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해야 한다. '어둠'이 그냥 '暗'이 아닌 '闇'인 점에 눈을 돌려야 한다. 바로 여기서부터 문제를 제대로, 조금은 서로 우정 있는 태도로 풀어가 보도록 하자.
잘 알다시피 이 경우의 그늘은 칼 융(Carl Gustav Jung)식으로 옮기면 '그림자(Schatten)'가 된다. 그러나 이때의 그림자는 분명 내 개념인 '그늘'과는 다르다. 또한 한자의 '闇'과도 약간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분석심리학>(이부영 저)은 다음과 같이 '그림자'를 정의한다.
'심리학적인 의미에서의 그림자란 바로 나(自我, Ich)'의 어두운 면, 즉 무의식적인 측면에 있는 나의 분신이다. 자아의식이 강하게 조명되면 될수록 그림자의 어둠은 짙어지기 마련이다. 선한 나를 주장하면 할수록 악한 것이 그 뒤에서 짙게 도사리게 되며 선한 의지를 뚫고나올 때 나는 느닷없이 악한 충동의 제물이 됨으로써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게 된다.'
사회적으로는 어떠한가?
'정의를 주장하는 사람이 부정의 수렁에 자기도 모르게 빠지며 도덕적인 결백을 신조로 내세우는 사람이 성적인 추문을 일으키며 자유와 고매한 정신을 지향하는 지식인이 권력과 금욕에 눈이 어두워 뭇사람의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 이 세상에서 '좋은 것' 만을 하고자하고 자기는 옳다고만 생각하는 사람은 오히려 '나쁜 것'에 대한 유혹에 빠지기 쉽다. 스티븐슨의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하이드는 의사 지킬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지금의 중국은 융의 이른바 '그림자'인가?
그럴 수도 있다. 그만큼 문제투성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중국인 자신은 물론, 이미 이제 온 세계가 다 알고 있고 인근 한국, 일본, 위구르나 티베트, 동남아시아 등 모든 이들이 확연히 안다. 그럼에도 중국의 공산당 간부 본인들만 "알게 무어냐!"하는 투로 돈 좀 많이 번다고 사뭇 으스대고 있다.
내가 나쁘게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이한 말이지만 바로 이러한 태도 밑에 자기들도 모르는 어떤 혁신의 가능성이 잠자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음이다. 이상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나의 글 '정역과 등탑'에서 후천개벽의 일본과 중국관계 역상(易相)에서 '진손보필(震巽補弼)'을 정역의 중일관련의 정반대로 기술한 적이 있고, 그 설명을 오운육기론(五運六氣論)의 '운정(雲丁)-해문(海門)론'으로 보완한 적이 있다.
또한 그 결말을 도리어 중국의 진괘와 일본의 손괘에로의 정역적 역전환 가능성까지도 내다보았다.
왜?
중국의 경우 그 '그림자'가 단순한 '어둠'이 아니어서 '흰그늘'이 '白暗'이 아니라 '白闇'이라 한 점에서 이 기이한 중국적 현상의 이중성을 보아야 한다.
'闇'은 검은 그림자라는 문을 열고 그 안에 갇힌 '소리(音)'를 해방하는 것이다. 누가? '흰빛(白)'이다. 즉 복합적이다.
'소리'가 무엇이고 '흰빛'이 무엇인가? 중국의 그림자가 바로 '闇'인 증거가 무엇이며 이 경우 중국 역시 '흰그늘'의 상징은 '白闇'인 까닭이 무엇인가? 이것이 설명되어야 중국의 이 이중성, 혁신의 문제, 그 가능성의 방향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흰빛'이 무엇인가? 칼 융에 의하면 그림자가 '暗', 즉 '어둠' 그 자체일 경우에는 흰빛은 당연히 '종교적 자기성찰(religio)'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럴 경우는 이미 검은 질병상태다. 따라서 이 경우 'religio'는 'Schatten'을 거의 전면적으로 자기비판, 부정하는 '종교적 자기 전복'이어야 한다. 즉 수술이나 치료여야만 한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闇'이라면 해석이 약간 달라진다. 흰빛의 자극에 의해 문 안에 갇힌 근원적 우주율(宇宙律)로서의 소리(闇)를 문 밖으로 해방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크리스텐슨의 '파괴적 혁신'일 것인가?
아니다. 그럴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 김지하 시인ⓒ인디코 |
파괴란 말을 중국 경제에 붙이는 크리스텐슨의 혁신경영학은 서구적 사상의 이원론에 갇혀 있다. 의학적으로도 수술이나 악마 때려잡기 식의 혁신이니 칼 융의 종교적 자기 파괴로서의 그림자 성찰(religio schatten-schatten religio)인 것이다. 눈이 멀 정도의 흰빛으로 시커먼 그림자를 파괴하는 혁신이어서 '闇', 그것도 '白闇'과는 거리가 있다.
지금 중국 경제가 결핍된 밑바닥의 '콩종튀르', 즉 축적의 장기지속을 보완하느라 여러 조치를 취하는데, 이것이 공산당 특유의 조직 또는 조작에 의한 강제를 쓰는 것을 파괴적 혁신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효과는 여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공산당의 장점이라고 착각하고 또 그것을 공자 이래의 유교적 통치술의 결과로 착각하면 참으로 곤란하다.
크리스텐슨이 잘못 보았다기보다 중국 공산당이 잘못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경제가 지금 혁신 제스처에서 성공하는 듯 보이는 것은 그 어둠(혁신대상)이 '暗'이 아닌 '闇'인 까닭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흰빛', 즉 혁신이 별 체계적인 혁신이 아님에도 잠정적이나마 효과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말할 수 있다. 그 흰빛이 보다 더 혁신적(혁신은 결코 파괴가 아닌 것이다. 이 점에 날카로운 구분이 있어야 한다)이라면 그 효과는 더 크고 더 장기적·근원적일 것이다. 문제는 이제 그림자 그 자체의 성질에 달려 있다. 즉 '暗'이 아니라 '闇'이라는 것이다.
문 안에 소리가 있다. 그 갇힘이 곧 그림자이지, 지금의 상태가 그대로 어둠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문'이 무엇인가? 새로운 강압. 다시 말하면 공산당이 자랑하는 서양식 파괴나 공자 이래 유교 통치술에 의한 인민 조작이나 강제가 곧 그 '문' 자체다.
진정한 이노베이션이 가능하려면 그 문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 안에 유폐된 '소리'를 부드러운 흰빛(白)을 활용하여 열어주는 것이다. 이것이 이노베이션이요, 혁신이다. 혁신이 파괴나 혁명은 분명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흰빛이 곧 서양식 종교(religio, 자기 성찰이라는 이름의 자기 파괴, 자기 죽임)가 아닌 그야말로 '그늘'이 아닌가!
그늘은 분명 그림자가 아니다. 그늘은 이미 제 안에 햇빛을 수없이 안고 있는 독특한 그림자 현상이다. 이것은 숲을 잘 아는 지혜자는 상식처럼 알고 있는 사안이다. 그 부드러운 그늘이 문을 열었을 때 그 문 안에 갇힘(갇힘 그 자체가 곧 그림자, 어둠, '暗'이다) 상태의 소리를 해방하는 것이다.
소리가 무엇인가? 우주율이라고 했다.
우주율이 무엇인가? 여기서부터 어려워진다.
우선 성급하게 한마디 한다면 '여성'이다. 여성을 해방하라는 말이다.
혁신, 진정한 이노베이션은 우주율인 여성해방이다. 왜?
우주생명학(易)의 테마다.
현대 역은 개벽을 말한다. 한국의 개벽역학인 정역(正易)의 첫 시작은 사실상 공자의 주역 개사편의 기술인 '종만물 시만물(終万物 始万物)'에서부터다. 현대적 개벽, 후천개벽은 남성 가부장제의 선천문명의 감옥에서, 즉 문 안에서 우주율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여성(또한 어린이와 쓸쓸한 사람들)을 해방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문제는 공자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중국의 엉터리 공산주의자들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무식의 증거에 불과한 것이다. 더욱이 공자는 주역 개사편의 그 '종시(終始)' 다음에 이렇게 쓰고 있다.
'이 개벽은 간방(艮方, 동북방)보다 더 치열한 곳이 없을 것이다(莫盛乎艮).'
간방이 어디인가? 한반도와 동이족이다.
왜 이런 표현이 공자에서 나타난 것일까? 명나라 때의 강소성 맹주(孟州) 사람 황호동(黃胡東)의 <기만물이서(寄萬物移書)>에 의하면 공자가 위의 종시(終始)의 후천개벽을 쓴 것은 삼천여 년 전의 고조선의 문서 <천부경(天符經)>을 보고나서라고 한다.
<천부경>에는 '만 가지가 가고 만 가지가 새로이 온다(萬往萬來)'는 표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전제가 되는 구절이 바로 '묘연(妙衍)'이다. 묘연은 만왕만래의 실질적 내용으로 된다. 묘연이 무엇일까?
'여성과 어린이의 생명·생활적 주체 형성'을 뜻하는 것이고, 이것은 주나라와 함께 사라진 옛 모권제 사회나 신시(神市), 즉 호혜·교환 시스템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간방에서 치열할 것이라는 후천개벽의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묘연' 그 자체이게 되는 것이다.
즉 문 안에서 열고 나오는 소리는 고대의 우주율(黃帝의 4500년 呂보다 훨씬 더 오래고 근원적인 1만4000년 전 파미르 고원의 마고시대의 팔여사율(八呂四律)의 신시율)의 그 신시(호혜·교환·획기적 재분배) 주체인 여성이고, 그 여성의 획기적 재분배 중심성 기능에 의한 혁신능력인 것이다.
아닌가? 아니라고 우길 터인가? 무슨 근거로 우길 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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