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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김지하 시인의 '신경제론'·끝] 혁신

그 혁신은 크게 보아 세 가지다.

첫째, 어린이와 여성과 쓸쓸한 대중, 인민 중심의 후천개벽(終万物 始万物) 주장을 배신한 공자의 십익(十翼) 등 인의예지(仁義禮智)론.

둘째, 명나라 소손녕(蕭遜寧)이 '거품(霧實)'이라고 매도한 '산이 산이다(艮爲山)'의 주역(周易)의 비과학성.

셋째, 어린이, 여성, 쓸쓸한 인민 대중의 현대적 문화 욕구인 월인천강(月印千江)과 개체·융합(identity·fusion)의 여율(呂律)의 미학을 짓뭉개는 수천 년 전 낡아빠진 율려(律呂) 일변도의 平均律이 그것이다.

문제는 중국 자체가 아니라 요즘의 중국인이고 그 중국인 중의 극소수의 자칭(완전히 위장이다) 공산당들, 그것도 최고 간부와 그 자식 되는 사장(社長)들인 것이다.

이들이 중국 망신을 다 시키고 있다.

도대체 이 21세기에 무슨 짓들인가?

아시아인의 한 사람으로서 묻고 있는 것이다.

어찌할 터인가?

같은 아시아인, 같은 동아시아 사상사의 학생, 같은 신지중해를 끼고 사는 한 한국인으로서 말하라면 대답은 우선 크게는 한 가지다.

후천화엄개벽의 모심, 여성해방, 전혀 비작위적인 월인천강에 토대한 무봉탑(無縫塔) 건설이다.

다음 작게는 다섯 가지다.

첫째, 후천개벽을 제시한 동학의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 선생은 후천개벽의 첫 시작을 동학의 궁궁부적(弓弓符籍)이 중국에 상륙할 때라고 했다.

명심하라. 오늘의 후천개벽 부적은 '태극궁궁(太極弓弓)'이 아닌 '궁궁태극(弓弓太極)'이다. 그러나 태극궁궁을 오운육기론에서 강조하는 '운정'이라 보고 궁궁태극을 '해문'으로 보아 '아니다, 그렇다(不然其然)'로 인식한다면 별로 어려울 것 없다. 아니, 도리어 운기론이나 역학의 개벽성·생동성에 일치할 것이다.

둘째, 여성해방 이야기를 글 초입부터 강조해 왔다.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전략적 관점, 조그마한 처신술에서 우주 변동론에 이르기까지도 즐겨 대입시키는 정치적 전략 방면에서 여성 문제를 말해볼까? 금방 말한 '운정과 해문'은 오운육기론의 용어이니 다름 아닌 우주 생명학이다. 따라서 달이나 물이나 여성문제, 부부의 성생활과도 직결된다.

나는 동학의 '궁궁(弓弓)'과 '태극(太極)'의 관계를 중국과 연결해서 말했는데, 궁궁은 곧 그 근원이 '혼원(渾元)'이니 곧 동아시아 중세 이후 여러 비결 속의 양궁(兩弓), 즉 혼돈과 비풍수(丕風水)에 해당하고 태극은 그 근원이 '일기(一氣)'이니 누구나 다 알 듯이 사상(四象)의 태원질서(太元秩序)에 해당한다. 그런데 바로 이 태극과 궁궁이 중국의 혁신과 연관될 때 해문과 운정처럼 운기(運氣)의 우주생명적인 불연기연(不然其然) 현상으로 움직인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니 여성과 남성 사이의 사회적 권력현상의 서로 어느 한 편을 완전히 소거하거나 없앨 수 없는 당연한 음양 원리가 된다는 것이고 소장성쇠(消長盛衰)이며 상호 보합원리가 된다는 이야기인데 현대는 아무리 어떤 측면에서 협조해봐도 결론은 여성 쪽, 즉 궁궁이 해문이요, 남성쪽 즉 태극이 운정이어서 이리 접수해야만 중국인 필수의 우주생명학인 오운육기의 생동적 차원이 열리게 된다는 말이다.

나는 결코 이 말을 지금 함부로 하고 있지 않다.

중국 여성의 자살자가 그리도 많은 것과 대문명국 중국의 어린이가 참으로 그처럼 바보 같은 무책임을 함부로 드러내는 것은 흰빛나는 소리(闇 속의 音)의 그 창의력의 차원에서 철저히 소외돼 있기 때문이다. 중국인 자신이 알고 있듯이 중국인은 내유신령(內有神靈)의 사단(四端)과 외유기화(外有氣化)의 칠정(七情)의 둥근 운용에서 벗어나면 못 사는 민족 아니던가!

살 수 있겠는가?

더욱이 중국과 한국과 일본과 동아시아 태평양의 이제부터의 혁신은 참으로 베트남, 캄차카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온 대륙과 해양에로 확대된다. 또 되어야 한다.

그러니 답은 간단하다.

여성과 어린이, 그리고 쓸쓸한 인민의 마음 속의 우주소리(音)를 지금의 현상유지용의 문(門) 안에서 밖으로 해방하여 그 흰빛을 중국과 온 세상의 어둑어둑한 무실(霧實) 위에 비추게 하라!

그때 대당(大唐)이래 전 세계와 우주 위에 찬연한 화엄유리세계(華嚴琉璃世界)의 구체적 정치 비전으로 제시된 해충국사(慧忠國師)의 무봉탑(無縫塔)이 찬연히 빛날 것이다.

지난번 APEC에서 원자바오가 약속했던 '조화와 협력의 대중국'이 그 때 무리 없이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엔 중국인이 가지고 싶어 하는 본래의 자기 것이 모두 다 오늘의 새 모습으로 바뀌어 제 빛을 고스란히 비출 것이다.

다시 말한다.

나는 중국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중국의 미래가 참으로 밝은 빛 속에 있기를 바라는 한 아시아인이다. 부디 혼탁한 현대, 초현대의 대혼돈 속에서 그 상투적인 법고창신(法古創新)보다 훨씬 훨씬 유연하고 창의력 넘치는 여성성 주도의 입고출신(入古出新)을 단행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한 중국인 남성 경제학자의 발언이 있다.

"예부터 중국의 가장 큰 문제점은 창의(創意)보다 관성(慣性)에 흔히 매달리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중국의 가장 큰 장점은 비록 가난이나 범속함을 무릅쓰고라도 끊임없이 애써서 관행보다는 창의를 따르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이제 중국의 목전의 과제는 허황한 풍요의 모방보다는 외롭더라도 창조적인 혁신의 길을 가는 것이다. 혼신의 힘으로 그 길을 찾는 것이 바로 지금 중국이 할 일이다."

이 중국학자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겠다. 그러나 참으로 거룩한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어둠을 때려 부수는 흰빛이 아닌 '흰그늘', 어두운 문을 살며시 열고 나오는 하얀 고귀함이 느껴지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경제의 최고 영역은 미학에 있다. 그래서 동아시아 미학에서는 '산 높고 물 깊은(山崇海深) 숭고와 심오는 괴(怪) 없이 불가능하다는 명제가 있고 이때의 괴는 관성과 창의를 함께 인정하되 관성의 바다 속에서 조용히 그 반대인 창의를 찾아가는, 남들이 잘 안하는 기이한 행정을 일러 말하는 것이다.

중국은 이제 이 길을 갈 수 있을 것인가?

그 어렵고 어려웠던 19세기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태풍 속에서 이른바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길에서도 그 태풍 자체를 검은 노도 속의 흰빛으로 보려했던 담사동(譚嗣同)의 '인학(仁學)'이 있었고, 언필칭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의 길에서도 그 폭풍 자체를 '흰빛 건설의 기미를 제 속에 안은 검은 파괴력'으로 보려한 이대교(李大釗)의 '폭류론(暴流論)'이 있었던 중국이다. 중국이 대문명국인 증거는 바로 다름 아닌 이 같은 백암(白闇)에 있는 것이다.

성급한 젠더 투쟁으로 인한 남성 가부장 문화의 반동적 압도가 지배하는 유럽 안에서도 뤼스 이리가라이의 신성 페미니즘이 푸른 새싹으로 자라고 있고 극단적 남성 테러리즘이 압도하는 이슬람 세계 안에서도 무하마드 성인의 저 위대한 메카 시절 부인의 숭고한 여성존중사상인 '아크발라이 쇼쿠니아바(어둠 위에 얹은 참 빛)' 운동이 오십년째 지하에서 해맑은 지류를 형성하고 있다.

대문명국 중국에 이것이 불가능할 까닭이 없고 그로 인한 참된 의미, 탁월한 차원에서의 혁신이 지연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여기서 와타나베 마리코가 아닌 또 다른 일본 여성 지식인의 말 한 마디를 듣자. 도쿄대 경제학과의 슈나라바 이카에(舜那羅婆伊介) 교수다.

"일본은 이제 중국을 바라보고 있다. 일본 현재의 문명사 과제인 탈미입아(脫美入亞)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동서양 균형 속에서의 아시아에로의 귀향의 척도는 오로지 중국의 혁신이다. 그래서 한 가지 어려운 질문이 떠오른다. 그 혁신의 앞 줄에 여성의 모습이 서 있는가?"

나 또한 이 여성학자를 따라 질문하지는 않겠다. 오히려 어떤 의미의 확신을 가지고 말하겠다.

"중국은 바로 그것을 하고야 말 것이다."

왜?

중국은 이미 역사에서 여러 차례 '누른 치마(黃裳, 여성 왕통과 모권정치)'를 배출한 바 있다. 그 가능성에 아주 가까이 접근했던 일만도 꼭 열일곱 차례나 된다(이 역사적 사실에 관한 논의는 참으로 한·중·일 세 나라에 좋은 시절이 왔을 때 나의 조금은 전문적인 견해로서 말할 것이다. 그 이전엔 삼간다. 그만한 이유가 꼭 있어서다).

나는 여러 차례 현재 일본에서 진행 중인 여성들의 혁신 기운을 중국과 한국, 그리고 미국 자극용으로 강조해서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어찌 보면, 그리고 나는 한 없이 잘 되기를 바라면서도 중국이 도리어 그 점에서 더욱 진취적으로 나아가는 대신, 일본은 오히려 쇠미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본다.

▲ 김지하 시인. ⓒ인디코

아마도 뿌리 깊은 '다다에(수염 달린 男神)'인 자민당(自民黨) 반동의 악착성 때문이 아닐까!

아닐까?

아니기를 빈다.

일본 여성과 어린이, 쓸쓸한 소수의 피차별 인민의 높은 혁신열에 대한 나의 기대는 항상 높은 것이다. 문화적 대혁신의 성공을 기다린다.

그러나 이 역시 현대와 같은 사회역사적 문명 변동의 글로벌 열기 속에서는 아시아적 패턴 안에서의 상당한 정도의 중국의 모범 창조에 달린 문제일 수 있다.

아닐까?

그 반대이기를 빈다.

미국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스티글리츠의 중국 세컨드 버블론은 유명하다. 그리고 프랑스의 경제통 기 소르망의 중국 버블 필연론 또한 나는 한 포럼에서 내 귀로 생생히 들었다.

그러나 나는 미국이나 유럽의 전문 경제학자의 말보다 이 문제에 관한한, 유럽은 물론이지만 특히 미국의 여성 실세들의 경제혁신 노력, 문화와 문명 혁신에서의 주도적 창조력 여부에서 그 성패를 짐작한다.

왜?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라는 구절은 파우스트의 마지막 말이다. 그 때문인가? 그렇다. 그러나 여기서 한 발짝 더 구체적인 데로 나아가자. 폴 크루그먼 이야기 말인가? 소비가 현대경제의 척결점이고 그 소비는 여성이 판단한다는 그것 말인가? 그렇다. 그러나 거기서도 한 발쯤 더 나아가자. 무슨 이야기인가?

힐러리 이야기다.

보도를 보니 힐러리는 미국 여론에서 18년째 내리 남녀 다 합쳐서 최고의 존경 대상인물이다.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애틀랜타에서 휴스턴과 애리조나에서 LA나 네바다, 그리고 국립공원 일대와 오대호 등 저 광막한 '과소개활지대(過小開活地帶)' 및 동·서·중부 대도시들 주변에도 끊임없이 전개되는 저 드넓은 '과밀초류지구(過密超留地區)'가 곧 미국의 거대한 미래의 자산이듯이 미국 같은 복잡한 조건 안에서 힐러리 같은 여성 파워의 장기 숭배열은 결코 우연이 아닌 미국 문명의 전략적 대혁신의 한 분명한 조짐인 것이다. 지금 이 순간 현대 문명사의 귀추를 세세히 관측하는 자는 내 말을 선뜻 이해할 것이다.

오바마를 둘러싼 유색인종, 아시아와 히스페닉, 그리고 시빌 데모크라시 일반과 아직 미확정적인 혼돈질서 속의 수많은 신세대는 힐러리 안에서 새로운 혁신 지향의 동력이 될 것이다.

저 유명한 조지 소로스의 한 마디가 있다.

"미래의 돈은 힐러리의 것이다. 왜냐하면 미래의 돈은 크루그먼의 말처럼 눈과 코가 달려서 진짜 엄마를 찾아갈 터이니까(2009년 6월 30일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의 인터뷰)."

이미 소로스는 돈과 마음의 관계를 애당초부터 제대로 아는 경제 문명이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바로 그 마음의 대표가 엄마요, 모성이요, 모체(母體)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럽과 중국의 엄마다.

사상.

노자(老子)의 이른바 '현빈(玄牝)'이고 또한 노자의 이른바 '현람(玄覽)'이다. 이미 해의 불에너지 대신 그 예감으로 가득 찬 빛의 시대를, 그리고 도리어 그 빛을 촉발하는 강력한 달의 물의 벨트 시대, 음의 시대, 애기의 시대, 포용과 자비와 생명의 시대 이야기는 이제 인문학이나 철학이나 미학이 아닌, 천문학과 생태학과 동력학의 테마가 되었다.

그에 관련한 사상이 힐러리의 엄마를 결정하고 그 엄마가 미국의 시장을 결정하고 그 엄마와 시장, 그것을 '미국 마음속의 물(마크 존슨의 the body in the mind)', 즉 새 시대의 '산알'이 결정한다.

문제는 중국이 이 '산알'에 관심이 있느냐에 달려 있다. 산알은 물과 마음, 우주와 생명, 돈과 물의 관계를 압축한 불교의 사리와 같은 핵심미립자, 새로운 시장으로서의 신시, 호혜시장, 엄마들의 시장인 이른바 '비단 깔린 장바닥'이다.

비단 깔린 장바닥이 곧 산알이고 혁신이다. 중국은 이 이미지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충분히 그러리라고 믿고 있다. 지금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 젊은 중국 여성 시인의 시 구절이다.

내가 지금 엄마에게서 찾는 것은
이것입니다.
달걀.
달걀 속에서 나오는
병아리의 첫 울음소리
엄마는 그런데
누구세요?

마지막으로 한국 이야기를 해보자. 물론 남북으로 분단돼 있어 복잡하다. 그러나 조짐은 분명 있다. 특히 여성 주도성과 연관된 혁신 차원에서 한국은 중국, 일본, 그리고 미국이나 유럽의 생각보다 훨씬 더 직결돼 있다. 남자들이 지배하는 지식과 경제 그리고 공론 사회는 이 넷 또는 다섯 나라 사이에서 수십 년에 걸쳐 축적 순환 성장해온, 어찌 보면 페르낭 브로델의 '콩종튀르'와 같은 여성들 사이의 환류시스템을 거의 모르거나 무시해오기 일쑤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이것은 무서운 힘이다. 그리고 이것이 세계 신문명, 그 화엄개벽과 모심의 호혜·교환·획기적 재분배의 따뜻한 자본주의를 복승(複勝)시키고 확충(擴充)시키는 기본 축적력(장기 지속의 새로운 자본과 문화적 창조력)이다.

따라서 정치적으로도 매우 깊숙이 밀착돼 있다. 나는 이것이 동아시아·태평양의 신문명을 결정할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이렇게 볼 수 있다.

한국 사회 각 방면에서 어마어마하게 커지고 있는 '엄마 아이콘'과 '여성 실천력'과 '여성 경제력'의 그 지독한 '모심(축적력)'이 다름 아닌 스스로 그 힘을 대표한다고 으스대는 한 여성권력의 미래를 점칠 수 있게 하는 저력이요 배경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편견 없이 점을 쳐봐도 점괘는 역시 원효괘(元曉卦)를 못 벗어난다.

'비슷하지만 아니다(似然非然).'

왜?

일본 자민당 반동과의 뗄 수 없는 밀착 때문이다.

그래서 그 힘은 일본과 미국, 중국과 북한의 어떤 형태의 '대밀월(大蜜月)'에 힘입은 기상천외의 '극우-극좌 결탁'으로 탈권을 시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혁신과는 아득히 멀 뿐 아니라 점괘 역시 시커먼 솔가루찌꺼기일 뿐이다.

그런데 이때 나타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정반대의 괘상이니 수운괘(水雲卦)다.

'아닌 듯하지만 그렇다(不然其然).'

이른바 개벽운(開闢運)이고 동시에 화엄기(華嚴氣)이니 다름 아닌 '오운육기두(五運六氣頭)' 현상이다.

한국만 아니라 미국, 중국, 일본, 북한에 여성 주도의 대혁신이 도저히 안될 듯 하지만 필연코 된다는 것이고, 동시에 여성권력 자체가 탄생할 것 같지만(또 어떤 곳은 현실로 탄생할 수도 있지만) 도리어 남성 권력이 각 방면의 실질적 여권을 절대적으로 옹립하는 근간에서 성립한다는 이른바 '운정 해문(雲丁 海門)' 등의 복합률(複合律)이 선다는 이야기가 된다.

한국의 개벽괘가 '천지'가 아니고 '흰그늘'인 바로 그 까닭이다. 나의 혁신 이야기는 끝났다. 그리고 그 결론은 결국 중국의 혁신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것이다.

그 대신 먼저 말한 대로 '태극궁궁(太極弓弓)'을 앞에 세우더라도 어쩔 수 없는 '궁궁태극(弓弓太極)'의 실제를 인정하는 여성, 어린이, 쓸쓸한 대중이 주체가 되고 주변 소수민족과 노인, 여러 중생만물과 함께, 또한 동아시아·태평양 중심성 바깥의 전 지구상의 탈중심적 여러 문명, 민족들, 바다와 섬들, 텅 빈 대륙들을 모두 다 거룩한 우주 공동주체로 들어 올려 높이 모시는 팔괘, 즉 '팔여사율(八呂四律)'의 여성성 주도의 월인천강(月印千江)적 대화엄개벽에 의한 신시무봉탑(神市無縫塔), 그야말로 '비단 깔린 장바닥으로의 혁신'일 것이라는 바로 그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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