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항저우는 꽤 여러 해 동안 가 볼 기회가 없었던지라 내심 기대가 컸다. 항저우도 역시 '변화'라는 중국의 키워드를 비껴가지는 못했다. 첸탕강(錢唐江) 변에 즐비하게 늘어선 빌딩과 아파트들이 항저우의 격세지감을 말해주고 있었다.
'송성'은 남송(南宋)의 도읍이었던 항저우의 역사적 특징을 매개로 해서 지어진 테마파크다.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테마파크 안에서 연일 계속되는 공연 '송성가무쇼'로 인해 더 유명세를 떨치게 된 곳이다. 약 한 시간 동안 계속된 '송성가무쇼'는 금(金) 나라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악비(岳飛) 장군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고전적인 방식의 진지한 공연이라기보다는 단체 여행객을 상대로 하는 대중성에 방점을 둔 연출이었다. 해외 여행객을 감안한 듯 여러 나라의 민속춤이 소개되는 등 1시간 동안 화려하고 눈부신 무대가 이어졌다. 전투 장면에서는 진짜 말이 무대 위를 뛰어다니거나 관객을 향해 포를 쏘기도 하고, 비가 오는 장면에서는 객석에 물이 흩뿌려지기도 했다. 무대 공연의 리얼리티를 강조함으로써 관객들에게 새로운 볼거리를 통한 감동을 선사하겠다는 의도가 역력했다. 3천석이나 된다는 객석은 발 디딜 틈 없이 꽉 들어찼다.
▲ '인상 서호'의 한 장면. ⓒ강민경 |
▲ '인상 서호'의 한 장면. ⓒ강민경 |
'송성가무쇼'가 통속적인 공연에 불과했다면 '인상 서호'는 보는 이의 눈을 의심케 할 정도의 놀라운 무대를 연출했다. 이미 우리 언론에도 소개된 바 있어서 아주 생소하지는 않았지만, 실제 서호를 배경으로 한 공연에는 입이 딱 벌어질 정도였다. 공연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중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 장이머우(張藝謀)를 비롯한 3인이 공동 연출을 맡았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산수실경(山水實景)' 공연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인상'은 항저우의 상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서호를 무대와 배경으로 삼아 새로운 시대의 콘텐츠를 창조해냈다.
공연이 콘텐츠화한 것은 사실 그 전부터 모두 언제나 거기에 그렇게 존재하던 것이었다. 서호도 그랬고, 공연 스토리의 중심인 '백사전(白蛇傳)'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연출자들은 언제나 거기에 그냥 그렇게 있던 요소들을 한데 버무려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공연을 만들어냈다. 서호의 수면 위에 펼쳐진 거대한 무대와 호숫가 수림을 향해 쏘아대는 형형색색의 조명, 그리고 호변에 앉아 이들의 새로운 변화를 관람케 하는 수천석의 조립식 객석들……. 공연을 구성하는 요소들 모두 놀라울 뿐이었다.
물론 물 위에서 펼쳐진 공연은 얼핏 보아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을 떠오르게 할 정도로 그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또 무대의 특성 때문에 군무의 동작들이 정교하지 못해 완성도가 떨어지는 측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장이머우는 최근의 영화 연출에서 국가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비판을 의식하기라도 한 듯 서호의 전설 '백사전' 이야기를 담담한 로망스로 그려나간다. 이제 중국의 공연은 기술이 내용을 압도하게 됐다.
거기서 관객은 '백사전'의 사랑이나 슬픔에 감동하는 것이 아니라 호수 자체의 다원적인 무대화, 나룻배를 타고 무대를 오르거나 내리는 배우들, 주무대와는 별도로 저 뒤편 누각에서 벌어지는 입체적인 공연, 호수 위에서의 화려한 군무 등 볼거리에 감동하게 된다. '인상' 시리즈는 구이린(桂林)과 하이난(海南) 등 중국 전역의 네 곳에서 절찬리에 상연 중이고, 유사한 공연물들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인상 서호'의 규모가 가장 작은 편이라 하니 다른 지역의 공연들은 더 말해 무엇 할까 싶다. '백사전'의 이야기를 빛내주기라도 하려는 듯 공연 중에 보슬비가 내렸다. 그런데도 2천 여 석에 달하는 객석은 꽉 들어차 있었다.
상하이 엑스포는 중국의 국가적 기획이었으니만큼 워낙 기대를 많이 했었다. 상하이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일찍 찾은 엑스포 현장은, 그러나 별 여지가 없어 보였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중국인들이 입장을 위해서만 한 시간 넘게 줄을 서고 있었다. 겨우 들어간 행사장 안에서도 중국관이나 한국관, 일본관 등 주요 국가의 행사장은 인기가 워낙 많아서 4~5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 곳들은 일찌감치 입장을 포기하고 인기 없는 나라들의 행사장을 주로 돌아다녔다.
엑스포는 "도시, 생활을 더욱 아름답게(城市, 讓生活更美好; Better City, Better Life)"라는 주제가 무색치 않을 만큼 전지구의 평균 도시인들의 삶을 '미화'하고 있었다. 곳곳에서 '도시화'가 가져다주는 편리와 안락함을 전시 중이었다. 빈민 문제, 환경 문제, 에너지 문제, 다문화 문제 등 그에 따른 부산물에 대해서는 아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런 편리하고 안락한 도시들을 매일 55만 명 이상의 중국인이 관람 중이었다.
세 개의 공연과 전시는 오늘 중국이 인민을 위해 무엇을 하려는지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무엇보다 중국은 인민들을 위한 '볼거리'를 창조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1인당 GDP 3천 달러를 넘어서고 있는 시점, 그것도 1000달러쯤은 1년 만에 돌파하는 고속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시점에, 정부 당국이 스스로 천명하듯 중국의 '인민들'은 진작에 '온포(溫飽)'의 단계를 넘어서서, '소강(小康)' 상태로 진입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민'들의 '소강'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소강'의 콘텐츠는 무엇인가? 항저우와 상하이로 몰려든 전국 각지의 관광버스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인민에게 볼거리를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 상하이 엑스포 한국관을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관람객들. ⓒ강민경 |
하지만 인민들의 관람 태도는 아직은 문제가 많았다. 화려한 콘텐츠를 구성하는 여러 요인들 가운데 가장 뒤떨어진 것은 역시 인민들의 관람 수준이었다. 다른 관객에 대한 배려나 전시물이나 관람 시설에 대한 태도 등이 모두 문제였다. 공연 중 큰 소리 대화나 휴대 전화 통화, 쓰레기 투척 등 눈살을 찌푸릴만한 행동은 곳곳에서 목격됐다. 그러나 이 또한 중국의 인민들에게는 학습의 일환일 것이다. 이제 중국의 1인당 GDP가 5천 달러 정도만 되면(지금도 그 수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지만) 그 '인민'들은 해외로 눈을 돌릴 것이다. 해외 중에서도 일본이나 미국처럼 값비싼 상품보다는 그럭저럭 만만한 한국 같은 나라가 가장 먼저 타깃이 될 가능성이 높다. 때맞춰 인민폐 대비 한화의 경쟁력도 높아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콘텐츠로 그들을 맞이할 것인가? 경복궁이나 전자제품 쇼핑센터만을 고집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인민'들은 이미 '내수' 시장을 통해 수많은 학습을 거쳐 온 사람들이다. 호수 위에 쏘아대는 장엄한 불빛을 모두 본 이들을 무엇으로 감동시킬 것인가?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콘텐츠를 개발하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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