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앞선 글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조만간 사망하더라도 북한에서 아래로부터의 체제전환, 즉 대중시위에 의한 체제붕괴는 발생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김정일 사후 북한이 위로부터의 체제전환, 즉 중국-베트남과 같은 수준의 과감한 개혁 개방을 추진할 가능성은 있을까?
일각에서는 남북관계와 북미관계 등 주변여건만 호의적으로 바뀐다면 북한도 개혁 개방을 선택할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의 북한이 생존을 위해서라도 변화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만큼, 외부 여건만 성숙된다면 과감한 변화를 시도하리라는 것이다. 김대중-클린턴 정부 시기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개선 경험을 돌이켜본다면 이같은 주장도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김대중-클린턴 정부 시기와 지금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김대중-클린턴 정부 시기에는 제네바 합의상의 핵동결이 유지되고 있어 핵문제가 이슈로 부각되지 않았던 반면, 지금은 북한이 2차례의 핵실험까지 실시해 핵문제가 북미관계 개선의 커다란 걸림돌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에서 북한이 핵포기를 하지 않는 한 미국이 적극적인 관계 개선에 나서기 어렵고, 미국이 대립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한 북한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양자 관계 개선은 김대중-클린턴 정부 시기에 비해 훨씬 더 어려워진 상황이다.
핵포기와 북미관계 개선의 대타협을 이룬 뒤 북한이 본격적인 개혁 개방에 나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으나, 그러한 상황이 현실화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자신할 수 없는 상태다.
따라서, 필자는 북핵 문제가 지금과 같이 교착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전제로 북한의 개혁 개방 가능성을 진단하려고 한다. 필자가 사회주의 개혁 개방의 바로미터로 삼고 있는 것이 중국과 베트남인 만큼, 여기서 관건은 북한이 중국과 베트남 수준의 과감한 개혁 개방을 추진할 수 있느냐인데, 중국과 베트남의 경험을 보면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고수'에서 '개혁 개방'으로의 정책 전환은 개혁적 리더십의 등장과 함께 가능했다.
▲ 덩샤오핑 |
우선 덩샤오핑은 마오의 후계자인 화궈펑과의 권력투쟁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기 위해서라도 개혁을 선택해야 했다.
문화대혁명의 실질적인 수혜자이자 마오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된 화궈펑은 마오의 과업에 대해 비판할 수 없는 태생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화궈펑으로서는 마오에 대한 부정은 곧 자신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것이었고, 문화대혁명으로부터 배출된 젊은 세대의 지지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화궈펑은 이에 따라 사인방을 비롯한 일부 급진파를 제거하기는 했지만, 그보다 더 멀리 나아갈 수는 없었다.
화궈펑이 이렇게 현상유지적인 정책을 취하면서 덩샤오핑은 변화를 선택함으로써 화궈펑을 공격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됐다. 덩샤오핑과 문화혁명기 정치적 숙청을 당했던 원로 혁명가들은 화궈펑이 문화혁명의 영향을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반박하면서 문화혁명의 과오를 시정하고 개혁을 추진할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공격의 종착점은 물론 화궈펑의 낙마였다.
덩샤오핑이 화궈펑을 공격하면서 개혁을 주창했던 또다른 이유는 당시 중국이 처하고 있던 경제적 상황이 변화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약진과 문화대혁명 등 일련의 실책들을 거치면서 중국 인민들의 삶은 궁핍을 더해가고 있었고, 새로운 정치 지도자는 이러한 경제적 난관에 뭔가 해답을 제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덩으로서는 개혁 정책을 선택하는 것이 지지세력을 확산시키는데 보다 유리했던 것이다.
▲ 마오쩌둥 |
오히려 이들에게는 마오와의 단절이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음으로써 자신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기도 했다. 덩샤오핑과 그의 세력들로서는 과거의 오류를 비판하면서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정확히 부합했던 것이다.
베트남의 경우도 본격적인 개혁 개방으로의 변화는 응우옌 반 린(Nguyen Van Linh)의 권력 장악과 함께 시작되었다. 응우옌 반 린은 베트남 통일 이후 호치민시 서기로 있으면서각종 개혁정책을 정력적으로 추진해 상당한 성과를 내기도 했으나, 보수파의 반발로 '82년 제5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원 겸 서기직을 박탈당한 채 실각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던 그가 불과 4년 뒤에 열린 '86년 제6차 당대회에서 공산당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베트남공산당 정치사에서 볼 때, 직전 전당대회에서 축출됐던 인사가 다음 전당대회에서 서기장으로 선출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응우옌 반 린의 서기장 선출에는 고르바초프의 영향력이 많이 작용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인데, '82년부터 소련공산당 내에서 베트남에 관한 일체를 담당하던 고르바초프는 베트남의 개혁을 위해 응우옌 반 린이 '85년 다시 정치국원으로 복권되고 '86년 서기장으로 선출되는데 있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응우옌 반 린은 이같은 과정을 통해 서기장직에 올랐기 때문에 개혁 정책을 통해 집권의 정당성을 설파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응우옌 반 린이 개혁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또다른 이유는 당시 베트남이 처하고 있던 경제적 상황에 있었다. 베트남공산당은 '75년 무력에 의한 통일을 이룬 이후 북베트남의 사회주의 노선을 남쪽에다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급진적 통일전략을 실행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80년대 중반 베트남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20개국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되는 처참한 결과로 나타났다.
베트남의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응우옌 반 린으로서는 변화를 통해 베트남 인민들에게 희망을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무능력한 전임 공산당 노선에 대한 비판 위에서 개혁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지지세력 확산에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개혁정책을 추진하다 숙청됐던 린으로서는 전임 공산당 지도부의 과오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기 때문에 전임 노선을 비판하는데 따른 부담도 가질 필요가 없었다.
결국 중국이나 베트남에서의 개혁 개방은 전임 지도부의 노선을 비판할 수 있는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새로운 지도자가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해 전임자의 과오를 비판하고 변화와 개혁을 선택하기 시작했을때 과감한 정책의 전환이 가능했던 것이다. '개혁'이라는 말 자체가 고친다는 뜻을 가지는 것을 생각해보면, 개혁 정책이란 사실 전임자에 대한 부정을 어느 정도 의미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의 관심 대상인 북한으로 돌아와 보자.
김정일 위원장 사망 이후 북한에서 중국-베트남과 같은 과감한 수준의 개혁 개방이 가능할까? 세간의 관측처럼 김정일 위원장 사후 셋째 아들 김정은이 권력을 계승하게 된다면, 이 질문은 김정은이 과감한 개혁 개방을 실행할 수 있느냐는 물음으로 요약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의 북한 체제에서 김정은이 전임자인 김일성과 김정일의 노선을 일정 정도 비판하면서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이 권력의 정통성을 김일성 수령을 계승한 데에서 찾았듯이, 김정은도 권력의 정통성을 김일성과 김정일을 계승한 데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후계자론도 후계자의 품격과 자질에서 핵심을 이루는 요소가 '수령에 대한 충실성'이라며 후계자의 정통성 기준을 수령인 김일성에게서 찾고 있다. 이렇게 후계자의 권위가 수령의 지위와 역할을 계승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논리구조에서는 후계자가 전임자의 과오를 비판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전임자인 수령에 대한 비판은 곧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한 부정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김정은으로서는 전임자를 비판하는 것보다 전임자의 노선을 따라가는 것이 권력의 정통성 유지라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부합한다. 아마도 김정은이 개혁을 추진하는 최선의 길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유연성 있는 변화의 길을 모색하는 것일 텐데, 이같은 방식으로는 중국과 베트남에서 있었던 것과 같은 과감한 개혁과 개방은 이뤄지기 힘들 것이다.
결국, 북한에서 기존 노선을 뛰어넘는 중국-베트남 수준의 개혁 개방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를 이끌 수 있는 개혁적 리더십의 등장이 필수적일 것으로 보인다.
* 북한학 박사인 안정식 기자는 SBS에서 한반도 문제를 취재, 보도하고 있으며 북한포커스(www.e-nkfocus.co.kr)라는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