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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보복 군사 행동, 결국 미국이 막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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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천안함 보복 군사 행동, 결국 미국이 막을 것

지난 3월 9일 일본 외무성은 1960년 미일안보조약 개정과 1969년 오키나와 반환 당시 미일 양국이 합의한 '밀약' 문제에 관한 외부위원회의 검토 결과를 발표했다.

국제정치학자인 조진구 도서출판 '전략과 문화' 대표가 외부위원회의 검토 보고서와 그간 한국과 미국이 공개한 외교문서를 분석해 미일간의 '밀약'이 한미동맹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는 기고를 보내왔다.

조진구 대표는 네 편의 글을 통해 미일 밀약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와 관련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 볼 예정이다. 일본 도쿄대에서 60년대 한미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조 대표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의 한미관계가 60년대의 추이와 유사하다고 말했다. <편집자>

☞상편 "주한·주일 미군 이동에 '사전협의'란 없다"

☞중편 "주한미군 일방적 철수를 막아라" 선봉에 선 차지철"
☞하-1편 한국은 언제나 '보복'을 원했고 미국은 말렸다


닉슨-키신저 류(流)의 현실주의 외교를 한반도에 적용

주한미군 감축은 한국문제 해결을 위한 닉슨-키신저의 커다란 밑그림의 일부였다. 닉슨-키신저는 강대국 주도하에 남북한의 평화적 공존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봤던 것이다.

이것은 1969년 서독의 브란트 총리가 동방정책을 시작하면서 아데나워 이후 외교정책의 근간을 이뤘던 할슈타인원칙을 포기하고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와 관계정상화를 모색했던 것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동서독의 긴장 완화, 동서독에 대한 교차승인, 1민족 2국가론에 입각해 통일보다는 평화를 우선하는 동서독 모델을 한반도에 적용하는 이른바 '두 개의 한국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닉슨-키신저는 중국과 소련의 협조에 기대를 걸었다. 닉슨은 1967년 10월 한외교잡지에 기고한 <베트남 이후의 아시아>란 논문에서 세계 제1의 인구대국이자 최대 위협인 중국을 빼놓고는 아시아의 미래를 논할 수 없다면서 미국의 아시아정책은 중국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것이 중국을 국가로서 승인하거나 중국의 유엔가맹을 승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장기적인 정책과 단기적인 정책을 주의 깊게 구분하고 장기적인 목적 달성을 위해 단기적인 계획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닉슨은 강조했다(Foreign Affairs, Vol.46, No.1, October 1967, pp.113-125).

이런 생각은 정권 출범 후 구체화되었다. 특히, 닉슨 정권은 1970년 10월부터 파키스탄의 칸(Khan) 대통령과 힐러리(Hilaly) 주미대사를 통해 중국과 접촉을 했으며, 그 성과가 1971년 7월 15일의 닉슨에 의한 전격적인 중국 방문 발표로 이어졌다. 또한 8월 2일 로저스 국무장관은 가을의 유엔총회에서 중국의 유엔가맹에 반대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키신저는 닉슨의 방중 사전준비를 위해 7월과 10월 두 차례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해 저우언라이와 만나 주한미군문제, 한반도에서의 긴장완화와 교류 증대 등에 대해 논의했다.

미중접근은 소련의 외교적 초조감을 불러와 지지부진했던 미소 간의 전략무기제한(전략핵의 상한선 설정, SALT)협상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으며, 1972년 5월 닉슨은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해 SALT-1 협정과 함께 탄도탄요격미사일(ABM) 협정에 서명했다.

한국문제에 관해서는 국무부가 소련 외무성과의 비공식 접촉을 시작했다. 1971년 5월 영국의 전략문제연구소에서 한국관련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던 국무부 소속 외교관 아브라모위츠(Abramowitz)는 소련 외무성과 사회과학원의 한국과 중국문제 전문가를 만나려 했지만 소련 외무성은 피메노프(Pimenov)라는 한국문제 담당자와의 면담 이외에는 허용하지 않았다. 5월 19일 아브라모위츠를 만난 피메노프는 일방적으로 북한의 입장에 동조하지 않는 신중한 자세를 보였지만, 기본적으로 미국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선 피메노프는 소련은 남북한 문제의 단계적(step-by-step) 접근을 지지하며, 특히 남북한 당국이 판문점에서 서신교환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또한 주한미군의 철수가 남북한 문제 해결을 위한 출발점이기는 하지만 다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아니며, 한반도 정세의 안정을 위해 미군이 완전히 철수해야 되는 것도 아니라는 입장을 보였다.

아브라모위츠가 청와대 습격, 푸에블로호 나포, EC-121 격추 등 북한의 도발에 대한 소련의 견해를 묻자 피메노프는 직접적인 대답은 피한 채 이들 사건에 대해 북한은 나름의 해석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데 그쳤으며, 그는 북한은 한국을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모스크바에게 확인해주었다면서 북한이 그런 도발을 할 위험은 없다고 강조했다(Airgram-555 From Embassy Moscow To Department of State<May 26, 1971>, Subject: Discussion with Soviet Foreign Ministry Official on Korea, Record Group 59, General Records of the Department of Stated, Subject Numeric Files, 1970-73, Political & Defense, Box #2421, National Archive 2, College Park, Maryland).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북한은 대남 평화공세를 적극적으로 폈는데, 이것이 또 다시 한미 사이에 긴장과 갈등을 초래하는 요인이 되었다. 1971년 8월 시아누크 환영 평양시민 군중대회에서 김일성은 한국 정부 당국과도 만날 용의가 있다고 밝힌 데 이어 1972년 1월에는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위해서는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꿔야 하는데, 평화협정 체결 시까지 잠정적으로 주한미군의 주둔을 인정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북한의 움직임을 주목할 만한 변화라고 보았던 워싱턴은 1971년 12월 2일 서울의 대사관에 보낸 국무부의 전문에서 통상적인 훈련 이외에 북한이 특별한 군사작전을 위한 계획과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면서 한국이 계속해서 북한의 위협을 강조하면 미국은 한국과 위협인식을 공유하고 있지 않음을 공개적으로 밝힐 수도 있다고 전달했다.

이런 미국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오히려 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북한의 위협을 강조했다. 12월 13일 1개 사단의 주한미군 철수 이외에 추가적인 감축계획이 없다는 닉슨의 친서를 전하러 온 하비브 대사에게 박정희는 12월 6일의 비상사태 선언은 북한과 대화는 하고는 있지만 방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김일성에게 알려주고, 미중 및 미소 간의 데탕트 분위기로 인해 자칫 북한을 위협으로 인식하지 않는 한국 국민들에 대한 경고라고 설명했다(조진구, <한미관계의 문맥에서 본 한국군의 베트남전 철수>, 『軍史』제60호, 2006녀 8월, pp.224-226).

닉슨 정권에 의한 주한미군 1개 사단의 철수는 국력과 국익에 대한 냉철한 인식에 입각해 미국 외교를 재편하려는 시도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며, 또한 아시아보다 전통적인 유럽 중시 노선으로의 회귀로 이해할 수 있다. 닉슨은 윌슨의 신봉자였지만 이념이나 가치를 중시하는 윌슨 외교와는 달랐으며, 군사력 행사에 적극적이었던 보수우파 노선과도 일선을 그었다. 즉, 닉슨은 미국의 힘의 한계를 자각해 대외문제에 대한 과잉개입을 축소하면서 강대국 간의 세력균형을 통한 국제평화의 실현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측은 이러한 미국 외교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닉슨 독트린에 나타난 '의심의 여지가 없는(unmistakable)' 변화의 조짐, 베트남 전쟁의 베트남화, 한국에서의 병력감축, 공산중국의 유엔 가맹, 닉슨의 중국 방문 등은 필연적으로 미국의 대한 방위공약의 수정, 즉 미국의 인적 물적 자원의 제한 또는 축소를 수반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무관심하고 관대한 후견인(disinterested, generous guardian)' 미국에게 여전히 의존하려고 했다.

그러나 미국에게 한국은 더 이상 공산주의와 자유세계 사이의 최전선의 상징이 아니었으며, 그로 인해 북한의 위협에 대한 한미 간의 인식 차이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던 것이다(Airgram-336 From Embassy Seoul To Department of State<September 23, 1971>, Subject: Economic Military Analysis and Modernization Plan, Record Group 59, General Records of the Department of Stated, Subject Numeric Files, 1970-73, Political & Defense, Box #1862, National Archive 2, College Park, Maryland).

냉전 종결, 9.11 그리고 한미동맹

닉슨 정권 이후에도 미국은 세 번 더 주한미군의 병력을 감축했다. 인권외교 전도사로 널리 알려진 카터 대통령은 주한미군의 완전 철수라는 대선공약을 실행에 옮기려 했지만 한국과 일본, 나아가 국내에서 의회와 군부의 반대에 부딪쳐 제2사단의 1개 대대와 지원부대만을 철수한 뒤 자신의 정책을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村田晃嗣,『大統領の挫折: カーター政権の在韓米軍撤退政策』有斐閣, 1998, 제3장-제5장; James Young, Eye On Korea: An Insider Account of Korea-American Relations, 2003, pp.39-57).

두 번째는 냉전의 종식으로 소련의 위협이 감소되면서 미 의회가 국방예산의 삭감을 요구했던 것이 계기였다. 미 국방부의 당초 계획에 의하면 미국은 3단계로 나눠 1990년부터 92년까지 1단계로 7,000명을 줄이고, 1993년부터 95년까지의 2단계에서는 북한의 군사적 위협 등을 고려해 감축 규모를 결정하고, 1996년부터 시작되는 3단계 기간 중에 한국방위에서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국군에게 넘겨주고 미군은 지원 역할만을 담당함으로써 소규모 부대만을 남기고 주한미군을 모두 철수한다는 것이었다. 닉슨과 카터 정권 때와는 달리 한국 측의 거센 반발은 없었으며, 북한의 핵개발 의혹이 불거지면서 2단계 이후의 감축은 보류되었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두 번째 감축이 완료되어 가던 1992년 10월의 제24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의 합의에 따라 한미동맹의 미래에 대한 공동연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공동연구 결과는 1994년 10월 워싱턴에서 열린 제26차 SCM에 보고되었지만 구체적인 보고서의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SCM에 앞서 이병태 국방장관이 미 육군대학원 강연에서 북한의 위협이 소멸한다 해도 강대국의 이익이 교차하는 한반도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이 증가하기 때문에 "한미동맹은 동북아 지역 수준의 위협을 관리하는"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동맹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으로 봐서는 한미동맹의 수비범위를 한반도로 국한시키지 않는다는 데 한미군사당국 사이에 일정한 합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미 공동연구 결과는 1995년 랜드연구소에 의해 『다음 세기를 위한 새로운 동맹: 한미 안보협력의 미래(A New Alliance for the Next Century: The Future of U. S. - Korean Security Cooperation)』라는 이름으로 발간되었는데, 여기서도 한미 양국이 공동으로 직면한 위협과 위험, 상호 이익이 되는 미래의 기회, 동맹에의 기여 등의 면에서 동맹의 재정의가 필요하다고 지적되었다.

북한 핵문제, 북한군의 전방전개, 북한의 내부적 취약성 등 여전히 다양한 위협이 존재하지만 한미동맹과 동북아 주둔 미군의 존재 이유인 북한의 위협이 적실성을 잃으면 한미 '안보협력의 논리'에 중대한 변화가 필요하며, 그때에는 한미 안보협력의 비전을 한반도를 넘어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pp.63-68).

이것은 이병태 장관의 발언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미동맹은 미국이 인정한 한국 영토가 외부로부터 무력공격을 받을 때 양국이 공동으로 대처한다는 것을 약속한 것이기 때문에 지역적 동맹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조약의 개정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서 공동연구는 양국이 안보 선언이나 약정(contract)을 통해 동맹에 대한 장기적인 기대나 필요성을 표명하는 것을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했다(p.75).

물론 이에 대해 한미 정부 사이에 명시적이고 공식적인 합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더구나 그 뒤 북한의 핵문제에 더해 정전협정 무력화 시도, 동해안 지역에의 잠수함 침투, 금창리 핵 의혹, 장거리 미사일 발사 등 북한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이 계속되면서 한미동맹의 미래비전에 관한 후속연구는 실무자 수준의 협의를 계속하는 데 그쳤다.

세 번째는 미국의 국가안보전략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던 9.11 테러와 그 연장선상에서 시작된 해외주둔미군재편(GPR)에 따라 2004년 미국이 주한미군의 일부 병력을 이라크로 차출하는 과정에서 실행에 옮겨졌다. 양국의 교섭 과정에서 감축시기를 늦춰달라는 한국의 요구를 미국이 받아들였다고는 하지만, 한국 헌정 사상 초유의 국회에 의한 대통령 탄핵소추라는 상황 속에서 미국은 내부적으로 결정을 하고 일방적으로 한국에 통보했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과 '사전협의'

미 국방부는 2001년 9월 말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미국과 동맹국에 대한 위협을 억제하고 적을 결정적으로 격퇴하기 위해서는 미군의 능력과 제도의 변환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테러리스트와 같은 새로운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군사력은 물론 군의 기동화와 경량화를 통한 신속성과 유연성 제고를 위해 해외주둔 미군의 재편을 모색했다. 주한미군의 감축과 후방으로의 이동은 이러한 미국의 전략과 깊게 맞닿아 있는데, 이것이 북한위협에의 대처라는 한미동맹의 목적과 상충된다는 점에서 한미 간의 쟁점이 되었던 것이다.

2003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제35차 SCM에서 양국 국방장관들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 지속적으로 중요함'을 재확인했는데, 같은 내용은 이듬해 10월에 열린 제36차 SCM 공동성명서에도 포함되었지만 그리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2004년 11월 국회 상임위 대정부질문에서 당시 민주노동당의 노회찬 의원이 주한미군의 한강이남 이전은 북한에 대한 타격 능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며, 주한미군의 지역역할은 중국과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을 위한 것이며 한국 정부가 이미 이에 대해 합의해 주었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그렇지만 미국 측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의 필요성을 끊임없이 한국 측에 제기하고 한국 정부도 내부적으로 검토는 했지만 노 의원이 문제를 제기한 시점에서 미국과 합의한 것은 아닌 듯하다. 한미동맹을 중시하는 외교부와 국방부가 대통령에게 보고도 없이 한국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인정하는 대신 미국은 주한미군의 입출입시 한국과 사전협의한다는 내용의 비밀 양해각서를 교환하려 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미국 측이 난색을 표명했음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김종대,『노무현, 시대의 문턱을 넘다』나무와숲, 2010, pp.317-318). 긴급 사태 발생 시 한국과의 사전협의는 시간의 지체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군사작전을 제약할 수 있기 때문에 전략적 유연성의 본래 취지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상편>에서 살펴본 대로 미국은 일본과 안보조약을 개정하면서 주일미군의 장비와 인력의 중요한 변경에 대해 일본 정부와 사전협의할 것을 약속하고 밀약을 통해 이를 유명무실화했던 미국이 한국과의 비밀각서를 통해 사전협의를 약속할 것으로 기대했다면 미국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해 한국 정부에서 가장 강경한 입장을 취했던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었지만, 대통령 자신의 입장도 일관되지 못했다. 2003년 4월 청와대에서 장성 진급 및 보직 신고를 받는 자리에서 "주한미군의 주둔 목적이 지금까지는 대북억지력이었다면 앞으로는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균형자로서 지역안정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2004년에는 "(주한미군을) 미국이 융통성 있게 운용할 수 있게 협력"해야 하다고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동아시아에서 주한미군 역할의 유연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는데 도대체 '융통성'과 '유연성'의 차이는 무엇인가?

나아가 노무현 대통령은 2005년 3월 8일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분명한 것은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우리 국민이 동북아시아의 분쟁에 휘말리는 일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것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절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2006년 1월 19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외무장관 전략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최종 합의를 봤다.

한국은 동맹국으로서 미국의 세계 군사전략 변혁의 논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의 필요성을 존중하며, 전략적 유연성의 이행에 있어서 미국은 한국이 한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 지역분쟁에 개입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한다.

전략적 유연성에 그토록 부정적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이 2006년 1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인정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꿨을 때에는 한반도 이외의 분쟁지역에 주한미군을 투입할 경우 한국 정부와 사전협의를 한다는, 미일 간의 '밀약' 같은 이면합의가 있어야 하는 것이 순리에 맞는다. 그렇지 않은가?

외교부와 NSC 사무처는 양국의 입장을 균형 있게 조화시킨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전략적 유연성의 이행과정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절차도 두고 있지 않다. 한국 측은 "미래의 극히 불확실한 상황을 현재 시점에서 가상하여 그에 따른 절차를 모두 규정해 두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거니와 바람직하지 않으며" "구체적인 사안 발생 시에는 한미 협의 하에 해결책을 마련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주한미군 병력과 장비의 출입문제가 미국 정부의 판단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상황에서 일단 한국 이외의 지역으로 이동했다가 다른 지역의 분쟁에 개입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서 다시 <상편>으로 돌아가 보자. 미일간의 사전협의에 대해 기시 총리는 1960년 2월의 중의원에서 일본 측이 '노'라고 말할 경우 미국이 일본의 의사표시를 무시하고 행동할 수는 없다는 의미의 거부할 권리가 일본에게 있다는 취지의 답변을 했다. 분명히 사전협의는 사전승인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일본 외무성의 유식자위원회(有識者委員會)의 보고서가 지적하듯이 실제로 양자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일본이 원하지 않는 것을 무리하게 미국이 할 수 있을까? 반대로 사전승인이 필요하다고 합의했다고 하더라도 미국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할 경우 일본이 거부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보고서, p.8).

마찬가지로 한미동맹이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하다면 미국의 요청을 거부하기 어려우며, 반대로 미국의 입장에서 한미동맹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면 한국의 반대를 무릅쓰고(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이 동맹의 약화, 나아가 해체(?)로 이어질 수도 있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미국이 고집할 수 있을까?

이때 중요한 것은 동맹 사이의 신뢰이며, 양자 사이의 전략적 이익과 부담의 균형이다. 그런데 한국 국내에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반대했던 사람들은 미국의 입장보다는 중국-대만 사이의 분쟁이나 북한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미리 상정하려는 경향이 짙었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은 중국만을 염두에 둔 것도 아니며, 양안관계가 악화돼 미국이 개입해 미중간의 군사적 충돌이 불가피해졌다고 가정할 경우에도 우리가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는 분쟁의 규모나 성격 또는 미국의 개입 정도나 중국의 태도와 행동에 의해서도 달라질 것이다. 전략적 유연성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미중 분쟁은 우리에게 '대안(對岸)의 불'이 아니며 결코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다.

2006년 3월 22일 한국국방연구원 초청 국방포럼에서 닝푸쿠이 주한중국대사(당시)는 한미 양국이 합의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 "제3국(물론 중국을 지칭하는 것임, 필자)을 대상으로 행동하게 되면 우리는 관심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라고 견제했지만, 그는 동시에 한국은 중국과 미국 중 양자택일할 필요가 없다고도 말했다. 중국을 지나치게 의식할 경우 미국의 눈에는 한국이 중국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으로 비춰질 것이며, 한국에 대한 미국의 신뢰는 저하될 것이다.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조금은 극단적인 비유이지만 우리는 자신의 패를 보여주고 포커 치는 꼴이 돼 버렸다.

천안함의 판도라 상자

1960년 미일안보조약이 개정되었을 때 도입된 '사전협의' 제도와 그것을 형해화(形骸化)시켰던 미일 '밀약'의 내용을 검토하면서 주한미군의 문제에 초점을 맞춰 한미동맹의 역사를 되돌아봤는데, 이제 글을 마무리할 때가 됐다.

세 가지만 간단하게 지적하고 싶다. 우선 북한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진 진보 정권 10년에 비해 남북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어 있다. 지난 두 정권은 북한을 현실적인 위협의 대상이자 협력의 대상으로 인식했지만 후자에 방점을 두었다. 때로는 이것이 한미 사이에 약간의 온도차를 감지하게 했으며, 국내에서는 대북정책만이 아니라 사회의 다른 분야에까지 영향을 미쳐 소위 '남남갈등'이 심화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반면, 현 정부는 협력의 대상으로서 보기보다는 북한을 위협의 대상으로 보려는 경향이 더 강하다. 물론 가장 큰 원인은 북한에 있지만, 지난 10년간의 대북지원이 북한의 핵개발이나 미사일개발로 이어졌을 뿐 북한 인민의 생활 향상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북한에 대한 강한 불신감이 저변에 깔려있다. 아마도 일반 국민들에게 북한은 이 두 시각 사이의 어느 지점을 왔다 갔다 하고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북한이 우리에게 현실적인 위협을 주고 있다고 하더라도, 특히 북한의 대남도발에 대한 우리의 대응에는 많은 현실적인 제약이 따르며 한미동맹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다는 것이다. 1960년대 중·후반의 사례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북한의 도발에 대한 한미 간의 대응의 차이가 한미 '동맹의 딜레마'를 초래하는 요인이었지만, 최근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에 나타나 있듯이 이제는 오히려 한국이 본의 아니게 미국이 관여하는 분쟁에 휘말릴 수 있다는 것을 우려하고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걱정되는 것이 있다. 지난 3월 26일 발생한 천안함의 침몰이 북한에 의한 것으로 밝혀질 경우 일부에서는 "북한이 다시 도발하려 할 경우 북한의 지휘체계와 주요 공격수단을 타격하거나 제거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확실히 하는 것"(이상우 국가안보총괄점검회의 의장)이 대북대응조치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마치 1960년대의 박정희 대통령의 발언을 연상시킨다. 당시 보복을 주장하는 한국을 설득했던 것은 미국이었다. 대북 공격능력이 없어서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면 북한은 한국에 대해 보복할 것인데, 지금 서울과 수도권에는 전 인구의 거의 절반이 거주하고 있다. 또한 한강 이북에는 아직 미 2사단이 주둔하고 있으며 서울에는 미국인이 1만3천 명 이상이나 거주하고 있는데(시사저널, 1062호 2010년 2월 24일), 미국은 자국민의 안전이 위태로워질 수 있는 한국의 대북응징에 동의할지 의문이다. 북한의 어뢰공격에 의한 명백한 증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중국이 반대할 것은 자명하다.

▲ 지난 13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안보총괄점검회의 장면. 이명박 대통령 오른쪽이 이상우 국가안보총괄점검회의 의장 ⓒ청와대

또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일본의 대응이다. 일본은 북한의 핵만이 아니라 미사일을 자국의 안전보장문제에 있어서 사활적인 문제로 보고 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실험 이후 일본 내에서는 북한의 미사일이 일본을 목표로 하고 있는 만큼 위협을 사전에 제거하기 위한 '적기지 선제공격론'이 고개를 든 적이 있다. 과연 우리가 일본의 그런 움직임을 과도한 것이라고 자제를 요구할 수 있을까? 향후 북한이 동해상에서 미사일을 발사한다면, 북한의 핵무기 보유가 확실하게 드러난다면, 일본의 보수파들은 북한의 위협을 빌미로 군사력 증강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이다.

조만간 정부는 천안함의 침몰 원인에 대한 조사결과를 발표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형국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마지막으로 1971년 9월 23일 서울의 미국대사관이 국무부에 보낸 공전(空電)의 일부를 인용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한국에게 있어서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한국은 소련,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일본도 인접해 있다(중략) 한국의 지리적 위치는 바뀌지 않는다. 대규모의 국방비와 12,000마일의 방어가 세 강대국에 인접한 작은 국가의 안보문제에 대한 답은 아닐 것이다.

한국의 안보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주변 강대국의 이해를 세련되게 균형 잡고 조정하는 외교에 더 의존해야 하고, 군사력에는 덜 의존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It seems clear that Korea's security in longer range time frame must depend more diplomacy, a skillful balancing and manipulation of the interests of its neighbours, and less on military strength). (Airgram-336 From Embassy Seoul To Department of State<September 23, 1971>, Subject: Economic Military Analysis and Modernization Plan, Record Group 59, General Records of the Department of Stated, Subject Numeric Files, 1970-73, Political & Defense, Box #1862, National Archive 2, College Park, Mary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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