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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까지도 동아시아 옛 전통으로 돌아오려 하는데…

[김지하 시인의 '신경제론'] 혁신 (4)

이미 일본의 맑시스트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가 일찍이 제안한 바 있는 중국 고대의 진정한 공생경제(共生經濟)인 팔상시(八湘市)와 정전법(井田法) 등이 모두 다 실제로는 '산 위의 물(山上之有水)' 체제인 신시의 일정한 제도화의 결과인 점을 중국 공산주의 이론가들 자신이 거듭거듭 밝힌 바가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팔상시와 정전법 또는 그 발전적 변형인 기전제(箕田制)보다 오히려 현대와 같은 대전환기에 더욱 적합성이 있을 '호혜·교환·획기적 재분배'의 그 획기성의 근거가 될 여성적 혼돈율인 '팔여사율'이라는 우주율을 남성지배의 문을 열고 해방시켜야 하는 것이 중국 경제제도의 진정한 혁신의 길이 아닐 것인가?

일본 흉내내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일본까지도 동아시아의 옛 전통과 그 슬기로움으로 돌아오려고 하고, 그 앞장에 일본 여성들의 혁신적인 료조나 레키조나 아메요코의 호혜시장 관심과 함께 앙양되고 있는데, 이천년 이전의 공자, 주역, 율려를 세계 통일과 인류문명 대혁신의 방향으로 지금 막 내세우고 있는 처지의 중국 자신이 도리어 일본 여성보다도 한참 못하다면 이를 어찌할 것인가?

또 호주 외무상의 한마디.

"좀 점잖고 적절하게!"라는 공자 말씀이 안 나오고 배기겠는가?

시세를 결정하는 금리 조정 따위로 혁신이 되는가? 그것도 파괴라는 말을 쓸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 이제 문제는 흰빛이 무엇인가만 남는다. 논리적으로 그렇다.

무엇이 흰빛인가? 역시 토요타와 삼성인가? 리콜의 장본인 말인가?

호리바 마사오의 '못' 이야기인가? 그것만이 이노베이션인가? 그것은 이미 중국도 조금씩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중국의 '霧實(蕭遜寧의 故事에 나오는 거품)' 가능성은 여전하지 않은가! 도대체 어찌할 것인가?

여성 문제는 정치 문제라고 하자!

그럼 흰빛은 무엇인가?

아까 나는 공자의 개사전 후천개벽 기사의 근원이 고조선의 <천부경>에서 나왔다고 했다. <천부경>에서의 '만왕만래'라는 개벽의 조건이 '묘연', 즉 '여성·어린이의 생명·생활적 주체 형성'이라고 했다. 이것은 그럼 역학(易學)적 개념으로는 무엇에 해당할까?

<천부경>도 역학이다. '묘연' 바로 다음, '만왕만래' 바로 앞에 다음의 여덟자가 끼어있다.

'용변 부동본 본심본(用變 不動本 本心本).'

무슨 뜻일까?

중국적 전통사유, 중국인이 즐기는 역학적 논리, 또 그들이 좋아하는 율려나 공자나 주공의 문법으로 사유해보기 바란다.

한마디로 '혁신' 아닌가!

여기서의 '본(本)'. '본'이 무엇인가를 따진다면 문제의 해답은 간단하다.

역(易)의 근원이 무엇인가? 누구나 알듯이 복희역(伏羲易)이다. 복희가 서계(書契) 결승(結繩)을 세운 7년간 어두운 동굴에서 함께 생활한 삶의 주체가 누구였는가? 즉 '본'이 누구였는가?

여성과 어린이 아니던가!

아닌가?

그렇다면 어찌되는가?

혁신이 무엇인가?

본디는 중국의 고사(故事)인데 선불교(禪佛敎)에서 더 많이 사용하는 말이 있다. '줄탁(啐啄)'이다.

달걀 깨지는 이야기다.

병아리가 달걀 속에서 다 커서 밖으로 나오려고 할 때 부리로 톡톡 쪼고 있는 그 부위를 밖에 있는 어미가 그 부위를 제 부리로 강하게 탁 쪼아주어서 달걀이 깨지고 병아리가 세상에 탄생하는 것을 말한다. 선불교에서는 해탈이다.

여기서 무엇이 병아리의 톡톡 쪼는 소리인가? 수십만 여성들의 자살이요, 문 안에 갇힌 소리(音) 우주율이다. 무엇이 문인가? 지금의 억압적 전통 고수의 보수주의다. 무엇이 어미요, 깨어짐인가? 경제 혁신에서의 여성의 등장이다.

보라,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에 온다.

'만왕만래의 종만물 시만물' 뒤에 중국인들이 그렇게 기다리고 존중하는 이상적 정치 질서인 '태양정치(太陽政治)'다. 그리고는 당나라 혜충국사(慧忠國師)가 당시의 임금 숙종(肅宗)에게 올린 이상적 우주정치체제인 '무봉탑(無縫塔)'의 내용,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이라는 대화엄 세계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조건이 바로 '묘연'과 '용변 부동본 본심본'에 있으니 여성과 어린이 주체의 확립, 즉 '혁신(用變)' 아닌가!

21세기인 아직까지도 옛 주공(周公)의 통치력의 신조인 '다남조숙인(多男朝肅人, 수많은 남성 어른들)' 일변도라니 부끄럽지도 않은가! 캐나다 <토론토 타임스>의 말처럼 그래도 문명국인가? 여성과 어린이와 변방 이민족과 노인 및 내륙 농업노동자 등의 소인(小人)을 모두 다 피보호 소외 대중으로만 취급하는 정책이 그리도 잘난 공자사상이라고 아직도 믿고 있는가? 지금 년대는 2010년이다.

이리 쓰고 있는 나 자신조차도 잘 이해되지를 않는다. 왜 그래야 하는가?

중국인들이 그리도 멸시하는 일본인, 그것도 일본의 여편네들이 지금 수만 명, 수십만 명씩 나서서 서른한 살에 암살당한 개혁가 사카모토 료마를 따라 여성 중심의 일본개혁에 나서고 있다. 지금 수만 명, 수십만 명의 그녀들이 일어서서 그리도 무시하고 짓밟아온 아시아, 그것도 자기네 식민지였던 한국의 역사를 심층부터 배우고자 애쓰고 있다. 사카모토 료마는 중국 사상에서 화엄불교는 배우려 했으나 그들의 뿌리 깊은 여성 멸시는 철저히 극복하려 애쓰다 암살당했고 여성들이 지금 배우고자 애쓰는 한국역사 중 하이라이트는 당나라에 철저히 짓밟힌 그 백제사다.

생각나는 게 없는가?

아무 생각도 안 나는가?

더욱이 그녀들이 장바구니를 들고 요즈음 즐겨 찾는 시장은 상하이의 대형 백화점 려신해(麗信海)가 아니다. 전통적 아시아 시장의 가격다양성이 소리높이 호객(呼客)하는 아메요코의 도쿄 거리 400미터다.

생각나는 것 없는가?

그녀들을 미쳤다고 생각하는가? 촌뜨기라고 경멸하는가?

그렇다면 묻자.

가격다양성이 무엇인가?

중국 역사가 자랑해 마지 않는 '팔상시(八湘市)'의 전통적 가격구조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그저 옛날 촌뜨기들의 바보짓에 불과했는가?

누구 말마따나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라는 이름의 멍청끼에 불과한가?

분명 그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내가 지금 일본 흉내 내라고 충동질하고 있는 것인가?

역시 아니지 않는가!

그럼 어찌해야 하는가?

지금 이 글은 일본 여성인 와타나베 마리코의 중국경제 혁신 제안에서 시작된 것이다. 최소한 그 이노베이션에 대한 중국 나름의 대답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 김지하 시인ⓒ인디코

금리조절 따위를 요즈음에 혁신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중국인 자신의 말을 들어보자. 그것도 중국여성, 여성 경제전문가의 말을 한 번 들어보기로 하자.

중국 청화대학의 '내국(內國) 경제 분과'의 연구원 馬仁程 박사의 말이다.

"중국은 아주 오래 전에 인민 전체의 공정한 대동(大同)경제 건설을 위해 여러 차례, 여러 형태의 혁신을 시도해본 적이 있다. 그 가운데는 저 유명한 팔상시나 정전법, 또는 유리창법(琉離倉法), 그리고 둔전제(屯田制) 등이 있다. 하나 같이 공과 사 사이의 엄정한 산 균형, 즉 중(中)을 추구한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 이러한 혁신의 전통이 오늘의 세계 경제의 대 파노라마 속에서 중국 나름의 융통성 있는 중(中)의 혁신 방향이 될 수 있겠는가에 있을 것이다. 매우 어렵고 복잡한 바가 있다." (중국 경제의 오늘의 혁신을 어디에서 찾을까? 2009년 8월 청화간행보)

매우 소명하다.

그러나 여기에도 역시 여성이 없다. 여성전문가인데도 그렇다. 마치 여성은 경제학 같은 전문 국책기능엔 아예 태어날 때부터 관계가 없는 것 같은 태도다. 여성 자신인데도!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왜?

오늘날의 세계 경제는 환경 비용이 가장 큰 압력이고 그에 대한 국가의 개입기능이 극도로 취약해진다는 점(월러스틴)에 그 위기의 근원이 있다는 점을 인정할 때 바로 그 환경 비용의 산출척도가 일상적 소비패턴에서 결정된다면 그 소비의 주체인 여성이 세계경제 운동의 주무부처라는 말이 된다. 거기에 국가의 개입기능이 파시스트적 집중성(이 점에서 중국 공산당의 국책운용 사례가 문제될 수 있겠으나)이 아닌 획기적 세목적 민주 결정의 기초를 전제할 때엔 그만큼 여성, 특히 40대 이후의 주부 대중의 생활 감각에 의한 획기적 섬세성이 그 정치 판단이나 정책 요청의 척도가 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혁신이야말로 여성 주체의 개입여부에 달려 있고 거꾸로 여성 주체의 개입이라는 민주주의야말로 참다운 혁신의 바로미터이게 된다는 이야기다.

도대체 청화대학 전문가 여성의 혁신 경제학에서 왜 이 같은 목전의 현실 감각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일까? 이런 상태에서 혁신을 참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구글과 연결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어떤 중국 인터넷 사이트에 작년 여름에 올라온 한 소녀의 글이다.

'우리는 경제 같은 건 모른다. 그저 잘 살 수 있으면 됐고, 그 잘 사는 것 안에 이렇게 디지털 체험의 자유가 늘 함께 있으면 된 것이다.'

사실 이것은 의견이라고 볼 수가 없다. 디지털(Digital)이란 '소통을 뜻하는 의견'을 말하는 것이고 의견이란 '일정한 구조를 가진 제안'인 것이다. 이 글을 그런 의견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소녀의 나이는 아마도 십여세일 것이다. 이 정도의 청소년에게 이 정도의 무식한 의견이 디지털 소통의 내용이라면 참으로 묻지 않을 수 없다. 캐나다 <토론토 타임스> 사설처럼 말이다.

'중국은 과연 문명국인가?'

중국인들은 흔히 즐겨 말한다.

'미국의 땅 밑을 깊이 파 들어가면 중국이 나온다.'

지구의 중심, 즉 중원(中原)이 중국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중원에 사는 현대 민중의 중심 중의 중심이라는(21세기 세계와 인류 개벽의 주체는 의심할 바 없이 여성과 어린이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 다중(multitude)이다) 여성과 어린이의 경제관이 이 정도라면 그 원인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경제 그 자체인가?

아니다.

경제라 하더라도 엄밀히 말해서 이미 경제가 아닌 것이다. 그럼 무엇인가?

정치다.

더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정치경제학일 것이니, 철학이고 과학이고 문화인 곧 교양이고 교육이다. 그렇다면 캐나다 <토론토 타임스>가 '공자로 세계 통일하자'는 올림픽 개막연설 직후 사설에서 질문한 첫 마디,

'공자는 징기스칸의 후예인가?'란 모욕성 발언의 의미가 아주 없지는 않은 것 아닌가?

그러고도 주변국들, 한국 그리고 김지하에게 거듭거듭 공자, 주역, 율려를, 나아가 중국에 의한 한민족 문화 정복의 메시지인 천명검(天明劒)을 강요하는 것인가?

다시 묻는다.

과연 중국은 문명국인가?

호주 외무상의 그 충고.

'좀 점잖고 적절하게 행동하라!'는 말은 공자와 주역과 율려의 나라에 합당한 이야기인지 참으로 묻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이래서 중국의 한 젊은 여류시인은 내게 '참괴(慘愧)'란 한마디를 스스로 뱉어낸 것이다.

부끄러움을 느낄 만큼 중국은 대문명국이다.

누가 그것을 부정할 것인가?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이른바 '錢權癒着'이고 '貧二代' '富二代' '房奴(전셋방 노예)'가 문제 아닌가! '深川豪華'가 문제 아닌가! 그들의 주체가 누구인가?

玄覽涯月民,

어린이, 여성, 소외된 인민인가?

아니지 않은가!

내가 항상 이상하게 생각하는 한 사태가 있다. 왜 중국 공산당은 지금도 '共産黨'인가?

'共産黨'은 본디 '共生黨'이고 '公正再分配黨' 아닌가! 지금도 그런가?

와타나베 마리코 아니라도 중국의 혁신을 요구하는 사람은 많다. 온 세계가 그렇다.

그들은 중국에 혁신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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