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귀레, 신의 분노> (1972). 아마존의 끈적한 밀림. 모든 배우와 스태프가 영화 속의 길 잃은 주인공들만큼이나 극한의 고생을 하며 찍어낸 영화. 신의 분노 그 자체라 할 만큼 이글이글 타오르는 광기의 배우 클라우스 킨스키가 영화 촬영을 거부하자,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은 그의 머리에 총을 겨눈다. 영화를 계속 찍겠는가 나와 함께 죽겠는가.
촬영 현장에서 감독이 발휘하는 광기는 최고의 전설감이다. 정해진 시간 안에 찍어내야 한다는 피 말리는 제약, 원하는 그림을 뽑아낼 때까지는 물러설 수 없다는 절박함이 감독을 미치게 한다. 대부분의 현장은 합리적인 일터로 시작해서 피로와 욕망으로 덕지덕지 누벼진 광기의 전쟁터가 된다. 촬영을 방해하는 취객이나 깡패들과 활극을 벌이는 감독의 에피소드나, 소음을 없애라는 명령에 공사장 인부들에게 무릎을 꿇고 읍소하는 연출부의 이야기 같은 것은 소소하고 진부한 일상일 뿐이다. <여명의 눈동자>(1991)를 돌이켜보자. 배우 최재성의 생뱀을 뜯어먹는 연기가 그냥 나왔겠는가. 존경할지어다. 감독의 불타는 예술혼이여. 그리하여 감독들이 이 같은 예술혼을 금과옥조 삼아 똥고집을 부리려 할 때, 이를 가볍게 견제할 수 있는 한 마디가 있다. '예술 하지 마!'
▲ 문화방송(MBC) <여명의 눈동자>에서 배우 최재성 씨가 생뱀을 뜯어먹는 장면. 존경할지어다. 감독의 불타는 예술혼이여. 그리하여 감독들이 이 같은 예술혼을 금과옥조 삼아 똥고집을 부리려 할 때, 이를 가볍게 견제할 수 있는 한 마디가 있다. '예술 하지 마!'ⓒ문화방송 |
이 때 예술은 여러 가지 뜻을 담는다. 먼저, 제작 목적 부문. 너 착각하지 말아라. 네 자아실현하려고 드라마 하는 게 아니라, 광고 많이 팔아서 수익 창출하려고 드라마 만드는 거다. 다음 장르 정체성 부문. 애시당초 네가 무슨 독립 영화나 예술 영화 감독이 아니지 않느냐. 흉내 내려다 네 가랑이 스태프 가랑이 다 찢어진다. 마음에 안 들어도 적당히 타협하고 넘어가는 거다. 마지막 수용자 적합성 부문. 드라마는 수용자들이 찾아가는 장르가 아니라 무작위로 '흩뿌리기' 때문에 중학생이 봐도 바로 이해되게 해야지 너만 알게 복잡하게 하면 안 된다. 열광하는 마니아에 현혹되는 순간 시청률과는 작별하는 거다. 이러니 드라마에 개성 한 번 심어 보려다 금방 자조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쪽대본을 기다리다 내쉬는 한숨 같은 말. 에이 우리가 무슨 예술 하니? 그냥 후루룩 말아서 방송 내는 거지 뭐.
허나 이 같은 모든 담론은 최소한 감독을 그 작품의 예술적 총책임자로 인정을 하는 것을 바탕으로 했다. 총책임자인 감독이 하루에 내리는 수백 가지의 결정 중에 많은 부분이 제작비와 직결된다. 그러니 애초에 할당된 제작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어느 정도의 수익이 날 수 있는 선에서 결정을 내려달라는 당부는 당연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하기 마련이라는데, 감독의 지나친 권위는 독선과 오판을 불러 작품을 망칠 수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술'하지 말라는 말은 그래서 나름 의미 있는 견제다. 당신이 알아서 잘 만들되 현실적 조건을 잊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현실적 조건에 유리한 방향으로만 만들어 달라고 하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모 감독. 남의 돈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연출하면 쓰나. 이 에피소드는 마음에 안 드는데? 이렇게 찍으면 이상한 거 아니야? 연기자는 왜 이런 사람을 캐스팅한 거야? 당신 돈으로 찍는 게 아니잖아. 당신 힘으로 편성된 것도 아니잖아? 이 배우 써 주고 편집도 좀 바꾸고…… 뭐? 이야기가 산으로 간다고? 당신은 시키는 대로 찍으면 되는 거야. 잘 되면 내 덕, 못 되면 연출인 당신 책임인 거 알지? 수익은 당연히 나야 하는 거고. '남의 돈'이 화제에 오르는 순간, 그나마 '예술'에 대해 운운하던 때가 행복하다는 걸 절감하게 된다.
이건 비단 제작자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감독을 이야기의 최종 책임자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사공이 비약적으로 많아진다. 제작사 대표뿐만 아니라 방송사 간부, 이들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작가, 그리고 이로 인해 연출의 힘이 별로 없다는 것을 간파한 스타 연기자들 및 각 분야의 스태프들까지 서로의 주장이 부딪친다. 그렇게 컨트롤 타워가 무너진다. 과거 제왕적 연출의 독선을 걱정했다면, 이제 연출은 점점 촬영을 하청 받아 완제작 납품하는 컨베이어 밸트 프로그램의 일부가 되어 간다. 작품의 예술적 완성도에 대한 책임은 분산되거나 사라지고 수익에 대한 책임만 강화되는 상황이 된다.
이 '남의 돈' 논리의 가장 무서운 지점은 이 논리가 돈을 댈 능력이 있는 제작자나 방송사 간부의 것만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연출이나 작가의 생각을 비아냥거리고 싶은 사람은 아무나 쓸 수 있다. 연출의 지시나 작가의 대본이 마음에 들지 않는 스태프, 연기자, 혹은 다른 프로그램의 연출진, 심지어는 시청자까지 입을 모아 이렇게 욕할 수 있다. '남의 돈으로 일하는 주제에.'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드라마 제작진 중에서 '남의 돈'으로 일하지 않는 자 누구인가.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보자. 드라마는 무엇으로 만드는가. '남의 돈'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그 '남의 돈'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 연출의 생각, 작가의 글, 배우의 연기, 스태프들의 전문 기술 등이다. 결국 돈이 사람을 부리는 것인가 사람을 모으기 위한 토대로 돈을 활용하는 것인가의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돈으로 모아놓은 사람들의 가치가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지 돈 자체가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돈으로 자신의 가치를 흔들어 놓는 상황을 자신의 입으로 옹호하는 것은 홍세화의 표현대로 '존재를 배반한 의식화'다.
드라마가 좋아지려면 훌륭한 안목과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그 능력을 고루 발현해야 하고, 그 중심에는 완성도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지고 조율을 하는 감독이 필수적으로 있어야 한다. 물론 독선과 독단으로 제작팀 전체를 혼란으로 빠뜨리는 감독은 당연히 견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견제 이유가 '남의 돈'이 되는 순간 드라마의 존재 이유와 일의 가치 자체가 흔들리게 된다.
드라마는 비즈니스다, 라는 명제가 의미가 있다면 드라마는 비즈니스 이전에 다른 무엇이었기 때문이다. '남의 돈으로 찍으며 그러면 안 된다'라는 말과 함께 책임 없는 간섭과 일관성 없는 욕망들이 끼어들어 오는 것은 연출의 독선보다 더 위험한 일이다. 연출의 독선은 차라리 능력이 부족한 자의 이야기에 대한 생각이라도 전달하지만 '남의 돈' 논리는 시청자를 볼모로 비즈니스만을 성공하겠다는 목표나 그 논리에 기대 훈수나 두고 싶은 욕망에 부응할 뿐이다. 그러니 차라리 '예술 하지 말라'는 일갈이 훨씬 소중하다. 이 말은 그나마 예술이 무엇인지, 드라마는 왜 비예술인지, 매체와 장르에 맞는 이야기 구조는 어떤 것인지를 고민하게 만들지 않는가. 우리가 '남의 돈'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남이 돈으로 사고 싶은 가치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지 우리가 '남'에게 복종해야 하는 근거는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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