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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나며 시작된 전쟁, 노근리 '기억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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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나며 시작된 전쟁, 노근리 '기억의 싸움'

[노근리, 60년 전 오늘]<5> 평생의 상처, 7월 29일

☞ <1> "비극의 시작, 7월 25일" 바로가기
☞ <2> "잔인한 폭격, 7월 26일 ①" 바로가기
☞ <3> "쌍굴에서의 악몽, 7월 26일 ②" 바로가기
☞ <4> "두 얼굴의 미군, 7월 27일·28일" 바로가기

1.

학살이 시작된 지 나흘이 됐다. 7월 29일. 쌍굴 속으로 까마귀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간밤에 내린 비가 그쳐 습한 공기도 희미하게 들어왔다. 나흘 동안 몇 명이나 죽고 부상당했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가족과 생이별을 겪고, 가족의 시체를 부둥켜 안고 울어야 했던가.


살아남은 어린 아이들이 몸을 꿈틀댔다. 하지만 기성을 질러대도 봐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날은 점점 더 하얗게 밝아 왔고, 쌍굴 입구 쪽으로 역광을 받은 검은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미군들이었다.


확인 사살. 그들은 인간의 씨를 말리려는 듯 한참 동안 총질을 해댔다. 또 다시 비명 소리가 굴속에 메아리쳤다. 인기척이 끊기자, 그들은 다시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끔찍한 적막이 찾아왔다.

그런데 한참 후, 갑자기 굴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하지만 총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번엔 한국말이었다.


"동무들! 안심하라요!" 인민군이 분명한 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사람들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인민군들이 총을 쏘지 않자 생존자들은 비틀대며 일어나 널려 있는 시체 사이를 누비며 가족들을 찾았다. 흐느끼는 건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건지 그들의 입을 비집고 나오는 말들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겨우 가족을 찾았어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심한 부상을 입은 이들은 자신을 내버려 두고 가라며 누나의, 자식의 등을 떠밀었다.


"노근리 철교와 시냇물은 피로 물들어져 있고…, 두세 겹씩 덮인 시체들로 이 일대는 아수라장이 됐다…."

뒤늦게 참혹한 학살의 현장을 발견한 기자 한 명이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손을 떨며 현장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할 수 없었고 어떤 단어들을 적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이 지옥을, 이 악몽을, 이 믿을 수 없는 일을, 후대에 알려야만 한다는 일념이었다.

7월 29일 토요일 아침. 드디어 만 3일간의 악몽이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 악몽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불과 25명 정도였다.

2.

일찍이 고향인 영동읍 주곡리에서 피난 대열을 벗어나 남쪽으로 향했던 은용은 8월 17일이 되어서야 극적으로 아내 선용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은용은 7월 대구 형무소에 머무르고 있었다. 다급하게 걸려왔다는 전화 속에서 선용은 부산 토성 초등학교에 설치된 육군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했다.

다음 날 날이 밝자 은용은 짐을 꾸려 나섰다. 한낮에는 도저히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더위가 기승을 부렸기에 낮엔 쉬고 밤에 걷는 생활을 며칠 동안 계속했다. 강행군은 더위 때문만은 아녔다. 밀려드는 피난민에 민심은 메말라 있었다. 시골 마을에서 잠자리를 얻는 것도 쉽지 않아 은용과 일행은 맨 땅을 요로 삼고 크게 자란 나뭇가지들을 이불 삼아 자곤 했다.

우여곡절 끝에 은용은 부산에 도착했다. 하지만 아내는 이미 육군 병원에서 퇴원해 부산 영도 피난민 수용소로 이동해 있었다고 했다. 수용소는 해동 중학교에 설치돼 있었다. 그 곳으로 간 은용은 운동장을 돌아봐도 아들 구필이와 딸 구희가 보이지 않아 불안했다. 그는 그렇게 두려움을 안고 뒷마당을 돌았다.


빨래터에 아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은용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선용은 달려들어 흐느끼기 시작했다. 은용은 아이들이 어떻게 되었냐고 물을 새도 없이 어린 것들의 죽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걷잡을 수 없는 비감이 은용의 골수 속을 파고들었다.


수용소 안은 쌓아올린 보퉁이와 빈틈 없이 틀어박힌 사람들로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전쟁에 밀리고 밀려 좁은 땅 남쪽 끝까지 내려온 피난민들, 덧없는 세상의 풀과 같은 존재들…. 지난날 어찌 살았든지 간에 이제는 모두 한결같이 딱한 피난민 신세였다. 은용과 선용도 수용소 생활에 적응해 갔다. 하지만 아이들의 빈자리는 그들을 밤낮으로 내리 눌렀다.


은용은 매일 꿈 속에서 아들 구필을 안고 잤다. 선용도 딸 구희를 안고 잤다. 그러나 해가 뜨면 아이들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부부에게 찾아온 애통과 그리움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3.


1953년 7월 27일 전쟁은 기나긴 휴식에 들어갔다. 많은 사람들은 정신적·신체적 불구가 된 채 척박한 타지에서 삶의 뿌리를 내려야 했다. 씻을 수 없는 상처와 빈곤을 남긴 채 전쟁은 역사 속으로 스러져 갔다. 그러나 이 비극적 역사는 노근리 쌍굴에서 죽은 이들을 비롯한 수많은 양민 학살 희생자들까지 데려가지는 못했다. 그렇게 전쟁이 끝남과 함께, 기억의 싸움이 다시 시작됐다.


노근리, 60년 전 오늘 <끝>

* 본 기사에 쓰인 삽화는 박건웅의 <노근리 이야기>에서 발췌한 것이며 저작권은 출판사 '새만화책'에 있음.

▲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부선철도 쌍굴다리. 등록문화재 59호로 지정되어 있다. ⓒ연합뉴스

1950년 7월 충북 황간면 노근리 경부선 철도 일대에서 벌어진 미군에 의한 학살 사건은 전쟁이 끝나고 혼란기를 거칠 때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다. 1960년 10월 유가족 정은용 씨 등이 서울 소재 주한미군 소청사무소에 공식 사과와 손해배상을 청구하면서 그 진실을 알리기 위한 노력이 시작됐지만 미국 정부는 무시로 일관했다.

이에 정은용 씨는 사건과 관련된 피해자들의 증언과 자신의 기록을 <버림받은 사람들>(1977),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1994) 등의 소설로 엮어내고 '노근리 미군 양민학살사건 대책위원회'를 정식 결성해 사건 해결을 위한 싸움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사건은 이후 일부 국내 언론의 꾸준한 보도에도 불구하고 주목받지 못하다가 1999년 미국 <AP> 통신이 사건을 크게 보도하면서 결국 이듬해 빌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의 시인과 사과를 받아내기에 이른다.

유가족들은 희생 가족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법적인 싸움을 벌이는 한편 노근리 쌍굴 다리를 문화재로 등록하고 1998년부터 매년 희생자 합동 위령제를 여는 등 기억·기록 작업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올해에는 사건 발생 60주년과 노근리 평화공원 개관을 기념해 11월에 예년보다 큰 규모로 열릴 예정이다.

증언에 따르면 노근리 사건으로 목숨을 잃거나 다친 이들은 300~500명으로 추정된다. 2004년 행정자치부 주관으로 피해자 신고를 실시한 결과 사망 158명, 행방불명 20명, 후유장애 57명 등 235명의 희생자가 접수됐으며 2008년 70명이 추가로 희생자 신고를 마쳤다.

이는 한국전쟁이 전개된 약 3년 동안의 민간인 학살자 100만 명(추산)에 견줄 때 매우 작은 비율이다. 그만큼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이 숱하게 벌어졌다는 뜻이다. 인민군이나 국군이 저지른 크고 작은 학살도 많았고, 민간들 간의 학살도 있었다. 전쟁 발발 6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전모가 밝혀지지 않은 양민 학살 사건은 역사에 기록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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