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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언제나 '보복'을 원했고 미국은 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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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언제나 '보복'을 원했고 미국은 말렸다

지난 3월 9일 일본 외무성은 1960년 미일안보조약 개정과 1969년 오키나와 반환 당시 미일 양국이 합의한 '밀약' 문제에 관한 외부위원회의 검토 결과를 발표했다.

국제정치학자인 조진구 도서출판 '전략과 문화' 대표가 외부위원회의 검토 보고서와 그간 한국과 미국이 공개한 외교문서를 분석해 미일간의 '밀약'이 한미동맹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는 기고를 보내왔다.

조진구 대표는 네 편의 글을 통해 미일 밀약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와 관련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 볼 예정이다. 일본 도쿄대에서 60년대 한미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조 대표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의 한미관계가 60년대의 추이와 유사하다고 말했다. <편집자>


☞상편 "주한·주일 미군 이동에 '사전협의'란 없다"
☞중편 "주한미군 일방적 철수를 막아라" 선봉에 선 차지철"

아나키한 국제체제와 동맹의 딜레마

국가는 왜 동맹을 형성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자. 국가가 추구하거나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 국가의 목적이라고 하면, 모든 국가에 공통된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가 생존이며 외부로부터의 침략에 대해 안전(security)을 확보하는 것이다. 국가보다 상위의 권위나 권력을 가진 중앙정부가 없는 무정부상태(anarchy) 하에서 국가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과 생존을 확보하기 위한 보호수단이 항상 필요한데, 그 중의 하나가 동맹이다.

그러나 아나키라는 국제체제의 특성상 동맹 간의 조약도 한 국가 내에서의 법률과는 달리 궁극적으로 강제력이 없기 때문에 동맹의 파트너가 합의를 반드시 지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우려하게 된다. 또한 때로는 동맹이 지원해줄 것이라고 믿는 동맹의 파트너가 무모하고 공격적으로 변해 자국의 의사에 반해 동맹국이 일으킨 전쟁에 휘말릴 위험도 있다. 이것을 동맹의 딜레마라고 하는데, 앞의 경우를 '방기의 우려(fear of abandonment)' 뒤의 경우를 '연루의 우려(fear of entrapment)'라고 부른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으로 동맹이 처한 상황이 변하면 딜레마의 정도나 우려의 정도도 달라진다.

국력의 차이가 분명한 강대국-약소국 간의 비대칭적 동맹의 경우 약소국은 강대국의 정책 변화에 따라 언제든지 버림받을 수도 있다고 우려하기 때문에 기회 있을 때마다 약속을 지킬 것을 강대국에 요구하는 반면 강대국은 원하지 않는 전쟁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한다.

한미 '동맹의 딜레마'와 북한

한미동맹의 기원은 한국전쟁을 종결시키는 과정에서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맹의 딜레마를 회피하려는 미국의 의도는 조약 체결과정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한국전쟁의 명예로운 종결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정전협정 체결 후 미군을 신속하게 철수하는 대신 정치·외교적 수단과 더불어 유엔을 중심으로 한 다자주의의 틀 속에서 한국의 안보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정전협정 체결에 완강하게 반대했던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국과의 상호방위조약 체결은 이승만이 정전협정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미국이 한국에게 제공한 당근책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아이젠하워의 의도는 조약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하나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한국 유사시 미국은 헌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한국을 지원하게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 인정하는 한국 영토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무력공격에 대해서만 조약상의 의무를 다하면 된다는 것이다(제3조와 <미합중국 양해사항>)

다른 하나는 조약의 유효 기한을 규정한 제6조였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이 조항을 포함시키는 것에 대해 끝까지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자신의 뜻을 관철시지는 못했다. (1960년 1월에 개정된 미일안보조약은 10년 간 효력이 발생한 뒤 한미상호방위조약과 마찬가지로 체약국 일방의 통고 후 1년 뒤에 실효한다)

미국은 본의 아니게 발생할 수도 있는 남북 간의 무력충돌에 미국이 휘말리는 것을 우려했으며, 북한의 도발적인 행동에 대한 미국의 소극적인 대응은 한국에게 미국이 조약상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갖게 했다. 그런 의미에서 유사시 미국의 자동적인 군사개입을 의미하는 주한미군의 존재는 매우 중요했으며, 따라서 한국으로서는 대북 방위에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던 미군의 일방적인 철수나 감축은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막아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았던 북한은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한미 간의 동맹의 딜레마를 교묘하게 이용했다. 한국에서 '남조선 혁명'을 조장하기 위해 게릴라를 보내고 주한미군 철수나 반미시위를 선동했으며, 비무장지대에서는 한국군이나 미군에 대한 군사적인 도발을 저지르고는 군사정전위원회 소집을 요구해 자신들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선전하는 데 이용했다.

북한의 도발에 대해 한미 양국이 서로 다른 시각과 대응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북한이 바라던 것이었다. 한국은 북한의 도발이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군사적인 보복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보았지만, 한국의 적극적인 대응이 남북 간의 더 큰 충돌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미국은 한국을 회유하고 때로는 한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직접 협상을 벌이기도 했던 것이다.

▲ 1966년 서울을 방문한 존슨 미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1968년 위기와 한미동맹의 균열(龜裂)

미국의 베트남 정책에 한국이 적극적으로 호응하면서 형성된 한미 간의 밀월관계를 깨뜨린 것은 북한의 도발이었다. 1965년 5월 박정희 방미 시 자신의 전용기를 보내주는 호의를 베풀었던 존슨 대통령은 1966년 10월 말 마닐라에서 열린 베트남 전쟁 참전국 정상회의를 마친 뒤 서울을 방문했다. 당초 예정에 없던 것이었지만 한국 측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성사된 6년여만의 미국 대통령의 방한이었다. 존슨은 박정희의 지도하에 이룩한 한국의 경제성과를 한껏 추켜세워 주었는데, 이는 이듬해 5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110만 표 이상의 차이로 윤보선을 누르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존슨 대통령의 방한에 맞추기라도 한 듯 북한군이 미 제2사단 지역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북한의 대남도발은 점차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되었으며, 1968-69년에 이르러 한반도는 한국전쟁 이후 최대 위기에 직면해 한미 '밀월'은 갈등과 긴장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갔다. 물론 그 원인은 한국과 미국에 대한 북한의 도발이었지만, 그보다 더 심각했던 것은 그러한 북한의 도발에 대한 한미 간의 인식과 대응의 차이였다.

1968년 1월 북한의 무장 게릴라가 박정희 암살을 목적으로 청와대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데 이어 이틀 후에는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의해 나포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박정희는 재발 방지를 위해서는 보복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보복행동을 자제하도록 요구하는 미국에 대해서도 강한 불신감을 갖게 되었다. 또한 나포 선원의 석방을 위해서라지만 한국을 배제한 채 북한과 직접 협상하는 미국은 한국의 대미 신뢰감을 현저하게 저하시켰다.

존슨 대통령은 박정희에게 친서를 보내 북미 간의 판문점 협상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 한국에 대한 추가적인 군사원조 제공 의사를 밝혔지만, 그것으로 박정희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2월 8일 존슨의 친서를 전하러 온 포터 대사에게 박정희는 한국은 전쟁을 원하지 않지만 북한이 다른 사건을 일으키면 방관할 수 없으며, 이것은 곧 한국에서의 전쟁을 의미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전했다.

포터와의 회담에서 박정희는 '전쟁'이라는 말을 자주 언급했는데, 이것은 미국에게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미국을 괴롭혔던 이승만을 연상시키는 악몽의 재래였다. 한국의 대북 보복공격이 북한에 의한 또 다른 보복을 불러오는 악순환이 거듭되는 것을 막기 위해 존슨 대통령은 국방부(副)장관을 역임한 사이러스 밴스를 특사로 보내 설득하려 했지만, 양국 간의 인식 차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데 그쳤다.

밴스가 서울에 도착하기 전날 한국 정부는 회담 의제와 입장을 포터 대사에게 전달했다. 이에 따르면 한국은 우선 작전통제권의 수정을 요구했다. 즉, 북한군 게릴라가 침투해도 유엔군사령관(주한미군사령관)의 허가가 없으면 한국군을 작전에 투입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을 한국의 통보만으로 작전이 가능하도록 수정하자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개정 요구였다. 북한의 거듭되는 도발에도 불구하고 군사적인 대응을 주저하는 미국의 행동을 보고 한국 국민은 유사시 미국이 조약상의 의무를 다할 것인가를 의문시하고 있다면서 미국의 자동개입을 문서상으로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한국방위를 위해 치룬 희생이나 투자에 비춰볼 때 한국이 미국의 방위공약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오히려 한국에 대한 미국 내 여론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환기시키고, 오히려 북한의 침투를 전면 전쟁으로 확대시킬 수 있는 한국의 보복이야말로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보았다.

2월 12일 밴스와의 회담에서 박정희는 북한이 또 다른 도발행위를 자행할 때에는 한미 양국이 함께 보복하자고 설득했지만, 밴스는 장장 5시간 반에 걸쳐 보복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박정희의 '설교'를 들어야 했다. 다음 날 밴스 특사는 정일권 총리에게 북한에 의한 도발이 재발할 경우 한미 양국이 "협의해서 함께 결정"하는 것이 최선이며, 미국 대통령도 의회가 비준한 조약의 범위 내에서만 행동할 뿐이라면서 조약 개정에는 난색을 표명했다.

이에 최규하 외무장관은 '합의의사록'과 '공동방위선언'이라는 두 문서를 수교하면서 밴스를 압박했는데, '합의의사록'에는 "미국 정부는 한국 내 또는 한국에 인접한 미군의 인원과 장비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하기 전에 한국 정부와 협의하고 동의를 얻는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AGREED MINUTES BETWEEN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Verbatim Text of Korean Proposed Draft>, Record Group 59, General Records of the Department of States, Office of the Executive Secretariat, Korean Crisis("Pueblo Crisis") Files, 1968, Lot File, Box #5, National Archive 2, College Park, Maryland)

*The Government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will consult with, and obtain the consent of,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Korea, prior to making any substantial changes in forces of the United States within the Republic of Korea or closer thereto.

1960년 미일안보조약 개정 시 미국이 고려했던 것은 '협의(joint consultation)'뿐이지만 한국은 이에 더해 '동의(consent)'를 요구했었기 때문에 미국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크게 벗어나 있었다. 이에 밴스는 합의의사록에 포함된 내용에 대해 자신이 존슨 대통령에게 적절한 건의를 하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최규하 외무장관에게 보내는 데 그쳤다.

귀국 후 밴스는 북한에 대한 단독행동을 취하지 않을 것이라는 박정희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선제공격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으며, 그것이 한미관계의 잠재적인 위험요인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대통령에게 전반적인 대한정책의 재검토를 권고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밴스의 권고에 따라 존슨은 카첸바하 국무차관을 책임자로 지명하고 현재의 대한정책을 포함해 향후 한국에서의 미국의 정치, 경제, 군사적 목적과 북한의 대남정책 등에 대해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조진구, <존슨 정권 후반기의 한미관계>, 『한국과 국제정치』제19권 제3호, 2003)

EC-121 격추 사건과 한미 갈등의 재연(再燃)

워싱턴의 새로운 대한정책의 책정은 11월 15일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닉슨이 당선되면서 차기 정권의 손으로 넘겨졌지만, 신 정권 출범 후 3개월도 되지 않아 또 다시 한미관계를 요동치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번에도 주역은 북한이었다. 4월 15일 동해안을 비행 중이던 미 해군 정찰기 EC-121이 북한군에 의해 격추된 것이다.

사실 이때 닉슨 신 정권의 대한정책은 아직 연구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닉슨 대통령은 국가안보결정각서(NSDM) 제4호(1969년 1월 20일자)를 통해 존슨 정권 때 시작된 대한정책 재검토 작업을 5월 1일까지 완성해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에게 제출하도록 지시했으며, 3월 21일에는 국무장관, 국방장관 및 중앙정보국장에게 보낸 국가안보연구각서(NSSM) 제34호를 통해 '한국에 관한 비상사태계획(Contingency Planning for Korea)'을 4월 25일까지 완성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신 정권 출범 후 처음으로 작성된 CIA의 1월 30일자 정보평가서(Special National Intelligence Estimate)는 비무장지대나 후방지역에 대한 북한의 침투는 계속될 것으로 보았지만 "평양은 한국을 침공할 의도가 없으며" 한국과 미국에 대해 '중대한 도발'을 자행할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69-1971, Vol. ⅩⅨ, Part 1<이하, FRUS>, 2010, pp.1-4, 8)

사건 발발 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북한의 평양방송은 북한 영공을 침범한 미군기를 격추했다고 보도했으며 4월 18일에 군사정전위원회를 열자고 요구했다. 이것은 푸에블로호 나포 때와 마찬가지로 북한과 회담을 하는 동안 미국은 보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며, 군사정전위원회에서 미국의 침략성을 비난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반면, 푸에블로호 사건 때 존슨 정권의 초기 대응의 잘못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닉슨이었지만 막상 위기가 닥치자 전 정권의 대응을 그대로 답습했다. (Chuck Downs, Over the Line: North Korea's Negotiating Strategy, 1999, pp.146-147) 미국 정부 내에서는 북한의 정찰기 격추는 계획적인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지만, 군사적 대응이 북한의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데에는 모두 회의적이었다.

국무부의 휴즈(Hughes) 정보조사국장은 푸에블로호 사건 때 보복을 주저했던 미국을 희생양으로 삼아 김일성의 생일을 자축하려는 계획적인 도발이라고 분석했다. CIA도 한국에서의 '남조선 혁명'의 실패를 만회하려는 김일성의 의도에서 자행된 것이며, 미국이 보복하지 않거나 해도 일회성의 제한적인 것에 그칠 것이라는 판단이 깔려있었다고 봤다.

또한 주기적인 도발이 미국 국민들로 하여금 해외주둔 미군에 대한 환멸감을 갖게 해 주한미군의 감축 나아가 사실상의 철수를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에 미국의 제한적인 보복에 의해 북한이 입을 물리적인 손실보다 얻는 이익이 훨씬 많다고 판단했다.

이런 상황에서 워싱턴의 고위 정책결정자들이 군사적인 행동을 선택지에서 배제했던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레어드 국방장관은 군사적인 옵션 가운데 북한 내 두 곳의 비행장에 대한 공습이 최선이지만 이로 인해 북한이 한국에 대해 대규모의 공격을 감행했을 때 "한국에서의 심각한 대립을 우리가 지금 관리할 능력이 있는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미국 국민들에게 정찰비행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적절한 호위를 제공하고 북한이 미 해공군의 활동을 계속 방해할 경우 북한군 기지를 공격하겠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닉슨에게 보고했다.

닉슨 대통령조차 NSC가 마련한 두 가지 옵션 가운데 '아주 제한적이며 신중한(extremely limited and measured) 보복을 한 차례 하는 것'(강조는 필자)보다 전투기 보호 하에 정찰비행을 계속하고 추가적인 도발을 자행할 경우 보복하겠다는 것을 북한에게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FRUS, pp.32-42)

닉슨의 명령에 따라 정찰비행은 2주 만에 재개되었지만, 대북 보복을 둘러싼 한미 간이 골은 더욱 깊어져 갔다. 4월 18일 박정희는 포터 대사를 불러 강력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북한의 도발은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북한에 대해 보복하든가 공해상에서의 활동 권리를 포기하든가 양자택일밖에 없다고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명했다.(FRUS, pp.43-44)

8월 21일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에서 박정희는 지난 10년 동안 무력통일 준비를 해 온 김일성은 한국을 공격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으며, 그 시기는 미국의 대한정책이 변화할 때라고 못 박았다. (FRUS, p.98) 정책의 변화라는 것은 주한미군의 철수를 의미했으며, 박정희는 이 문제를 아시아 국가들이 자국 방위에 대한 1차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괌 독트린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했던 것이다.

워싱턴의 미 정부 고관 사이에서는 한미관계가 중대한 전환점에 와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북한에 의한 소규모 공격과 전면적인 공격으로부터 동맹국 한국을 방위하는 것만이 아니라 북한의 도발에 대한 한국의 보복 또는 북한에 대한 한국의 제한적인 공격과 이에 대한 북한의 보복에 의해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하는 것을 막는 쪽으로 초점이 옮겨지게 되었는데, 그 뒤에 미국의 '연루의 우려'가 있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닉슨 독트린의 첫 번째 적용 대상이 된 한국

1969년 3월 21일자 NSSD 제34호에 따라 브라운 전 주한대사(국무부 부차관보)를 책임자로 한 태스크포스가 한국에 관한 비상사태계획 작성을 담당했다. 한국문제 태스크포스는 380쪽이 넘는 분량의 초안에서 미국의 목표를 남북 간의 전면적인 충돌 방지, 강대국 간의 협조 유지, 한국의 자위능력 향상, 공산주의로부터의 한국 보호, 한국의 경제발전과 정치적 안정 증진 등으로 설정했으며, 이 목표 달성을 위한 미국의 정책을 '정책적 연속성(policy continuity)'과 '(한국의) 자립능력 가속화(accelerated self-reliance)'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요컨대 미국은 주한미군 주둔을 포함해 한국에 대한 방위공약을 준수하지만 동시에 미국의 부담을 점차 줄여 나가겠다는 것이었다. (FRUS, pp.65-68)

이것은 닉슨이 7월 25일 괌에서 밝힌 신정부의 아시아정책과도 일맥상통한다. 닉슨은 미국은 조약상의 의무를 준수하지만 아시아 국가들은 자국방위의 1차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이것을 '괌 독트린'이라 부르는데, 이듬해 2월 18일 의회에 보낸 외교교서를 통해 '닉슨 독트린'으로 공식화되었다) 불행하게도 한국은 괌 독트린의 첫 번째 적용 대상 국가가 되었다.

8월 14일 닉슨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NSC에서 헬름스 CIA 국장은 북한의 군사력과 김일성의 정책에 대해 설명하면서 북한이 한국을 공격하려면 외부 지원이 필요하며, 현재로서는 공격할 의도가 없다는 평가를 내놨다. 레어드 국방장관은 미군의 적절한 지원을 받으면 한국은 북한의 공격을 막을 수 있으며,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북한과 중국이 연합해서 공격해도 미군이 증원될 때까지 방어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한국의 능력 향상 즉 '한국화(Koreanizing)'를 향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닉슨은 현재의 주한미군 병력이 1970-75년에도 적절한지 검토해야 하며, 미 의회도 병력 감축을 환영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문제는 시기였다. 닉슨은 중소대립과 베트남문제로 지금은 시기가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지만 3개월 뒤인 11월 24일에는 주한미군 감축 시기가 왔다면서 연말까지 현 주한미군 병력을 절반으로 줄이는 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했다. (FRUS, pp.89-95, 117)

워싱턴에서 주한미군의 감축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것은 키신저였다. 2개 사단(적어도 1⅓사단)이 대북방위를 위한 적정수준이라고 보았던 합참은 주월한국군의 귀국 전에 미군병력의 감축을 고려하는 것은 '경솔한(imprudent)' 처사라고 이의를 제기했으며, 로저스 국무장관은 주한미군의 감축이 미칠 정치적 파장을 고려해 "감축한다는 원칙은 정해두되 한국과 즉시 협의한 뒤 최종적으로 결정"하자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3월 4일 열린 NSC에서 키신저는 감축할 병력 수준을 결정해야 하며, 그 뒤에 차관급 위원회가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준비하면 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닉슨 대통령은 결국 키신저의 손을 들어주었다. 3월 20일 키신저는 1971년 6월 말까지 주한미군 2만 명(1개 사단)을 감축하기로 결정했다는 국가안보결정각서(NSDM) 제48호를 국무·국방 장관, CIA 국장, 예산국(BOB) 국장, 합참의장에게 하달했다. (FRUS, pp.132-133, 142-150)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세 가지다. 첫째는 추가적인 감축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1개 사단 감축과 더불어 나머지 1개 사단의 후방 이동을 상정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혹은 주월한국군은 더 이상 주한미군의 감축을 막는 지렛대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셋째는 EC-121 격추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대남정책에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는 것이다. 특히, 북한은 1964-1968년 사이의 '대남혁명노선'을 버리고 평화공세로의 전환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주한미군 감축을 미국의 중요한 대한정책의 변화라고 봤을 가능성이 있다.

어쨌든 미국의 결정은 3월 27일 포터 대사를 통해 박정희에게 전달되었는데, 예상대로 한국 측의 반응은 맹렬했다. 미국은 주한미군을 감축하는 대신 1971년부터 5년 동안 1년에 2억 달러의 군사원조를 제공하고 경제원조도 늘리겠다고 약속했지만, 이것은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에서의 약속 위반이라고 거세게 항의했으며, 한국군 현대화에 대한 구체적인 지원내용을 보장하지 않는 한 1975년 이전의 철수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배수진을 쳤다. (한국외교문서,『한국안보에 관한 한·미간 협의(국군현대화 5개년 계획 및 주한미군 감축) 1970-1971. 전8권(V.1 기본문서, 1970.4-8)』)

결국 감축 실행을 위한 한미 간의 교섭은 난항을 거듭했다. 박정희에게 보낸 5월 26일자 친서에서 닉슨은 완전철수도 아니며 2만 명은 주한미군의 ⅓도 안 되며, 충분한 군사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잔류 병력도 미국이 한국에서 손을 떼지 않을 것이라는 명백한 증거라고 설득했지만,(FRUS, pp.152-154) 박정희의 배신감을 누그러뜨릴 수는 없었다.

또한 오랫동안 소문만 무성했던 주한미군의 감축이 현실로 드러나자 한국의 언론, 여론, 정계 모두 당황스러워 했고 쇼크 상태에 빠졌다. 미군 감축을 저지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라고 한국 정부에 요구했지만, 미일안보조약과 달리 주한미군의 병력에 중요한 변경이 발생해도 미국은 한국과 사전협의를 할 조약상의 의무가 없기 때문에 교섭의 여지는 전혀 없었다. 한국은 1971년 4월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 이후로 연기할 것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당초 계획보다 빠르게 1971년 3월 27일 미 제7사단의 철수가 완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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