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10월경 일본 나라(奈良)의 관음사(觀音寺) 주지 센고쿠(善國) 스님이 예감한 일본 미래에 관련된 대인(大人)관이 다름 아닌 '오니 스스키(女神繩)', 즉 '여자 패거리들'이었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지시하는 것일까?
그냥 우연에 불과한가?
등탑역에서의 일본진괘(日本震卦)의 핵심조건은 '여성 집단의 역사적 부활로서의 이견대인(利見大人)'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현대 세계 경제의 진정한 전망으로서의 새로운 호혜 시장에서 그 사활적 영역인 '획기적 재분배 결정의 중심성(centricity)'으로서의 여성의 그야말로 획기적인 등장이 다름 아닌 '이견대인'이라는 뜻이다.
과거 일본 역사에서 신시에 가까운 기능이었던 '포트라치(장 보드리야르 레포트에서의 사할린 고대 제사경제)'나 이후 부락경제에서 극도로 섬세한 생활적 분배 획기성 개입과 결정으로 이름났던 '오니(女神) 신권(神權)'의 담당 모권제 전통을 기술하고 있는 '고토 쉬가리(高藤修正)'의 오니(女神)와 다다에(男神)의 샤머니즘에서 그 모권을 다름 아닌 '사마(司馬)', 즉 대인(大人)으로 표현한 옛 일본 민중풍속을 보고하고 있음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다.
얼마 전 한국 영화에 관련된 '욘사마' 물결을 두고 일본 대중문화평론가 가토 기요시의 다음 말을 들어봐도 잘 알 수 있다.
"욘사마는 한국배우 배용준의 이름이 아니다. 그의 이름과 이미지를 빌린 일본 여성들의 집단적 부활운동이다."
집단적 부활.
대인(大人)은 이를 말함인 것이다.
일본 사무라이들이 그들의 전통적 여신 지배를 남신 지배의 역사로 뒤집어 왜곡한 사실은 이제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그 뒤 일본의 남녀사회는 어떻게 되었는가?
1927년 도쿄고등재판소에서 진행된 한 여자 價島奧利子의 남편 살해사건 재판에서의 법정 진술이다.
"나는 다섯 번이나 두 명의 다른 남편에게 나의 자궁과 항문에 나무토막을 꽂아 넣고 흔들어 나를 성적으로 흥분시키려는 똑같은 잔학행위를 당했다. 어떻게 그들은 서로 다른 사람인데도 똑같은 행위를 저지르는지 나는 지금까지도 이해되지 않는다. 또 있다. 나의 시아버지의 패륜 행위다. 남편이 출장 가 집에 없는 밤마다 그는 내 이불 속에 들어와 담뱃불로 손발을 지지며 속옷을 찢어내리고 국부에 이상한 약품을 발라 흥분시켰다. 내가 흥분했을 때 그는 나더러 두 다리를 벌리고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추라고 강요하면서 그 꼴을 구경하며 스스로는 자위행위를 즐겼다. 그가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들, 남자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월가의 대파열음과 함께 밀어닥치고 있는 동아시아·태평양 신경제 문명의 놀라운 가능성 앞에서 중국·한국·일본의 신속한 반응들 가운데 가장 민감하고 활발한 것은 일본쪽 경제통들이다.
요사노 가오루의 <따뜻한 자본주의>나 <착한 경제>, 待天豊雄의 '축적 순환'과 '환류 시스템', 이나모리 가즈오의 <자비를 근본으로 하는 자본주의> 등등.
이 모든 반응이 사실은 페르낭 브로델의 아날적 구조 원리나 칼 폴라니의 아시아적 호혜 교환의 비전들이거나 불교 화엄경의 '먼지를 함께 뒤집어쓰되 탐욕에는 물들지 않음(同塵不染)'의 차원이다. 남북이 분단돼 있는 한국은 그렇다 치더라도 지독한 공산주의에 대문화혁명까지 경과한 중국이 단 한 번만이라도 '따뜻한 경제'나 '자비' 소리를 하는 걸 들어본 일 없는 이 시절에 그나마 기특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서 와타나베 마리코의 말처럼 토요타나 삼성 같은 순전히 기술적인 영역의 이노베이션만이 중국의 대안일까? 아니지 않은가! 최근의 토요타 리콜 사태가 무엇인가?
모난 사람을 제일로 치는 호리바 마사오(堀場雅夫) 스타일의 '교토식 경영'만이 진정한 혁신일까?
이 대목에서 내가 분명히 못 박아서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러한 와타나베식 혁신관이 사실상 지금의 중국경제 관료들이 잔뜩 으스대고 있는 바, 안드레 군더 프랑크가 그의 <리오리엔트>에서 한없이 상찬해 마지않는 중국 전통의 기업원리들, 즉
'인민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 더 많은 이득을 생산해 내서 가능한 한 공평하게 인민에게 그 결과를 나누어주는 도덕적 행위'에 얼마만큼의 플러스 알파를 한다 한들 무엇이 그리 큰 혁신일 수 있을 것인가?
혁신이란 그렇게 밋밋한 차원이 아니질 않는가!
극심한 빈부격차, 민주주의와 자유와 언론의 대억압, 주변 소수민족 대탄압, 공산당 간부들의 저 유명한 부패에다 전권유착(錢權癒着)이라는 이름의 후안무치한 경제적 야만성, 거기에 극소수 청년기업가들의 밤낮 안 가리는 호화방탕한 사치, 동북공정, 홍산문화 강탈 등등. 말이 되는 일인가?
혁신? 이노베이션? 개혁?
거기에 가장 중요한 사안이 더 있다. 여성차별이다.
▲ 김지하 시인ⓒ인디코 |
중국의 전인민대회는 바로 중국 권력의 실상이다. 그 대회장 텔레비전 보도에서 수수백 명의 대의원 가운데 도대체 몇 사람의 여성을 발견할 수 있는가? 발견할 수나 있는가? 왜 그러는가?
며칠 전 내몽골의 여성 푸영을 외무성의 중요직으로 발령한 것을 두고 안팎에서 여권(女權)이니 뭐니 호들갑을 떨고 있다. 왜 이러는가?
현대는 여성과 어린이와 쓸쓸한 대중의 시대다. 왜 이처럼 낡았는가?
오늘의 대인(大人)은 어쩌면 여성집단 자신이다.
대인이 사라진 우레의 상황, 그런 진괘(震卦)도 역(易)에 참으로 있는가? 이래서 중국은 정역의 명백한 진괘임에도 그 수정적 보론인 등탑역에서도 불가피하게 샛바람괘(巽卦)가 되는 것이 된다. 아무리 으스대도 소용없다.
주역의 '산이 산이다(艮爲山)'를 굳게 믿고 무리한 작전에 임한 소손녕(蕭遜寧)이 완패한 뒤 그 괘를 '안개가 잔뜩 끼어 목표를 분간 못 하겠다(霧實)'고 술 취해 넋두리한 사실은 유명하다. 어찌 생각하는가? 지금의 중국 경제가 바로 '산은 산이다'가 아니던가! 거기에 한 수 붙여주는 와타나베의 이노베이션 코멘트는 분명 '산 위의 물(山上之有水)'이 아닌 '산은 높은 산이다(艮爲高山)'일 뿐이 아니던가!
아닌가?
중국인이 증겨 쓰는 사자성어 중 아마 가장 유명한 말이 우공이산(愚公移山)일 것이다. 극도의 구박 속에서 일어나 이제 스스로 혁신의 길을 찾는 아메요코의 주인공들인 일본 여성들, 그리고 이제부터의 중국과 아시아와 세계의 여성들이 바로 그 우공(愚公)이 아니고 누구인가?
그들이 옮겨야 할 산이 대혼돈, 종말, 그리고 후천개벽 앞에 부딪친 인류의 신문명 아니고 무엇인가?
태양열은 식어가며 불보다 빛의 기능 쪽으로 이동하고 있고, 태양 흑점의 장기 침체에 율리우스력이나 그레고리오력의 그 길고 긴 윤달 체제가 이미 끝났다. 일년은 이제 분명히 360일 정력(正曆)으로 돌아왔다.
달에서 다량의 물이, 물의 벨트와 함께 행성 간의 생명 탄생의 가능성을 입증하는 그린 포플러, 옐로 보우넛, 블랙 헷지 등 화이트 홀 지표가 선명해진다. 그런데도 중국의 저 위대한 과학들(그들 자신의 허풍일 뿐이다)은 이것에 일절 침묵한다. 도리어 아시아가 큰 소리로 말해야 하는 일들 아닌가!
여성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지표들이 아니던가! 달과 물과 여성이 압도하는 화이트 홀에 침묵하는 중국의 이런 점은 무지 아니면 흉계다.
내 말에 화가 난다면 대답 아니면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무슨 뜻인지는 아는가? 대답 아니면 조치가?
최근 중국 여성 다우닝거(多優寧)가 유럽 매스컴과의 회견에서 지적한 중국내 여성 관련 사안이다. 셋이다.
'하나는 중국 여성 절대 다수에 관한 사회적 진출, 활동, 창조적 작업 기회의 조직적 제약이다. 이는 공산당 정책회의의 결정일 것이다. 여성이 아직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단계나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은 여성의 성적 질곡이나 희롱 따위는 철저히 막아야하지만 여성의 사회적 교섭의 지나친 자유는 제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고위층 결정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 전체의 방만한 자유주의를 촉발한다는 것이다.
셋은 학문이나 정치 및 과학 등 전문적 과업에서 여성의 과분한 진출과 논의의 다산성을 학문, 정치, 사상, 과학 자체의 내용적인 불투명성이나 페미니즘적, 혼돈학적, 포스트모던적, 레세 페르적 방자함을 조장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엔 엄격한 철학적 대응이 요구된다. 공자 이래의 율격과 도덕이 고려되어야 할 필요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자, 이것이 사실이라면 무슨 할 말을 더할 것인가?
이 같은 중국 여성들의 처지에 사카모토 료마나 아메요코의 이노베이션이 가당한가? 기껏해야 토요타나 삼성이나 호리바 마사오 정도가 제격일 것이다. 또 그것이나마 전면 긍정적이기만 할 것인가? 최근의 전세계적인 토요타 리콜은 무엇인가? 그렇다고 중국의 멜라민 파동이 그 대안이라도 되는가?
문제는 전면적인 중국 사회 혁신과 신문명 창조 속에서 여성의 적극적 역할에 대한 기대까지는 못 간다 하더라도 중국 여성의 최소한의 인권이나 자유, 행복의 현상적인 문제 영역 안에서만이라도 긍정적일 수 있는 것인가?
현재의 중국 공산당 지배에 비판적인 천안문 세력이나 파룬궁 세력의 비판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한 발 더 나아가 대만, 아니 홍콩 자료를 들추지 않더라도 쉽게 확인되는 지난 4~5년 동안의 중국 여성 자살자 숫자 전국 통계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 것인가?
작년 중반까지 반년 사이에 35만7000명, 재작년 한 해에 76만5000여 명, 그 전 해에만 무려 120만 명이라는 이 놀라운 숫자는 8~9년 전의 한해 150만 여의 여성 자살자 통계와 함께 그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가(일본 <가와사키(川琦)일보> 2008년 10월 2일자)?
사실이라면(나는 나의 착각이거나 보도 오류이기를 참으로 바라고 있다. 아시아의 미래에 대한 예상이 너무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거대한 개벽적 대극복이 필연적으로 오긴 오겠지만 너무나 고통스러운 암흑 아닌가!) 중국은 여기에 분명히 대답해야 한다. 돈 좀 번다고 배 두드릴 때가 아니란 말이다.
중국 여성의 반 수 이상이 대학과는 거리가 멀고 외국 교양과는 더군다나 아득아득히 멀다. 이것은 그래도 별 문제가 아니라고 하자. 그러나 그 삼분지 이가 남성 노동의 삼분의 일 정도의 임금밖에 못 받는 실정이고 그 남성노동자의 사실상의 절대 다수가 내륙의 경우는 연안 도시 기술노동자의 오분의 일 수준밖에 안 되는 노임, 또한 그 역시 엄청난 초과 노동으로 시달린다면 결코 문제는 간단한 것이 아니다. 공산주의가 그런 것인가? 초보적인 문제 영역 아니던가!
여성들의 영양상태, 어린이들의 건강상태 또한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정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여성과 어린이들에게 멘토가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
이제 막 경제적으로 일어서고 있는 13억 인구의 큰 나라에서 미래의 비전을 보여줄 대중교양의 멘토가 없다면 이 중국이란 나라를 도대체 어떻게 봐야하는 것인가? 이른바 대혼돈이 지배하는 복잡한 현실에 적절한 현대적 교육이란 것이 있기나 한 것인가? 잘하는 짓인가?
그러고도 북한 김정일과의 정상회담 의제 세 가지 안에 무역, 대미관계 이외에 교육을 포함시켰다. 부끄럽지도 않은가?
하긴 대한민국의 김지하에게까지도 사람을 보내 황제의 율려운동을 하라고 압력을 넣거나 '천명검(天明劒)' 따위 하(夏)나라의 신화그림을 보내 동이문화(東夷文化)의 말로(末路)를 겁주는 판이다. 왜 이러는가?
위구르의 카디르 호주 입국을 방해하는 중국 외무성 관료들에게 호주 외무상이 뱉어낸 충고를 다시 되풀이 할 수밖에 없다.
'좀 점잖고 적절하게 행동하라(Please politely and proprietly)!'
'점잖고 적절하게'가 본디 누구의 도덕률이던가? 중국 수상이 올림픽 개막 연설에서 '세계통일의 기본노선'으로 선포한 '공자'가 아니던가? 잘하는 짓인가?
거기에 대해 캐나다의 <토론토 타임스>가 사설에서까지 '공자는 징기스칸의 후예인가?'라고 모욕을 가하는데도 거기서 성인(聖人)에 대한 죄송함을 못 느낀 것인가?
다 똑같다. 방정맞게 위안화를 세계 기축통화로 올려놓자고 억지 ,,.쓰다가 파리 저널로부터 '제국주의 망상'이라고 비웃음을 산 것이나 러시아 주역전문가로부터 중국의 주역학이 주역을 세계 최고의 변증법이라고 주장하다가 촌뜨기라고 무시당하는 짓이나 한결같이 무엇인가가 크게 잘못돼 있는 것이다. 무엇일까?
세 가지다.
여성 주체의 모심이라는 이름의 축적 순환의 부재. 개벽적 차원 변화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중국학의 철저한 현대화의 결핍. 그리고 민주주의와 자유 화엄적 월인천강(月印千江)에 의한 전 인류, 전 중생계적 '무봉탑(無縫塔)'이라는 당대(唐代) 이래의 우주적 슈퍼 비전의 새카만 망각이다.
이것은 결코 용서되지 않는 역사적 범죄다. 그저 되풀이되는 미메시스(mimesis)의 구역질나는 지루함만이 보일 뿐, 토인비가 그처럼 날카롭게 경책한 바 있는 저급한 자기애(自己愛)의 굴 속에서 못 벗어나고 있으니 이노베이션이란 말이 귀에나 들리겠는가?
기이한 것은 혁명을 마치 제 목숨처럼 내세워 아끼던 자칭 공산주의자들이 어떻게 저렇게 한없이 권태로운 서푼짜리 부르주아의 상태로까지 전락한 것일까 하는 놀라움이다. 내 말이 지나쳤는가?
아니다. 한 치도 지나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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