다. 한때 교체설이 나돌던 통일부 장관이 유임된 이유를 간접적으로나마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 이재오 특임장관 내정자가 10일 김대중 전 대통령 자서전 출판기념회에서 박지원 민주당 의원과 악수하고 있다. ⓒ뉴시스 |
'정상회담은 청와대의 일' 정리
이번 인사에 조금 다른 기류도 엿보인다. 임태희 대통령실장과 이재오 특임장관의 기용이다. 물론 두 사람의 등용에는 일차적으로 세대교체, 4대강 사업의 추진 등 국내 정치 요인이 작용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과거 대북정책 관련 입장은 현재의 대북정책 기조와 다른 측면이 있다. 임태희 실장은 지난해 10월 싱가포르에서 김양건 북한 대남담당비서와 만나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한 경험이 있다. 그는 여전히 남북관계를 풀기 위해서는 남북 정상회담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재오 특임장관 후보도 18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 워싱턴에 머물던 지난해 3월 "적절한 분위기가 된다면 북한에 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고 싶다"고 말해 정상회담에 대한 의지를 보인 적이 있다. 당시 그는 "김정일 위원장을 설득시킬 인물이 (대통령 특사로) 가야 한다"고도 했다. 천안함 사건 등으로 남북관계가 꽁꽁 얼어붙은 상황에서 이재오 특임장관 후보에 눈길이 쏠리는 이유다. 실제로 청와대는 이재오 특임장관 내정자가 남북문제도 챙길 것이라고 밝혔다.
표면적으로 통일부 장관을 유임시켜 기존의 대북기조를 유지하되 남북 정상회담의 가능성을 타진하겠다는 숨은 그림이 숨어 있는 것이다.
임태희-이재오 라인에 주목하는 이유는 지난해 말 남북 정상회담 추진을 두고 이명박 정부안에서 있던 논란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임태희 실장(당시 노동부 장관)은 두 차례 비밀접촉을 통해 정상회담의 장소와 의제(북핵과 인도적 사안)에 대해 북측과 상당한 의견 접근을 이뤘다. 그러나 이 '잠정 합의'는 현인택 통일부 장관을 비롯한 기존 대북정책 유지를 강조하는 강경파들에 밀려 휴지조각이 됐다.
이 과정에서 정부 내의 대북정책 업무와 관련된 혼선이 정리됐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 추진은 대통령의 고유 영역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통일부가 아닌 청와대에서 직접 관장하겠다는 의지를 밝혔고, 정상회담 이외에 남북관계 사안에 대해서는 통일부가 주도적으로 관장하는 쪽으로 정리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즉 정부가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하게 될 경우 그 주무부서는 통일부가 아닌 대통령의 측근이 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럴 경우 당연히 이재오 특임장관이나 임태희 실장의 역할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특히 최근 청와대는 북한이 정상회담에 여전히 의지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의 한 고위 간부는 "금강산 관광 재개, 개성공단 정상화 등을 원하고 있으며 남북 간 정부·민간 교류를 천안함 이전으로 돌리길 원한다"며 "실무회담, 장관급 회담부터 단계적으로 한 뒤에 분위기가 조성되면 정상회담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 북한의 이러한 의사는 청와대에도 전달됐다.
그렇다면 정상회담의 키를 쥐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의 의중은 무엇일까?
이와 관련해 한 대북 전문가는 "이명박 대통령은 어려운 상황일수록 위에서 만나서 한꺼번에 풀리도록 해야 한다는 뜻인 가지고 있는 것 같다"라고 밝혔다. 북한은 남쪽이 먼저 남북대화 복원의 의지를 보이고,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는 입장인 반면, 우리 정부는 언제든지 결심만 하면 정상회담이 가능하다고 보고 북한의 입장 변화가 있을 때까지 서두르지 않겠다는 생각인 것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이 대통령은 여건이 조성되면 정상회담을 할 의향을 가지고 있다"며 "그러나 현재는 북한의 버릇을 고쳐야 한다는 생각이 강한 듯하다"고 말했다.
남과 북, 당분간은 각자의 '일정표' 대로 갈 수밖에
지난 7월 9일 천안함 사건에 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의장성명이 나온 후 관련국들의 출구전략이 본격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미 국무부가 외교채널을 통해 북미접촉을 타진했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나 7월 21일 서울에서 열린 한미 외교·국방장관 회담(일명 2+2회담)에서 출구전략의 구체적 대안이 나올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한 때 외교통상부를 중심으로 우리 정부도 출구전략을 모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당시 정부의 한 고위 당국자는 "동북아에 이해관계를 가진 모든 나라가 천안함 사태에서 벗어나 정상적 상황으로 가는 게 중요하다"며 "관련국들에게 국면을 전환할 기회가 제공됐으며 북도 이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한다"라고 밝힌 바 있다. 당초 '선 천안함 대응, 후 6자회담 재개' 기조와는 뉘앙스가 다른 말이었다. 하지만 북한이 먼저 천안함 사태에 대한 사과와 책임자 처벌, 분명한 비핵화 의지 표명 등을 이행해야 한다는 통일부 등의 주장에 이 같은 입장은 곧 묻혀 버렸다.
안보리 의장성명은 "한반도와 동북아 전체에서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9항)하고 "적절한 경로를 통해 직접 대화와 협상을 가급적 조속히 재개하기 위해 평화적 수단으로 한반도의 현안들을 해결할 것을 권장"(10항)했다. 사실상 6자회담 재개를 위한 노력에 나설 것을 촉구한 것이다. 중국과 북한은 6자회담 재개를 구체적으로 제안했다. 그러나 선택의 기로에서 이명박 정부는 국면 전환보다 한미간 독자적인 대북제재, 한미합동군사훈련 실시 등 대북 강경노선을 채택했다.
이에 대응해 북한은 우리 군의 서해 기동훈련 마지막 날인 지난 9일 백령도와 연평도 방향으로 117발의 해안포를 발사했다. 이중 백령도 쪽으로 발사된 10여 발은 NLL 남쪽으로 1~2㎞ 지점의 해상에 떨어진 것으로 확인됐다.
심지어 북한은 서해 기동훈련을 비난하면서 "필요한 임의의 시각에 핵 억제력에 기초한 우리 식의 보복성전으로 진짜 전쟁맛을 똑똑히 보여줄 것"이라고 위협했다. 한동안 남북간의 군사적 긴장이 더욱 고조될 위험성이 높아진 것이다. 다만 북한은 "전쟁 위험이 떠도는 조선(한)반도에서 절실하고 긴박하게 나서는 문제는 평화적 분위기를 마련하는 것"이라며 간접적으로 대화 국면으로의 전환을 촉구해 퇴로를 열어 놓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 7일 동해에서 어업 중이던 대승호가 북한측에 나포되는 '악재'가 발생하면서 정부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긴장이 높아지고 있는 남북관계를 반영하듯 정부는 과거처럼 적십자사 측을 통해 북측에 인도적 차원에서 송환을 촉구하는 전통문을 발송하지도 못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 사건이 남북대화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견해를 내놓기도 하지만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희박하다. 오히려 북측이 남측의 경고통신을 무시하고 해안포를 무더기로 사격한 것에 대해 대응포격을 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강경한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당분간 남과 북은 서로의 일정표대로 움직일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과 미국은 서해에서의 한미 합동군사훈련 실시, 추가적인 대북 금융제재 등으로 북한을 압박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9월 초 당대표자회,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65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열병식 준비로 바쁜 일정을 보낼 것이다. 물론 북한은 미국의 대북 금융제재 발표, 서해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전후해 미사일 발사 등 추가적인 군사 행동에 나설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결국 11월 G20 정상회의, 미국의 중간선거 때까지는 대화보다는 긴장국면이 계속 될 가능성이 커졌다.
그러나 11월을 전후해 이명박 정부는 집권 하반기 남북관계를 규정할 중대한 결정의 기로에 서게 될 것이다. '압박이냐, 대화냐' 하는 선택 중 어느 쪽으로 귀결될 지는 정부 내 강온파간의 힘겨루기, 6자회담에 임하는 미국의 의지 등이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중국의 한 국제전문가는 "현재로서는 6자회담이 먼저 재개되고, 10월을 전후해 남북대화가 복원되는 시나리오가 예상된다"며 "북한은 이명박 정부의 대북 태도가 분명하게 드러날 때까지 추가조치를 유보한 채 기다릴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그는 "북측 인사와 대화를 해 보니 북한은 11월경에는 남북대화가 복원되지 않겠느냐는 분석을 하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국내의 한 대북전문가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우(대통령 직속 국가안보총괄점검회의) 의장-김태효 비서관-현인택 장관을 축으로 대북압박파와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려는 임태희 실장-이재오 특임장관 라인의 갈등이 나타날 것"이라며 "북한의 추가적인 군사도발 여부, 대통령이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올해 하반기와 내년 남북관계를 결정짓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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