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가 발간하는 <한반도포커스> 7호(2010년 5·6월호)를 전재합니다.
<한반도포커스>는 극동문제연구소의 교수진과 외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한반도 문제 관련 정책소식지입니다. 이번 7호는 '천안함과 6자회담 : 전망과 과제'를 주제로 5편의 글이 실렸습니다. 5월 첫째 주 동안 매일 1편씩 소개됩니다.(☞제7호 전체 내려받기)
1972년 설립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는 북한ㆍ통일 문제에 관한 연구와 정책 제안 활동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는 최고의 민간 연구기관입니다. <편집자>
1. 북한의 전략
북핵문제의 심각성이 무뎌져 가고 있다. 북한이 두 차례의 핵실험을 통하여 사실상 핵보유국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도,1) 우리 국민들의 북핵문제에 대한 관심이 적어졌다.2) 금년 외교부 연두 대통령 보고에도 북핵문제가 우선순위에서 밀렸다고 보도된 바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국민경제의 침체일 수 있고, 북한에 대한 자신감일 수 있다.
그러나 북핵문제에 대한 우리 국민의 위기의식 둔감에는 북한의 전술도 주효했다. 북한의 전술은 '先 부인, 後 사실 확인'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공격의 예봉을 피하면서 기정사실화하는 전략이었다. 이 부분에서는 그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핵무기 보유 여부에서 북한 태도의 변화이다. 핵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해 온 북한이지만 2003년 4월 미·북·중 3자회담 시 별도 장소에서 북한 대표 이근 외무성 미국담당 부국장은 미국 대표 켈리(James Kelly) 차관보에게 핵 보유를 언급했다. 그러나 2004년 6월 제2차 6자회담 기간 중 북한 수석대표 김계관 외무성 부상(미국담당)은 미·북 양자협의 시 이근의 발언은 전술적인 것이었다며 핵 보유를 부인하였다. 그러다가 2006년 10월 핵실험을 단행하였다.
북한은 고농축 우라늄(HEU) 계획에 대해서도 수시로 말 바꾸기를 했다. 2002년 10월 3일 김계관 부상은 방북한 켈리 차관보에게 HEU 계획을 부인했다. 그러나 그 다음 날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인 강석주는 군부와 협의한 결과라고 하면서 미국은 북한의 농축우라늄 활동의 중단을 요청할 권한 없다고 하며 HEU 계획을 시인하였다. 2003년 8월 제1차 6자회담에서 북한 수석대표 김영일 외교부 부상3)은 농축 우라늄보다 더 한 것도 가지고 있다고 언급하여 그 말의 뜻에 대해 이중적 해석이 가능하게 하였다.
북한은 6자회담 내내 HEU 계획을 부인하면서도 모호성을 유지하였다. 2007년 2월 13일 6자회담에서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UEP: Uranium Enrichment Program)에 따른 핵무기 개발과 기존 핵탄두 해체 문제 등의 사항은 불능화 완료 및 북한의 신고(Declaration)가 접수된 후인 3단계(Phase Ⅲ) 과정에서 차후 협의"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2007년 12월 1일 북한은 UEP 관련 의혹을 부인하였다.
하지만 2009년 5월 22일 2차 핵실험 후 6월 13일 북한 외무성은 자체의 경수로 건설이 결정된 데 따라 핵연료 보장을 위한 우라늄 농축 기술 개발이 성과적으로 진행되어 시험단계에 들어섰다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9월 4일에는 UN 안보리 의장에게 우라늄 농축 시험이 성공적으로 진행돼 결속단계에 들어섰다는 내용이 담긴 서한을 발송했다.
물론 북한은 핵무기용 고농축이 아니라 경수로용 저농축 우라늄 생산을 시험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도 북한은 그 동안 부인해 왔던 우라늄 농축 시설을 어떻게 설치한 것이냐는 의문에 답을 해야 한다. 북한은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할 것이지만, 어디서부터 끊어야 할지 북한 스스로도 고민이 클 것이다.
북한은 핵문제와 관련한 주장에서 롤러코스트를 탄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의 위기의식은 둔화되었고, 북한은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단계적으로 달성해 갔다.
2. 6자회담과 미국의 역할
현재의 6자회담은 계속되어야 한다. 현재의 6자회담 포맷은 장·단점이 있으나, 우리나라로서는 특별하게 다른 대안이 없다. 협상이 지지부진한 것은 협상의 포맷 때문이 아니라 북한의 핵개발 동기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1997년 시작된 4자회담은 김대중 대통령 취임 6개월 후 6차 회담을 끝으로 종결선언도 없이 막을 내렸다.4) 미국과 북한은 4자회담 기회를 금창리 지하 터널 문제 논의의 기회로 활용하였다. 4자회담이 지속되었으면 북핵문제는 상황이 달라졌을 수 있다. 만들어진 협상체는 상황을 관리하는 데 유익하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미·북 양자 또는 일본과 러시아를 뺀 4자, 또는 유럽연합(EU) 등을 추가하는 확대 등 어느 방안도 현실적이지 않고 타당성도 없다.
우리는 6자회담 틀 안에서 활발한 미·북 접촉에 관용적이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외교적 과시의 명예보다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더 중요하다. 별로 사용하고 싶지 않은 표현인 북한의 소위 "통미봉남"에 대해서는 수 없이 논의되었다. 북한의 전술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통미봉남이 6자회담의 포맷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대미관계의 진전을 위해 북한 스스로 우리의 의견을 구하였던 선례가 있었음을 상기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핵문제의 해결 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사건이나 사안들은 대부분 미국이 의제를 주도하였다. 이를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6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① 1992년 1차 핵 위기의 도화선은 의심되는 두 장소에 대한 사찰 문제였다. 보다 구체적으로 IAEA의 사찰이 문제였으나, 이는 미국이 주도하였다.
② 1990년대 후반의 북한 미사일 문제는 미국의 최대 관심사였다. 2000년 10월 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조명록 차수와 미국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교환 방문 등으로 합의 직전까지 발전하였지만, 2001년 1월 클린턴 행정부의 종료와 함께 해결에 실패하였다.
③ 1998년 금창리 지하 핵시설 문제는 한국의 정보 협조로 미국이 제기하여 한 때 위기의 문제로 발전했으나 협상 끝에 미국의 접근이 허용되어 현지 시찰 후 핵시설과 무관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협상에서 미국은 쌀 60만 톤을 제공하는 '접근료'를 지불하였다.5) 핵시설로 주장된 지하 터널이 핵과 무관한 시설로 판명됨에 따라 금창리 문제는 정보 과장의 전형으로 비판을 받았다.
④ 농축 우라늄 문제는 2002년 10월 미국 켈리 차관보가 방북하여 의혹을 제기함으로써 2차 핵위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⑤ BDA 문제는 2005년 9월 미 재무성이 제기하여 2007년 4월에 해결될 때까지 1년 반 동안 북핵 협상을 중단시켰다. 이를 기회로 북한은 2006년 7월 대포동 2호 발사, 10월 1차 핵실험 등을 감행하였다. 결국 미·북 양자 합의에 따라 동결된 북한 예금은 북한으로 송금되었고, 북핵 협상은 재개되었다.
⑥ 핵 불능화 및 핵 검증문제는 2007년 10월 3일 6자회담 합의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핵신고 합의를 이행치 않았지만 미국은 북한과 양자 협상으로 핵신고를 이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북한이 다시 검증을 위한 시료채취를 거부하자 미국은 에너지 지원을 중단하였다. 결국 북한은 2009년 4월 광명성 2호 발사, 5월 2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북핵문제는 우리에게 직접적 위해가 되는 문제이지만, 이상에서 개괄했듯이 의제가 제기되고 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미국은 독점적으로 개입하였다. 일본은 납치자 문제로 북한과 자주 논쟁을 벌였지만, 한국은 물론 중국을 포함한 다른 어느 나라도 6자회담에서 선도적으로 제기할 북한과의 양자관계 의제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
3. 북핵 협상의 미묘함(subtlety)에 대한 이해
외교에 있어서 '미묘함(subtlety)'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상대방이 사용하는 용어의 기피에서도 보인다. 상대방이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정의하여 쓴 용어를 우리가 다른 목표와 전략을 가지는 내용으로 바꾸어 사용하는 것은 선점권을 빼앗긴 것이 되어 협상에서 불리하다고 생각하고 대체 용어를 찾는 경향이 있다. 물론 오해를 막는다는 목적이 더 크다.6)
앞에서 언급된 것 이외에 6자회담에서 용어의 선호 또는 회피의 사례는 다음과 같이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① '동시(simultaneous)'라는 용어는 우리가 해야 하는 조치가 회담의 핵심사항이라는 잘못된 인상을 줄 수 있고, 북한이 특정한 사안에 대해 환상을 갖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으며, 시간 개념이 강하여 우리는 이에 반대하고 대신 '순차적(sequencing)', '병렬 또는 병행(parallel)', '단계적(step by step)'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② 북한이 주장하는 '보상(compensation)'이나 '주고받기(give and take)' 등의 용어를 미국은 철저히 기피했다. 국제규범을 어기는 불법행위에 대한 보상은 있을 수 없다는 논리이다. 그래서 '보상(compensation)'이라는 용어 대신 '상응조치(corresponding measures)'와 '상호 조율된 조치(coordinated measures)'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북한은 2차 회담에서 미국이 체면문제를 내세우고 있다면 '보상'이라는 용어를 다른 말로 바꿀 수 있다고 하였다.
③ 과거에 실패한 정책이 된 특정 용어도 기피한다. '핵 동결'의 상징이 된 '94년 「제네바 기본합의」의 실패에 따라 미국은 '동결'이라는 어휘 자체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 북한이 주장하던 '동결'은 '초기단계조치(phase I)'로 불려지고, 결국은 가역적이 되었지만 '불능화(phase Ⅱ)'로 발전하였다.
이상과 같이 용어를 둘러싼 논쟁은 쟁점 사안에 대한 해결 순서의 선후 문제가 핵심이기도 하려니와 보상의 의미의 함축 또는 배제를 위한 협상 전략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한국과 미국의 주장으로 6자회담의 어느 합의문에도 북한이 주장한 '일괄타결'과 '동시적', '주고 받는 식' 등의 표현은 없으며 대신 '단계적', 병렬적', '조율된' 등의 용어가 사용되었다.
4. 북핵문제에 대한 종합적 고찰
북핵문제가 발생한 이래 끊임없이 제기되는 질문은 아래와 같이 4개로 요약할 수 있다.
① 북한은 왜 핵무기를 보유하려는가?
② 북한은 핵을 포기할 것인가?
③ 북한이 핵을 가지면 왜 안 되는가?
④ 북한이 핵을 포기하게 하는 전략은 무엇인가?
첫째 질문은 북한의 핵개발 의도에 관한 것인데, 이에 대한 3가지 주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안보용이다. 북한이 국방력을 강화하여 미국이나 남한의 공격을 방지하고, 필요시에 남침을 하기 위한 것이다. 북한은 경제사정으로 남한과 재래식 무기에 의한 무기경쟁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어 핵을 개발하게 되었다. 안보 불안이 핵개발의 필요조건이다. 국제사회의 충실한 일원으로서 외교를 하는 남한은 국제규범과 미국의 압력으로 핵개발을 못한다는 점이 북핵의 충분조건이다.
② 협상용이다. 북한은 충분한 정치적·외교적· 경제적 보상을 받으면 핵을 포기할 것이다. 북한은 중국과 미국의 압력 때문에 핵을 영구히 보유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같은 민족에게 핵무기를 사용하겠는가? 1998년 금창리 지하 터널도 7개월 협상 끝에 결국 보상(쌀 60만 톤과 감자사업 지원)을 획득하고 공개하였다.7)
③ 핵개발 동기를 한 가지로 단정할 일이 아니다. 첫째나 둘째 이유 중 어느 하나만 답이 아니라 둘 다 맞다. 상황에 따라 안보용이기도 하고 협상용이기도 하다. 상황에 따라 비중을 달리한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다.
둘째, 북한의 핵포기 가능성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첫 번째 핵보유 이유에 따라 달라진다.
① 안보용이라면 안보 문제 해결이 핵포기의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충분조건은 아니다. 핵 보유가 북한의 안보이익에 반하는 상황이 핵폐기의 충분조건이다. 이 경우 핵폐기 가능성은 높지 않다. 무정부적 국제정치의 속성에 의해 안보불안을 떨쳐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안보불안은 국가들이 가지는 속성이다.
② 협상용이라면 보상의 내용과 직결되어 있다. 주고받기의 패턴이 적용된다. 충분한 상업적 이익이 필요조건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치적 명분의 이익이 필요하다. 이것은 충분조건이다. 정치적 명분은 상업적 이익보다 어렵다. 그러나 핵보유가 협상용이라면 안보용일 경우보다는 폐기에 합의할 가능성이 높다.
③ 혼합적 목적은 위의 두 답에서 유추하여야 한다. 다른 추가적 설명이 필요할 것 같지 않다.
셋째, 북한이 핵을 가지면 안 되는 이유는 우리 입장에서의 이유와 남북한 공히 가지는 이유가 있다. 북한이 핵을 가져야 하는 이유와는 동전의 양면 관계이다. 북한이 안보용으로 핵을 가진다면 우리는 안보불안을 느끼고 안보딜레마에 빠져야 한다. 유사한 무기를 확보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핵보유를 추진하자는 이른바 '핵 주권론'을 주장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국제환경 하에 놓여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북한처럼 국제정치의 무정부성을 즐길 수 없다. 우리가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북한이 핵을 포기하게 해야 한다. 또 우리가 가지지 않기 때문에 북한도 가져서는 안 된다. 북한이 핵을 가져서는 안 되는 이유 중 남북한 공통의 이유는 한반도 통일을 위해서이다.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는 한 통일을 위한 남북한 간의 평화적 과정이 이루어지기 어려우며, 국제적으로는 중국· 미국·일본 등 한반도 주변국이 모두 핵을 가진 한반도의 통일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넷째, 북한이 핵을 포기하게 하는 전략이다. 결국 이 질문은 답을 스스로 가지고 있다. 북한 스스로 포기하게 하는 것은 협상에 의한 포기이다. 물론 협상도 핵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의 협상과 핵을 유지할 수 있는 상황에서 협상에 의한 포기와는 보상의 범위와 규모가 달라질 것이다. 다른 각도에서 질문은 북한의 핵을 제거하는 전략이다. 이는 군사전략의 문제이다. 그러나 군사력에 의한 핵무기 파괴는 우리의 피해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련이 핵을 개발하여 비축하기 시작한 1950년대 맹아기에 미국의 군사전략가들은 소련의 핵무기고에 대한 예방적 공격을 검토하였으나, 소련의 보복 공격에 의한 피해 가능성으로 더 이상 발전시키지 못했다. 우리도 같은 딜레마에 놓여 있다.
5.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필요충분조건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다음과 같이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 북핵문제는 북한의 안보용이라는 대전제에서 접근해야 한다. 이 시각이 북핵문제의 근본적 해결과 통합적 접근의 이성적 토대이다.
② 북핵 프로그램의 진전을 방지해야 한다. 북한은 플루토늄 핵무기화에서 우라늄 농축과 무기화 과정으로 이행하여 이를 진행시키고 있다고 판단해야 한다. 북한은 돌출사건을 우라늄탄의 실험을 위한 기회의 창으로 삼는 음모를 꾸밀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의 핵 확장은 북핵문제의 해결이 불가능한 단계로 들어섰다고 보아야 한다.
③ 그랜드 바긴에서 언급하고 있는 "핵심부품 폐기와 동시에 북한에 대한 확실한 안전보장의 제공"의 의미에 대한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 첫째, 여기에서 '동시에'에 특히 신경을 써야 한다. 미국은 여전히 '선 북핵 폐기'를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 미국은 '불법에 대한 보상은 없다'라는 원칙과 '관계정상화는 양자 관심사항의 해결후 가능하다'는 외교 관습을 고수하고 있다. 둘째, 핵심부품과 비핵심부품의 구분은 언제 어떻게 합의하고 수량과 위치 등의 검증 문제는 어떻게 다룰 것인지가 관건이다. 검증 문제가 언제든지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점에 항시 유념해서 접근해야 한다. 셋째, 자칫 "안전보장"에 대한 정의에서 혼선이 있을 수 있으며 "제공"의 의미하는 바와 그 시점이 명확하지 않으면 역시 오해를 촉발할 수 있다. 핵폐기와 평화체제는 직접 연계할 사안이 아니다. 이 경우 북한에게 핵폐기를 무한정 지연시킬 구실을 줄 수 있고, 결국 북핵 폐기는 장기 미제 현안으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평화조약 등 평화체제 구축은 핵폐기 과정에서 논의는 하되 평화체제는 핵폐기 후에나 실현될 수 있는 과제가 되어야 우리가 안전하게 평화체제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는 구실을 자꾸 만들어 주지 말아야 한다. 미국과 중국이 핵폐기 우선 해결을 원칙으로 하도록 우리의 외교적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④ 통일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북핵 폐기를 추진해야 한다. 북한이 핵을 보유하고 있는 한 평화통일은 어렵다. 통일문제에 대해서는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강대국의 이해가 우리와 다를 수 있다. 독일 통일에서 강대국의 입장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충분히 보았다. 분단으로 인한 인적 자원과 국토이용의 왜곡현상, 그리고 통일 후 지역 불균형의 치유를 위한 비용과 치유 기간 등은 독일 통일 사례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8)
북한은 위기 극대화 전략을 써왔다. 북한은 돌출된 사건의 해소 보다는 이를 위기 극대화의 기회로 삼았고, 계획된 대량살상무기(WMD) 계획의 확대기회로 이용했다. 2~3천만 달러의 BDA 사건이 대포동 2호 발사와 핵실험의 구실이 되었다. 그리고 신고 및 검증 문제가 광명성 2호 발사와 2차 핵실험으로 발전하였다.
우리의 안보와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서 북한 핵은 제거되어야 한다. 북한이 핵 보유를 계속 고집한다면 중국과 미국, 일본 등의 반대로 평화 통일은 불가능하다.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국제관계와 남북관계에서 어떻게 통일의 돌파구가 생길 수 있겠는가? 북한의 핵 고수 정책은 통일을 두려워함에 다름 아니다.
정치에서 예측의 무망함을 경험한다. 특히 국제정치에서는 더욱 그렇다. 정치의 세계에서는 미래를 예측하고 전망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와 외교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註>
1) 힐러리 클린턴(Hillery Clinton) 미 국무장관은 2010년 3월 30일 캐나다에서 열린 G8 외무장관 회담 뒤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이미 핵무기를 가진 북한과 같은 불량정권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위협을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2) 여론조사 전문가에 의하면 여론조사에서 나타나는 통일문제 또는 대북문제에 대한 무관심은 매우 뚜렷하여 심지어 북핵 실험에 대한 정치권의 난리법석에도 불구하고 이에 놀라거나 흥분하기보다는 대체로 '경제에 나쁜 영향을 끼칠까 봐 걱정된다' 정도였다고 한다.
3) 1차 6자회담 북한 수석대표는 아시아 담당 김영일 부상이었다. 미국을 담당하면서 오랜 동안 핵문제를 담당해온 김계관 부상이 수석대표가 아닌 점에 대해 의아했으나, 2차 회담부터는 김계관 미국담당 부상으로 교체되었다.
4) 4자회담 1차 회의는 1997년 12월 9~10일 간 개최되었고, 마지막 회의는 6차 회의로서 1999년 8월 4~9일 간 개최되었다. 한국에서는 1998년 2월 김대중 정부가, 미국에서는 부시 정부가 들어섰다.
5) 당시 쌀 1톤의 가격은 약 350달러였으므로 쌀 60만톤의 가격은 대략 2억 달러 정도였다.
6) 영국 체임벌린 수상의 히틀러에 대한 유화정책(appeasement policy)이 결국 2차 세계대전을 불러왔기 때문에 이후 유화정책이라는 어휘는 외교정책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 어휘가 사용되지 않는다 하여 정책도 없어진 것은 아니다.
7) 금창리 지하 터널 문제는 1998년 8월 7일 뉴욕 타임스가 금창리에 지하 핵시설이 있다는 의혹을 보도하여 노출된 사건이었다. 11월 16일부터 미국과 북한 간에 네 차례 협상 끝에 금창리 지하 시설에 대한 "접근"('사찰'이 아니었음)이 합의되어 1999년 5월 미국 방문단이 현지를 시찰한 결과 거대한 터널이지만 핵시설로는 구조가 적합하지 않아 핵과는 무관한 시설로 규정하고 「제네바 기본합의서」의 위반사항은 발견하지 못했다. 1년 후 2000년 5월에 2차 방문을 하였으나 1차 방문과 상이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10월 12일 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조명록 차수의 미국 방문 시 「공동 코뮈니케」에서 금창리 지하시설에 대한 접근이 미국의 우려를 해소하는 데 유익하였다고 발표하였다. 6자회담에서 북한은 미국이 농축 우라늄 시설에 대한 증거를 대면 해명을 해 주겠으며 필요하면 금창리 식으로 하면 된다는 입장이었다. 북한은 미국이 금창리 터널을 본 것에 대하여 북한의 자주권 훼손의 값으로 3억 달러를 내라고 하여 미국이 60만 톤(약 1억 8천만 달러 상당)의 식량을 가져왔다고 언급한 바 있다. 협상장에서는 의혹 시설 접근을 위해 '입장료'를 지불하는 방식을 '금창리 해법'이라고 불렀다.
8) 독일은 통일 후 매년 800억 유로를 구동독 지역에 투입하고 있다. 1990년 통일 당시 동·서독 경제 격차가 1:3 이었으나 20년 후 현재는 2:3이 되었다. 2009년 독일 할레(Halle)경제연구소는 동독 지역이 서독 지역과 같은 수준이 되는 데는 앞으로 20년이 더 필요하다고 예측하였다. 45년 분단을 치유하는 데 40년이 소요되는 것이다. 우리의 분단은 65년이 되었다. 남북한 격차와 분단 기간 등을 독일의 경우와 비교하면 통일에 대한 생각이 결연해진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