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대 초부터 자주국방을 기치로 내세우면서 군사 투자를 엄청나게 많이 했습니다. 70년대 중반 한국이 경제력 면에서 북한보다 우위에 서기 시작한 이후 방위 투자가 늘어났고 80년대로 넘어와서는 방위 투자 누계에서까지도 북한을 앞지르기 시작했어요.
북한이 60년대까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보다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방위 투자도 훨씬 많았어요. 그러나 남쪽의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방위 투자 누계에서도 북이 남을 따라올 수 없게 된 건 80년대부터였습니다.
그리고 80년대는 군인들이 계속 정치를 하던 시절입니다. 안보를 군인 통치의 명분으로 삼았습니다. 특히 국방력을 강화해서 북한의 전쟁 도발을 사전에 억지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군인들이 국가의 최고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정당화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지금까지 62년이 지났는데 그 시간 중에 군인 통치 기간이 32년이었어요. 한국전쟁 이후로 잡으면 60년 사이에 32년이 군인 통치였습니다. 전체의 절반이 넘는 오랜 세월 군인들이 안보를 명분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유지하는 걸 정당화했는데, 아직도 자주국방을 못해서 전작권 반환 일자를 3년 7개월씩이나 늦춰야 하는가.
박정희 대통령이 자주국방을 내세운 건 미국을 믿을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68년 김신조 사건과 미 정보 수집함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69년 미 정찰기 피격 사건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북을 응징하지 않고 오히려 동북아 평화를 얘기하고 주한미군을 감축하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도저히 안 되겠다면서 자주국방을 내세웠던 겁니다.
그러면서 전체 국가 예산에서 방위비 투자 비율이 20~25% 정도가 될 정도로 많은 돈을 썼습니다. 그런 식으로 기틀을 다져 놓고 군인 통치를 정당화해서 전두환·노태우 정부가 계속 이어진 겁니다.
그러다가 88년에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바로 미국과 작전통제권 반환 문제를 협의하기 시작합니다. 88년 초부터 92년 말, 그러니까 노태우 정부 시절 내내 이 문제를 협의해서 94년까지 평시작전통제권을 우리가 환수하기로 했습니다.
그건 뭘 의미하는가? 군인 통치가 30년 정도 경과한 노태우 정부 시절에는 우리의 방위력이 북한보다 상대적으로 우세해졌거나 최소한 균형을 이뤘다고 봤기 때문에 전쟁이 났을 때를 제외하고는 평시에는 한국이 작통권을 가지고 있어도 된다는 판단을 우리가 하게 됐고, 미국도 그런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에 돌려준 거라고 봐야겠지요.
결국 94년 12월 31일 평시작전통제권이 돌아왔는데,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그 날을 '제2의 창군일'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물론 전작권과 평작권은 다르지만 94년에 평작권을 가져오면서 2008년까지는 전작권도 가져오겠다, 미국으로서는 돌려주겠다는 얘기가 있었어요. 그럼 평작권을 돌려받은 것만으로도 '제2의 창군'이라고 했던 김영삼 대통령은 지금 무슨 말씀을 할 수 있을까요?
박정희 대통령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마 지하에서 이렇게 탄식하고 있을 겁니다.
'내가 자주국방을 기치로 내건지 40년이나 됐는데도 아직도 자주국방을 못한단 말인가. 나의 육사 후배 군인 대통령들은 대체 뭘 했다는 건가. 아직도 자주국방을 못했다면 뭐가 문제인가? 경제력 면에서 내 임기 중에 북을 완전히 앞질렀고, 방위비 누계도 북한을 추월한지 오래 됐는데...듣자하니 우리 GDP는 1조 달러에 국방 예산도 250억 달러나 되고, 북은 GDP 총액조차도 200억 달러 미만이라는데...아직도 미군한테 전작권을 맡겨 둬야 한다면 대체 북한의 군사력은 얼마나 막강하단 말인가?'
▲ 박정희 대통령이 재임 당시 국내에서 생산된 무기를 살펴보는 장면 ⓒ연합뉴스 |
광해군에 폭군 낙인찍은 친명 사대 세력의 재림?
또 나는 이번 일을 보면서 소위 친명 사대 세력에 의해 왕위에서 축출당한 광해군을 생각했습니다. 광해군의 외교가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건 웬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잖아요.
광해군은 당시 세력이 커지던 후금(後金), 나중에 청나라(淸)가 되는 후금과의 관계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후금에 우호적이었다고 하긴 뭐하지만 최소한 명(明)과 후금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친명과 친청을 같이 해서 변방을 조용히 관리하고 조선의 안위를 도모하려고 했습니다.
광해군은 왜 그런 외교를 했는가? 아버지인 선조 때 임진왜란이 났는데 그동안 조선이 친명 사대 외교를 했기 때문에 명에서 원군이 오긴 왔습니다. 철저한 대명 종속 외교를 확실하게 한 결과 원군이 온 거죠. 그런데 여기 왔던 명의 장수들이 엄청난 횡포를 부렸어요. 그건 정사에도 나오고 야사에도 나오고 드라마에서도 나오니까 내가 재론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때 선조가 소위 전작권을 전부 명에 넘겼어요. 이순신 장군도 명의 진린(陳璘) 제독한테 지휘를 받으면서 나라를 지켰어요. 그 진린의 횡포는 아주 유명했습니다. 일본 사람들하고도 내통했다는 말까지 야사에 나와요.
그렇게 철저한 친명 일변도 외교가 가져온 폐해를 광해군은 왕자 시절에 뼈저리게 체험했기 때문에 자기는 왕위에 올라서 균형외교를 하려고 했다고 봅니다. 전작권을 통째로 남의 나라에 넘기는 상황을 다시는 안 만들겠다고 친명·친청을 했다고 봐야 할 겁니다.
그런데 광해군의 친명·친청 노선 즉, 혹은 대(對) 명·청 균형외교 노선이 조선의 친명 사대 세력을 매우 불편하게 했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광해군한테 폭군이라고 딱지를 붙여서 인조반정을 일으켰습니다. 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정치적인 이유를 들이 댄 겁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인조반정 직후에 조선은 병자호란을 만난 거예요. 그리고 굴욕적인 항복을 하면서 후금에 신하의 예를 다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광해군 때만 해도 형제관계라고 해서 관계를 비교적 잘 유지했었는데, 병자호란을 만난 후부터는 명과의 관계를 끊고 청의 신하 국가로 전락한 겁니다. 군신관계가 됐습니다. 그렇게 소위 한쪽에 너무 지나친 사대 외교를 하다 보면 또 어느 한쪽에 다시 굴욕적인 사대 외교를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대상만 바뀌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지금이라도 광해군의 외교 노선을 재평가해야 합니다. 친명 사대 세력이 낙인찍은 '폭군' 이미지를 벗겨 내고 외교적으로 어떤 지혜를 발휘했는지 잘 따져봐야 합니다.
이명박 정부가 노무현 정부를 여러 면에서 폄하하면서 그걸 가지고 전작권 환수 연기까지 정당화하고 있는데 그게 현실적으로 타당한 것인가를 따져 봐야 합니다. 아직도 북한이 우리보다 우세해서 미군한테 의존해야 한다면 정말 북한은 세계 최강의 군사대국이라고 해도 논리적으로 과언이 아닌 겁니다.
북핵 때문에 전작권 환수 어렵다는 건 거짓말
이 정부는 북한의 핵 능력을 거론하고, 특히 당면해서는 천안함 사건을 명분으로 국민들의 안보 위기감을 자극해서 전작권 환수 연기를 정당화했는데요, 그게 정말 설득력이 없습니다. 천안함 사건에 대한 설명이 부실하듯 전작권 환수를 연기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논리도 참으로 부실하더라고요.
정부 쪽 사람들은 여기 저기 언론에 나와서 천안함 사건도 있고, 북한이 핵실험을 하면서 비대칭 살상 능력이 강화되는 마당에 대북 억지를 위해서는 전작권 환수를 연기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영원히 안 받는 게 아니라 3년 7개월 연기하는 것에 불과한데 왜 그렇게 시끄러운지 모르겠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한번 연기하는 선례가 생기면 그게 거듭될 수 있고, 사실상 군사 주권을 되찾지 못하는 상황이 고착될 수 있어요. 연기하는 것에 불과한데 왜 반대하느냐는 말은 아주 유치한 변명입니다.
또 중요한 건 국민들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북한의 핵 능력 때문이라고 하는데...노태우 정부가 평작권 환수를 협의할 때도 이미 북핵 문제는 미국에 의해 국제적 문제가 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미국은 우리한테도 남북 기본합의서만 체결하지 말고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도 만들라고 요청했던 거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92년 말에 평작권을 94년까지 돌려주기로 합의했는데, 김영삼 정부 시절인 93년에 1차 북핵 위기가 터졌어요. 그래도 평작권 환수는 예정대로 했습니다. 미국이 한반도 상황에 대한 책임 문제 때문에 굉장히 고심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약속대로 돌려 줬습니다.
또, 노무현 정부 들어와서 2005년 말에 전작권 환수 협의가 시작됐는데, 미국이 돌려주겠다고 합의한 것은 2006년 10월 한미 연례안보협의회(SCM) 때였습니다. '2009년 10월 15일 이후 ~ 2012년 3월 15일 이전에 전작권을 반환한다'고 합의했습니다.
그런데 그 합의 시점이 언제입니까? 북한이 핵실험을 한 것이 그해 10월 9일입니다. 핵실험 한지 한 달도 안 됐을 때고,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한지 3개월이 약간 넘었을 때였어요. 그래도 미국은 전작권을 반환하겠다고 결정했습니다.
그건 뭘 의미하느냐? 미국의 군사적 판단이 이미 내려진 거예요. 북이 남쪽을 상대로 전쟁을 도발할 능력이 없거나 가능성이 낮다고 본 겁니다. 전작권이 반환돼도 주한미군이 남아 있으니까 그 자체가 억지력으로 작용하는 거고 전작권을 돌려 줘도 한반도에서 전쟁이 안 난다는 판단을 한 겁니다.
노무현 정부가 전작권 반환을 하면서 민족주의적인 이미지 메이킹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미국의 입장에서 전작권을 돌려줘야 할 필요성이 더 컸어요. 2001년 9.11 테러 이후 알카에다나 그와 유사한 테러집단에 대한 대응력을 키우기 위해서 미국은 해외 주둔 미군을 신속기동군화하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한미군도 신속기동군화하겠다고 생각한 것이고, 그 구상을 바탕으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협의를 우리한테 제의한 겁니다. 주한미군 사령관이 한국군의 전작권을 가지고 있으면 미국의 자유로운 행동을 어렵게 만드는 족쇄가 됩니다. 그래서 돌려주려고 한 거예요.
거기에는 기본적으로 북한이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적고, 설사 문제를 일으킨다고 해도 신속기동군화되어 있는 주한미군이 중동이나 인도양 쪽에 나가 있더라도 곧바로 돌아올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죠. 그리고 또 주한미군이 다 떠나는 건 아니니까요.
그 시절 미국의 대통령이 부시였습니다. 전작권을 돌려주겠다고 했던 미국 정부는 북한을 극도로 불신하고, 대북 압박이 필요하다고 확신하던 부시와 네오콘들의 정부였어요. 그런 부시 행정부가, 북한이 이미 1차 핵실험을 했고 미사일도 곧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수준으로 발전한다는 판단이 섰던 그 시절에도 전작권을 돌려주려고 했던 겁니다.
이렇게 보면 전작권 문제는 실체적 진실보다는 관점의 문제가 돼버렸어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노무현 정부가 전작권을 찾아오기로 했던 것에 대해 친북적인 입장의 발로였다는 논리로 합의를 뒤집은 것에 불과합니다. 소위 균형외교를 하려고 했던 광해군을 완전히 도덕적으로 매도해서 반정을 정당화했던 친명 사대세력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미국만 가까이 하고, 북한·중국과는 적대시하고 거리를 두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 지난달 26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전작권 환수 연기가 합의됐다. ⓒ청와대 |
만리장성 쌓아서 중국 안보에 도움이 됐나?
또 다른 측면에서 얘기해 봅시다. 미국과 러시아는 지난 3월에 핵무기를 감축하기 위한 새로운 협정을 타결했습니다. 무기 감축(Arms Reduction)을 하겠다는 겁니다. 리덕션에는 우선 긴장 완화(Tension Reduction)가 있고, 다음에는 위협 감소(Threat Reduction)가 있고, 더 나아가면 무기 감축(Arms Reduction)을 합니다. 긴장 완화 → 위협 감소 → 무기 감축의 순서입니다. 지금 미국과 러시아는 부시 때 일시 중단되었던 무기감축 수순(상호 핵무기 감축)을 다시 밟고 있습니다.
완화, 감소, 감축(Reduction)의 반대 개념은 억지(Deterrence)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적대하면서 억지력을 키울 것인가, 상호 협력을 통해 위협을 감소시키고 무기까지 감축할 것인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런데 미국과 러시아는 감축으로 가는데 우리는 억지력을 키우기 위해서 전작권 환수를 미루어야 한다고 한단 말예요. 작년에 이미 확장된 억지력(Extended Deterrence)을 미국한테 보장받았으면서도 전작권까지도 미국이 조금 더 가지고 있으라고 하는 겁니다.
중국의 역사를 보면 이른바 억지력을 키우는 차원에서 대비했던 대표적인 사례가 진시황 때 쌓기 시작한 만리장성입니다. 명나라 때 서쪽으로 실크로드가 끝나는 지점까지 쌓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숱하게 많은 새외(塞外. 요새 밖 즉, '만리장성 밖'을 뜻함) 민족, 만리장성 북쪽에 있는 유목민족들이 중국을 유린하고 약탈하고 중국 본토까지 넘어 들어와 나라까지 수립했었어요.
수(隋)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 4세기 초부터 130~40년간 중국에서는 만리장성 북쪽의 흉노 선비 저 갈 강 등 다섯 유목민족들이 만리장성을 넘어와 나라를 16개나 세운 적도 있었어요. 중국사에서는 5호 16국 시대라고 부릅니다. 어쨌건 만리장성이 중국의 안보를 보장하지는 못했던 겁니다. 만리장성이라는 억지력만 가지고는 한족(漢族)의 안위가 보장되지 않았던 거지요.
결국 중국은 주변 국가들, 새외 민족과의 화친이 안보 경비를 오히려 줄여준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억지력 쪽에 투자를 하려면, 하나의 도발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수천 수만 배나 많은 투자를 해야 되는데, 그런 식의 안보 정책을 쓰지 않고 화친정책을 쓰면 서로 상생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겁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니까 중국이 조공을 받았어요. 자신들의 문화를 전수해 주고, 형제관계, 부자관계, 군신관계를 맺으면서 새외 민족을 관리하던 시절 중국엔 오히려 안보 위기가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만리장성은 이제 건축사(史)에만 남았어요. 달에 가서 보니까 만리장성이 가장 확실하게 보였다잖아요. 그렇게 세계적인 건축물로 이름을 남겼지만, 외교·안보 정책 면에서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오히려 화친이 저경비 고효율의 결과를 냈습니다.
전작권 환수를 미루고 억지력을 키우겠다고 하는데, 그러다 보면 미국이 짜 놓은 시간표를 조정해야 하니까 거기서 생기는 부담은 우리가 다 떠안아야 할 겁니다. 주한미군 주둔비 분담금은 2012년까지 비율을 정해 놨으니까 추가 부담이 없을 거라고 둘러 대던데, 결코 그렇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전작권 환수 연기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추가 부담을 해야 하는지, 언론이나 전문가들은 이 문제를 캐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의 합의로 환수를 연기했는데, 솔직히 우리 국방부도 좀 당황했을 겁니다.
2012년 4월 17일을 환수 디데이로 정해 놓고, 그로부터 역산해서 미군 기지 이전이라든지 우리의 내부적인 준비를 다 하고 있었는데, 그걸 모두 스톱시키고 3년 7개월 뒤로 미루면 추가 비용이 발생할 수밖에 없어요. 비용도 늘어나고, 미국이 내부적으로 조직을 개편하는 문제 같은 것도 재조정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비용을 미국이 부담할 것 같습니까?
미국이 어떤 나라입니까? 우리를 빼놓고 제네바 기본합의를 북한하고 체결해 놓고 와서 경수로 건설 경비의 70%를 우리한테 넘긴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지금 추세가 해외 주둔 미군들의 경비를 주둔국에 점점 더 떠넘기고 있잖아요. 우리도 아마 그 비율을 높여주는 무슨 이면합의 같은 게 있지 않나... 그러지 않고 이런 합의가 이루어지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런 거 없다고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점차 밝혀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작년에 우리가 미국으로부터 '확장된 억지력'을 보장 받으면서 미국산 무기 구매 자격을 한 단계 올려놨는데, 그런 저런 이유로 방위비 부담은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국민 부담으로 돌아가니까 지금은 없다고 하겠지만 내년부터 슬그머니 기정사실화하면서 그걸 정당화하는 말을 내놓을 겁니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
* '정세토크'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 한반도평화포럼 상임위원)이 한반도 문제에 관해 자신의 경험과 견해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격주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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