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유승호' 뒤 '친구1'…아역 배우의 일그러진 초상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유승호' 뒤 '친구1'…아역 배우의 일그러진 초상

[모 피디의 그게 모!] 삼류

스물세 모 - 아역 배우

매섭게 생긴 중학생을 캐스팅해야 했다. 중요한 배역이었다. 연기 학원에 등록된 아이들은 다들 예쁘장해서 좀체 이미지에 맞질 않았다. 그 중 괜찮아 보이는 소년을 하나 발견해서 불렀다. 소년은 눈매에 걸맞지 않게 무척 수줍어하며 사무실을 들어섰다.

자 이제 싸우는 거야. 화났어. 다 없애버리고 싶다는 느낌을 줘 봐. 소년은 시키는 대로 몇 가지 표정 연기와 간단한 대사, 몸의 품새를 보여주었다. 소년은 하얗고 가늘었다.

그도 하얗고 가늘었다. 여름 교복의 푸른 깃 사이로 나온 가느다란 긴 목을 살짝 삐뚜름하니 기울였으며 소위 '짝다리'로 서 있는 모습이 어리고 오만한 왕자님 같았다. 다들 스포츠 머리를 하고 있는 교실에서 그는 약간 탈색된 듯한 갈색 머리를 혼자 눈에 닿을 만큼 길렀다. 턱을 살짝 들고 서 있던 그는 선생님의 소개를 받고 빈 자리를 찾아 앉았다. 전학생이었다.

우리는 왜 유독 그 녀석만 머리를 길 수 있는지 궁금해 했다. 처음부터 밝힐 생각은 없었던 듯 싶으나 굳이 거짓말을 해서 감출 것까지도 없었으리라. 그는 자신이 탤런트라고 했다. 우리는 탄성을 질렀으나 곧 의아해했다. 탤런트? 텔레비전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그는 물론 탤런트였다. 그러나 주인공 급이 아니었다. 그의 역할은 친구 1 정도였다. 주요 역할을 맡은 아역 배우에게, 우리 나가서 놀자 정도의 대사 한 줄을 치고 뛰어나가는 아이. 실제로 보는 그는 수려한 미모를 자랑했지만, 카메라를 잘 받지 않는 편이었는지 TV에 나오면 별로 대수롭지 않아보였다. 그는 학습지나 탁상용 스탠드 같은 지면 광고에도 종종 얼굴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 역시, 별로 부럽거나 대단해보이거나 멋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급격하게 식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의 모습에는 어딘지 도도한 모양새가 있었다. 우리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리는 그가 주인공 뒤의 병풍이거나 어쩌다 대사 한 줄을 받는 처지임을 별명으로 상기 시켰다. 우리는 그를 '3류'라고 불렀다.

그 별명은 그가 전학 오던 날 풍겼던 고고한 아우라를 순식간에 벗겨냈다. 아이들은 오가며 야 삼류, 이거 해 봐, 저거 해 봐, 식의 시답지 않은 농을 걸어댔다. 하지만 그도 만만하진 않았다. 당연하게도, 그는 그 별명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누가 그를 그렇게 부를 때마다 그는 파르르 떨며 반항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싸움을 못 했다. 그 나이 때 남자 아이들에게 싸움은 중요하다. 그는 몇 번 달려들었다. 그리고 두어 번 확실하게 두드려 맞고는 결국 포기했다. 그는 사람들이 부르는 소리를 애써 무시했지만 아이들은 지겹게 그를 삼류라고 불러댔다. 대답을 안 하면 대답 안 한다고 욕했다. 아이들은 잔인했다.

여학생들로부터의 인기는 사실 당사자가 아니면 잘 모르는 일이긴 하다. 그러나 그는 눈에 띄는 인기도 없었다. 세상이 떠나가게 삼류 소리를 달고 다니는 소년을 좋아한다는 것도 그 나이 대 소녀들에게 좀 부끄러운 일이긴 했을 것이다. 차라리 탤런트가 아닌 수수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소문나는 게 낫겠지. 감정의 손익 계산서는 의외로 분명하다. 어차피 탤런트라서 좋아한다는 말 듣기 딱 좋은데, 굳이 삼류라는 소릴 듣는 애를 좋아할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좀 괜찮다 싶은 녀석들이 떠들썩하게 몇 반 누구의 편지를 받았다는 식의 소문이 나는 와중이나 가까운 친구들끼리 주고 받는 소식통 속에 그를 둘러싼 연애 사건은 전무했다. 나는 그와 나름 가까운 입장이었는데도 전혀 알지 못했다.

나는 면전에서 그를 삼류라고 불렀던 기억은 나질 않는다. 사람은 자신에게 불리한 기억은 잊기 마련이니까. 그게 옳지 않은 일이라는 감각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기억난다. 하지만 뒤에서 친구들과 그를 지칭할 때는 그렇게 불렀다. 내가 인정하고 좋아하는 친구들도 그가 거만해 보인다고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심지어 너는 좀 더 부드러워질 필요가 있다고, 이런 부분을 고쳐야 된다는 훈수까지 두어 고맙다는 인사를 받기까지 했다. 돌이켜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아마 나의 이야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고, 사실 그리 고맙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를 잊었다. 우리는 다른 고등학교를 갔고 그가 얼마나 활동을 더 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 후로 그를 TV나 지면 광고에서 보지 못했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그는 화제에 오르지 못했다. 그렇게 '삼류'는 기억에서 사라졌다.

▲ 힌국방송(KBS) 2TV에서 방영된 <공부의 신> 중 한 장면. 소년은 하얗고 가늘었다. 아이들은 잔인했다. (사진은 본문 내용과 관련 없음) ⓒKBS

5년이 지난다. 지금 와서 보는 5년은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당시의 5년은 까까머리 중학생이 군 입대를 앞둔 나이가 될 만큼의 긴 시간이다. 나는 만화방에 가기 위해 모자를 눌러쓰고 상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시간이 남아도는 하릴없는 청춘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에 동승자가 있어서 좁은 공간이 더 비좁게 느껴졌다. 안경에 지저분해 보이는 피부에 퉁퉁한 살집의 남자였다. 영락없이 나와 같이 만화방 행일 것 같은 인상이로군! 나는 참을성 없이 몸을 흔들거나 했을 것이다. 갑자기 그 남자는 두터운 안경을 밀어 올리며 나를 보더니 반갑게 인사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익숙한 목소리. '삼류'였다.

그 하얗고 가느다랗던 삼류였다. 딱 봐도 보일 만큼 배가 나왔고, 도무지 유행과는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이는 멜빵 바지 같은 것을 걸치고 있었다. 매끄럽던 피부는 푸석푸석해져 뭐가 많이 나 있었고 머리 카락도 윤기 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살짝 탈모가 진행되기 시작한 상태였는지, 이마가 넓어져 있었다.

그 도도하고 자존심 강하던 소년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는 순하게 웃으며 반갑다고, 어떻게 지내냐고 물어왔다. 나는 놀라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싫어 우물우물 반갑다고 대답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만화방 소파에 몸을 묻으며 더 길게 이야기하지 못한 걸 후회했다. 맙소사. 우린 '삼류'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내가 캐스팅한 소년은 원래 예상했던 중요한 배역 말고 그보다 한 단계 덜 중요한 배역을 맡았다. 배역명은 '중학생 1'이었다. 대사는 두 줄 정도. 촬영은 잘 끝났고 그는 편집 단계에서 살짝 더 잘려서 방송에 나갔다. 이 방송으로 그는 친구들의 영웅이 되었을까 아니면 비아냥 거리가 되었을까.

내 친구가 어떤 체념과 변화의 시간을 겪었을지 나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하지만 보통의 아이들은 아무것도 결정되어 있지 않은 시기를 살아가도록 허락될 때, 아역배우들은 이미 자신이 '주인공'인지 '친구1'인지가 결정 난 상태로 세상에 노출된다. 그들이 겪어야 할 사춘기는 남다를 것이다. 더 이상 배우가 아닌 삶을 살고 있을 과거의 내 친구와, 내 친구의 시간을 지금 살고 있는 아역 배우들이, 동료와 친구를 포함한 세상의 폭력에 지지 않기를 기원한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