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직은 취업 시장에서 꽤 인기가 높다. 방송직이 아주 좋아서라기 보다, 딱히 흠잡을 데 없는 차선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을 앞 둔 학생들이 가진 선택지를 살펴보다 보면 이는 이해할 만하다.
제1의 선택지는 기업체 취업이다. 기업체와 연봉의 규모, 직종 구분에 따라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이는 어쨌든 적극적으로 시장에 뛰어들어야 하는 일이다. 그동안 학생으로서 가져왔던 기성 세대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 등을 깔끔하게 접고 세상에 몸을 던져야 하는 것이다. 학생과 회사원 사이의 정체성의 단절도 각오해야 하거니와 회사원으로서 겪게 될 주체성이나 자기 결정권의 상실도 걱정되는 부분이다.
또 다른 선택지는 고시를 정점으로 하는 각종 공무원 시험이나 자격증 시험들이다. 이건 기회비용이 참 크다. 대입 치른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한번 시험의 세계로 들어가야 하는 답답함도 답답함이지만, 그 이후의 안정이 얼마나 '흥미로울지'도 의문이 들 법하다. 시험이 어려운 만큼 그 직업이 주는 사회적 보상이 큰 건 사실이지만, 대신 일의 고단함도 만만치 않다는 걸 준비하면서 전해 듣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학원에 진학하여 공부를 더 할까. 공부에 확고한 뜻을 세운 게 아니라면 이건 밥벌이를 그저 유예했을 뿐이라는 부담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다시 밥을 구하기 위해 돌아왔을 때 학력은 높아져 있겠지만 나이는 그만큼 더 많아져 있을 것이다.
물론 인생은 그보다 훨씬 다양하게 설계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밥벌이'만을 기준으로 고민할 때,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한국 사회가 놀랍도록 적은 선택지를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고 싶은 일, 좋아 하는 일,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최소한의 안정성이 있는 경제 생활을 영위한다는 것에 대해 한국 사회는 유독 냉혹하다. 이 지점에서 방송직은 제3의 길로 떠오른다. 나름의 창의성을 발휘해 프로그램이나 뉴스를 만들면서, 지금까지 가져왔던 젊은이로서의 비판적 시선도 배신하지 않고 계속 견지하면서, 어른으로서 안정된 경제 생활도 영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송사 공채 시험은 늘 엄청난 경쟁률을 자랑하는 호사를 누린다.
▲ 방송사 공채 시험은 늘 엄청난 경쟁률을 자랑하는 호사를 누린다. 사진은 지난 2008년 주요 언론·방송사 채용 설명회. ⓒ뉴시스 |
하지만 막상 방송직에 들어서고 나면 이 길이 기대하던 것만큼의 새로운 길은 못 된다는 것을 제일 먼저 깨닫는다. 일단 전 직종이 월급쟁이 회사원이라는 정체성은 다른 기업과 다를 바가 없다. 시장 논리에서는 좀 벗어난 업무를 하지 않느냐고? 예능 PD나 드라마 PD의 경우, 시장을 벗어나기는커녕 오히려 시장의 최첨단에 서서 영업 사원의 역할 및 프로그램 제조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금세 자각하게 된다. 권력을 비판하는 시사 PD나 기자는 좀 다르지 않냐고? 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굳이 안 되는 것도 없지만 되는 것도 없는' 게 또 그 영역이다. 권력과 시장을 비판하고 고발한다곤 하지만 한 세계 안에 지속적으로 몸을 담가 변화를 이끌어내기 보다는 늘 그 언저리를 스쳐 지나간다. 큰 권력은 두고 작은 권력만 손대는 눈치 작전도 가끔 펴야 한다. 또 매일 매일 새로운 아이템과 새로운 사건을 찾아 하루살이처럼 모래성을 쌓고 무너뜨리기를 반복해야 한다. 방송직에 뭔가 엄청나게 다른 것을 기대했다고? 손오공이 도망가 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생활인으로서의 방송직이란 결국 시장과 권력의 하위 단위에서 방송 생산을 위해 애쓰는 월급쟁이일 뿐이다.
그러나 이 하잘 것 없는 월급쟁이 생활인들이 다른 지점은 분명히 있다. 자신의 이름을 건 프로그램의 감독으로서, 혹은 사회의 공공재인 전파를 통해 시청자가 주인인 뉴스를 내보내는 사람으로서의 명예심이 그것이다. 그 명예심이야 말로 방송인들이 엄청난 노동 시간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결국은 자기 만족에 그치는 게 아닌지 끊임없이 회의하고 자조하면서도 일에 매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내가 내보내는 이야기는 나의 책임 하에 있으며 세상 사람들의 행복과 기쁨, 정의로움에 이바지 한다는 명예심. 비록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이 자기 자신 뿐이더라도, 그것이 과대망상일지라도 그 명예심은 방송인들을 조금은 다른 사람으로,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조금은 나은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돕는다.
명예를 잊은 방송인은 추해지기 쉽다. 시장과 권력의 무서움을 늘 그 언저리에서 생생하게 목격해온 터다. 정치 경제적 상류층으로의 입성을 꿈꾸며 권력의 수족이 되어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원초적인 욕구를 펼치기에도 방송인은 나쁘지 않은 발판이다. 효율적이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왔다. 명예가 없는 권력으로부터 명예를 잊은 방송인들이 특파되어 온다. 너희는 월급쟁이 생활인일 뿐이니, 방송은 권력과 시장의 마음에 맡겨두라면서. 그렇게 진실과 소통의 큰 채널이 닫힌다.
명예로운 것이 늘 승리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명예가 없거나 잊은 사람과 명예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의 싸움은 늘 어렵다. 명예가 없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부끄러움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승패와는 무관하게 명예로움과 당당함을 존경하며 우러러본다. 더욱이 그 명예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일 때는 더 말해 무엇 하랴. 방송 장악을 둘러 싼 명예를 잊은 자들과 명예를 지키는 자들의 싸움이 MBC의 장기 파업으로 그 최종장에 다다랐다. 하지만 역사와 공익의 명예의 전당에 이 싸움이 누구의 승리로 기록될지, 누가 존경을 받으며 기억될 지는 이미 처음부터 결정이 되어 있다. 현업 방송인들이 지키고자 하는 명예는 바로 시청자의 명예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MBC가 그저 월급쟁이 생활인으로 돌아가지 않는 가장 큰 이유이다. 이미 이 싸움은 대리전이 되었다. 앞으로 이어질 싸움이 전면전이건 게릴라전이건, 우리는 새삼 누가 어떻게 명예로웠으며 누가 저열하게 불명예스러웠는지를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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