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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수 세러 온 줄 알았던 비행기, 지옥의 폭격을 퍼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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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수 세러 온 줄 알았던 비행기, 지옥의 폭격을 퍼붓다

[노근리, 60년 전 오늘]<2> 잔인한 폭격, 7월 26일 ①

☞<1> "비극의 시작, 7월 25일" 바로가기


심란한 밤이 지나고 7월 26일 날이 밝았다. 사람들은 몸을 추스르고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간밤과 동틀 무렵 고개를 들었다가 총을 맞은 이들이 있는 것 같았다. 사람이 죽었다며 통곡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전날 "누구도 이곳을 이탈하지 말라"며 윽박질렀던 미군들은 온데간데없었다.

어떤 이들은 죽어도 고향에서 죽겠다며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하지만 대부분은 남쪽으로 가자고 의견을 모았다. 또 다시 인솔자 없는 막막한 걸음이 시작됐다. 뜨거운 태양만이 피난 행렬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피난 일행이 영동군 황간면 서송원리 앞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미군 네댓 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사람들을 철로 쪽으로 몰았다. 철로 너머는 황간면 노근리였다. 미군들은 또 재촉하듯 고함을 쳐댔다. 이번에는 사람들의 짐을 풀게 하더니 하나씩 검색을 하는 것이었다. 낫, 식칼 따위는 모조리 가져갔다.

짐 검색이 끝나자 기약 없는 기다림이 시작됐다. 더위와 갈증으로 사람들은 지치기 시작했다. 참다못한 이들이 보내달라며 더러 항의하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매미 우는 소리만 지루하게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빨리 고향에 돌아갔으면, 어디론가 걷기라도 했으면 하고 망연자실해 있었다. 그러다 남쪽 하늘에서 경비행기 한 대가 날아와 사람들 위를 몇 바퀴 맴돌았다. 영문은 몰랐지만 피난민들은 희망을 가졌다. 우리를 태워 줄 트럭을 몇 대나 보낼지 인원을 세는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미군이 다급한 듯 호루라기를 불어댔다. 정적이 감도는가 싶더니 저 멀리 산 너머 남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금세 요란한 굉음으로 변했다. 쐐액, 쐐액 하면서 미 공군기는 머리 위까지 내려왔다. 아이들은 "뱅기다!"하고 좋아하며 철로 위에서 노닥거렸다.


한 순간이었다. 천지를 삼킬 듯 커다란 굉음과 시커먼 연기가 걷힐 때까지,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린아이의 머리는 그대로 날아갔다. 피가 솟구쳤다. 그 끔찍한 광경이 무엇인지 파악할 찰나도 없이 굉음이 철로 위를 덮쳤다. 탄약 냄새와 함께 솟아오르는 거대한 연기 속에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 기어 나왔다.


쾅- 콰앙! 하늘에서 떨어진 물체가 연달아 폭발했다. 폭발과 함께 옹기종기 모여 식사를 하던 가족들이 순식간에 피와 살, 뼛조각으로 변해 버렸다. 졸지에 닥친 날벼락에 소들은 광분했고 사람들은 비명을 질러댔다. 자갈밭은 이미 피바다였다. 시체가 하늘로 솟구쳤다가 철로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피투성이가 된 채 숨이 끊어진 사람들의 절단된 팔다리가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총을 맞은 아이들은 겨우 숨을 헐떡이다가 다시 퍼부어진 기총 공격에 사망했다. 목이 날아간 소가 하늘을 보고 고꾸라져 붉은 선혈을 뿜어댔다. 철로 옆 구덩이로 숨어 든 당시 16세였던 정구식의 등으로 죽은 여자 아이의 머리통이 날아왔다.


피와 땀, 화약 냄새와 시체들이 뒤엉킨 지옥에 이번에는 따다다다, 뚜두두두 총알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언덕에 있던 미군 병사들이 도망치는 사람들에게 기관총 사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두개골이 파괴된 할머니의 등에, 엄마 품에 안겨 울고 있던 갓난애의 머리에 시커먼 총알이 박혔고 그들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또 다시 비행기가 날아와 포탄을 쏟아 부었다. 엄마 치맛자락 속에 머리를 쑤셔박고 있던 해숙은 폭격이 끝나자 눈이 아파왔다. 왼쪽 눈이 빠진 것이었다. 해숙은 아프다고 몸부림 치더니 이내 안구를 뜯어내 멀리 던져 버렸다.

서쪽 가장자리 철로 위에 모여 앉아 있던 정신웅의 가족은 한데 모여 서로를 감쌌다. 다시 폭격이 시작됐고 신웅과 어머니만 살아남았다. 목이 탄다며 물가로 가자고 재촉하던 어머니는 개울물을 몇 번 들이마시더니 그대로 물속에 얼굴을 박고 죽어버렸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게 파괴된 채 죽어 나뒹구는 모습에, 남은 사람들은 아연실색했다.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은 죽은 사람에 걸려 수없이 넘어지고 기면서 쌍굴로 도망쳤다. 하지만 그 곳도 숨을 곳이 못 됐다.


쿠아아앙. 쿠아아앙. 소리를 내며 아직 머리 위를 맴도는 비행기들, 화염과 시커먼 그을음에 휩싸인 철로… 저항도 못 하고 고꾸라진 시체들과 그 사이에서 죽을 듯이 울면서 엄마를 부르는 아이들, 폭격이 지나간 자리는 생지옥이었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그리고 왜 이런 공습을 퍼부었는지 그들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또 그 누구도 앞으로 펼쳐질 일에 대해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디선가 미군이 나타났다. (7월 26일 ②에서 계속)

* 본 기사에 쓰인 삽화는 박건웅의 <노근리 이야기>에서 발췌한 것이며 저작권은 출판사 '새만화책'에 있음.

☞ <3> "쌍굴에서의 악몽, 7월 26일 ②" 바로가기
☞ <4> "두 얼굴의 미군, 7월 27일·28일"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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