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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미래, 중국의 혁신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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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미래, 중국의 혁신에 달려 있다

[김지하 시인의 '신경제론'] 혁신 (1)

'혁신(革新)'이란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으나, 경제 현실에서는 이른바 '이노베이션(innovation)'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노베이션'은 우선 경영방식을 전과 달리 개선하고 일체 스타일을 바꾸는 것이겠으나, 그 이전에 이미 기업의 이미지와 함께 경영 마인드 자체를 새롭게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겠다.

'이노베이션'은 언제 필요한 것인가? 기업이 망하기 직전인가?

아니다.

그럼 언제인가?

창업(創業) 직후다. 창업 직후 여러 가지 사정도 좋고 가능성도 풍부한데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근본적인 마음가짐이 사업에 임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여겨질 때 단행하는 것이 '이노베이션'일 것이다.

나는 분명 경제학자도, 경영 컨설턴트도 아닌데 왜 이런 전문적인 문제에 부딪히고 있는 것일까? 그 까닭이 과연 무엇일까?

최근의 중국 경제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그리고 그 걱정은 한국을 포함한 전 아시아의 새로운 경제 문명의 향배에 대한 내 나름의 걱정 때문이다. 또 그것은 이른바 종말, 개벽, 대혼돈에 부딪치고 온 지구와 전 인류의 삶의 진로 자체에 대한 심한 근심 때문인 것이다.

문명이란 그 지속시간이 오랠수록, 그리고 몇 차례를 서로 이질적인 양식이 바뀔수록 더욱 더 이른바 '환귀본처(還歸本處)'하는 경향을 갖는다. 즉, 본디 그것이 시작된 첫 샘물 자리로 되돌아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크게 보아서는 오천년 정도의 역사를 지닌 것으로 판단되는 현존적 관행의 시초를 가진 인류문명사는 분명 그 시원을 아시아에 두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결국 아시아로 돌아가려는 지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것이 바로 환귀본처다.

내 안목으로는 지금 진행되고 있는 중국 특수가 바로 이 과정의 한 대목이라고 판단된다. 물론 그 양상은 그리 간단치 않다. 예컨대 동아시아·태평양 경제통들이 이미 육년 여 전에 진단한 바 있는 '동로테르담-인티그레이티드·네트워크(integrated network)'라는 규정이나 재작년 월가 사태 직후 미국 국가정보위원회가 공식발표를 통해 내린 판단 (현대 세계 현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세계 권력과 자본의 중심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한다는 것과 또 하나는 그와 동시에 모든 지역이 그 나름의 위상을 유지할 정도의 다극 체제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과 같은 것이겠다.

나는 이제 왜, 어째서 모든 사람이 입을 모아 칭송하면서도 또한 동시에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하는 세계 제일의 중국 경기를 참으로 근심하는 것인가?

누구나 알고 있듯이 거품, 그것도 이른바 월가에 이은 '세컨드 슈퍼 버블'의 가능성 때문인 것이다. 어째서?

한 가지 지적으로 줄이자.

일본의 경제통 교텐 토요오(待天豊雄, 일본 국제통화연구소 이사장)의 말이다.

"중국의 경제 비약 밑에 시간의 축적이 없다."

이른바 페르낭 브로델 문자로 '콩종튀르(conjoncture)', 즉 '장기지속'이라는 축적 순환이 밑에 깔려있지 않기 때문에 거대한 변환이 아닌, 허망한 파국의 예감이 더 강하다는 지적이다.

비행기가 뜨려면 비행기를 만드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다. 최근의 중국 경제에서 언제 그런 시간이 축적된 적이 있느냐는 것이다.

중국의 파국은 아시아의 파국을 몰고 온다. 아시아의 파국은 전 인류사의 기왕의 대혼돈(Big Chaos)을 되돌릴 수 없는 '대종말(Big Catastrophe)'로 귀결시킬 위험이 농후하기 때문에 근심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기우(杞憂)에 불과하다고?
그랬으면 오죽이나 좋겠는가!

대혼돈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한 경제 위기가 아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생태계 오염, 기후혼돈, 생명위기, 그리고 예상 못할 우주의 대변동이다.

중국경제 상승을 비롯한 아시아의 시대가 열리는 것에 대해 내가 갖는 기대는 이제껏 서양의 지혜와 과학이 해결할 수 없었던 바로 이 대혼돈에 결정적 처방을 내릴 수 있는 아시아, 동아시아·태평양 신문명의 빛나는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중국의 실패와 함께 이것이 무너지면 어찌하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거대한 문명사의 대세가 그리 허망하게 무너지는 법은 없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그러나 믿으면서도 조심스럽게 그것을 걱정 근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옛 사람들은 입을 가리고 웃으며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 했던가?

그러길 바란다.

그러나 그 우환이나마 한 도움이 될는지 누가 알겠는가?

아시아 경제전문가인 일본의 와타나베 마리코(渡邊眞理子, 일본 아시아경제연구소 동아시아연구 그룹장)의 코멘트를 들어보자.

"아시아 기업들은 상당 기간 세계 경제의 이노베이션 센터 노릇을 해왔고, 오늘의 약진세는 그 역량이 축적된 결과입니다. 아시아가 세계 경제의 진정한 중심이 될 것인지 여부는 중국 기업들의 향후 개혁 여부에 달려 있으며, 그 핵심 관건은 이노베이션 능력에 있습니다.

아시아는 1980년대부터 세계 경제의 한 중심이었는데 최근 중국의 약진과 함께 아시아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축적된 역량이 돋보이는 것입니다. 키워드는 중국입니다. 중국이 곧 국내총생산(GDP)에서 일본을 추월하기 때문입니다. 인도는 아직 일본의 절반 수준입니다.

중국은 경제 규모에서 일본의 10배까지 커질 수 있습니다. 1인당 GDP가 지금 일본만큼 커지면 전체 경제규모가 10배가 됩니다. 이 경우 중국은 아시아 경제의 90%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것은 전체 중국에 달려 있습니다. 선진국이 못 되고 여기서 멈출 수도 있습니다. 다만 중국이 10배로 커진다는 것을 가정하고 대처하는 게 좋습니다만 이것은 중국 기업이 선진 기업이 될 것인가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인구로 세계 9, 10위인 일본이 지금 총 경제 규모에서 2위인 것은 오직 이노베이션 능력 때문입니다. 범아시아 경제의 미래는 중국 기업들이 이노베이션 능력을 가질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중국에 훌륭한 민간 기업도 나오고 있다는 소식도 있습니다만 문제는 돈 많은 국유 기업이 민간 기업을 매수해서 이노베이션 능력을 잃어버리는 현상이 지배적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 김지하 시인. ⓒ인디코

핵심은 이노베이션의 내용이다.

와타나베 마리코의 주장처럼 그것은 그저 '토요타나 삼성 같은 개혁 모델이나 기타 선진국 모델로 운영하면 된다'로 될 것인가, 아니면 거기에 중국 나름, 아시아 나름, 현대 세계 나름의 독특한 문제점과 거기에 응할 또한 중국과 아시아, 현대 나름의 새로운 이노베이션이 플러스 알파로 더 있어야 하는가이다.

일본이 와타나베의 주장처럼 그 동안 세계 경제의 중요 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아시아적 조건 위에서의 탈아입구(脫亞入歐)'에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일본은 '탈미입아(脫美入亞)의 새 방향에서 기존의 서방 중심적 선진국 모델'을 탐색하고 있는 것이다.

와타나베가 주장하는 '선진국 모델'이나 '개혁 모델', 즉 '바로 지금 중국에 필요한 이노베이션'도 바로 그것이라는 말인가?

여기에 초점이 있을 것 같다.

우선 조금 지루하지만 전문적 단언 이전에 산만하더라도 그런 단언을 가능케 할 요즘 나름의 상황적 조건들을 조금씩 더듬어보도록 하자.

나는 사실 요 몇 년 간 동아시아에로의 문명 이동 추세에 대응해서 일본과 미국의 긍정적 역할을 중국의 경우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강조해왔으며, 지금도 역시 그렇다. 그것은 또 그만한 현실적 이유가 충분히 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 글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일본과 미국이 가진 현실의 어떤 긍정적 지표들에 대응하여 중국이 그야말로 합당한 바람직한 혁신을 단행할 수만 있다면 중국이야말로 아시아와 전 인류, 그리고 온 지구에 참으로 커다란 이바지를 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적극적 사고를 새롭게 하기 시작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의 지표들을 이미 제 안에 압축한 일본의 여러 요인들을 검토해보고 나서 그에 연관된 중국의 문제점을 살피는 것이 순서인 듯하다.

일본의 경우, 이 순간 내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와타나베의 이미 기성품이 된 그 전문 견해들 속의 토요타 혁신 대목이 아니라 이제부터의 일본 이노베이션의 새로운 태동이 될 '료조(龍女)' 또는 '레키조(歷女)' 지표다.

료조와 레키조가 무엇인가? 모두 여자들을 말한다.

현대경제학에서도 여자는 사람에 속하는가?

허허허.

내 대답은 '그렇다'이다. 더욱이 '굉장한 사람'이다. 내 말이 이상한가? 이 경우 또 노벨상이라도 수상한 전문 경제학자의 인용이 필요할 것인가? 내가 워낙 그쪽에는 먼 사람이니까 더욱 그렇다는 이야기인가?

허허허.

그럴 것이다.

인용한다.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폴 크루그먼은 어떠한가? 크루그먼의 <새로운 경제학 이야기(Story of New Economy)>에서다.

'여성은 현대경제학에서 소외돼 있다. 전혀 옳지 않다. 왜냐하면 현대경제에서 사실상 가장 중요한 영역이 소비이고 소비판단이며 그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여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그 역할의 창조적 확장과 유기적 연관의 확보 과정에서 여성이 얻을 수 있는 생산적 기능은 또한 엄청난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거의 원시적 상태에 가까운 경제학 가부장제 아래 묶여있는 셈이다.'

크루그먼은 다음과 같은 농담까지 한 일이 있다.

'요즈음의 달러에는 눈과 코가 달려 있다. 그 눈과 코는 주식이나 부동산 또는 이윤의 이동에 대해 매우 둔감한 남성보다는 여성들의 민감성과 섬세성에 대해 매우 날카롭다.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가?'

일본말 료조와 레키조는 여기에 관련된 어휘다. 료조는 일본 명치유신(明治維新) 때의 유명한 개혁자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에 매료된 료마 스타일의 개혁여성이고, 레키조는 '역사 여성(歷女)'으로서 료마 등을 둘러싼 명치유신 등의 근대 일본 개혁에서 무엇인가 현대 일본에 필요한 독특한 혁신의 지혜를 공부하고자 관련 역사 세미나나 모임에 몰려드는 요즘의 일본 40대 여성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무엇이 그녀들을 중요하게 만드는 것인가?

물론 이노베이션에 직결된 여성 특유의 기업마인드와 경영 지혜일 것이다. 그렇다면 폴 크루그먼의 지적처럼 여성의 창조적 혁신의 지혜는 어디에 토대를 두는 것일까?

소비다.

바로 이런 점의 중요성이 두드러져 이미 영국, 덴마크와 프랑스에서는 금융이나 경영관계 결정권자의 거의 대부분을 여성으로 교체한 사실이 있다.

소비.

여성, 특히 40대 이상의 여성은 현대 경영이 요청하는 지혜를 소비 판단에서 배운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의 료조와 레키조가 과연 옛 개혁자들과 같은 혁신적 지혜를 그럼 사카모토 료마의 칼을 빼든 사무라이 스타일에서만 배우는 것일까?

물론 결단이나 정치적 지혜를 배울 것이다. 그러나 여성 특유의 혁신적 지혜의 샘물은 과연 어디서부터일까?

여기다.

여기에 우리가 눈을 돌려야 할 일본 특유의 시장 풍경과 소비 패턴이 있는 것이다.

최근의 도쿄 재래시장을 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이른바 '아메요코'다.

도쿄 오카치마치(御徒町) 역에서 우에노(上野) 역에 이르는 400개 재래시장. 아메요코라 불리는 도쿄 최대의 재래시장 풍경이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현대식 대형 점포나 백화점에 완전히 밀렸지만 최근 기적처럼 활력을 찾았다는, 우리나라 같으면 오일장(五日場)이나 도깨비시장, 신끼장 같은 것이다.

'아메요코이니까 마구로(참치)가 1000엔!'
'아메요코이니까 5000엔짜리 대게가 2000엔!'

상점에서 울리는 가격 다양성의 호객 소리에 맞춰 인파는 이리저리 유동하지만 전혀 혼란이 보이지 않는 '한정된 난장'인 것이다.

작년엔 187만 명, 재작년엔 166만 명, 그리고 올해 들어 벌써 200만 명을 초과하고 있다. 이른바 '잃어버린 20년' 운운하는 일본 정통 경제상황과는 정반대의 길을 달리고 있는 심상치 않은 활력인 것이다.

아메요코의 단골은 물론, 40대 이상의 여성들이니 다른 말로 하면 료조나 레키조도 그 중 일부다. 그렇다면 료조나 레키조의 있을 수 있는 미래적 이노베이션에서 아메요코의 가격 다양성 등은 과연 어떻게 반영될 것인가?

그것은 단순한 가격 다양성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어 협의가격이 문제될 것이고 아직은 실체화하지 않았으나 최근 동아시아 생명경제학에서 제기된 '탈상품화에 의한 재상품화' 또한 머리를 내밀 것이며 나아가 재분배 문제에서도 평등이나 평균적 재분배라는 둔사(遁辭)를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획기적 재분배, 그 위에서만 객관적 시장 패턴으로 실체화할 수 있는 '호혜와 교환'이라는 이름의 옛 신시(神市)의 불변의 위대성이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실현에서 가장 초미한 기능인 재분배의 그 획기성에 대한 효과적 개입으로서의 정치적 중심성이 여하히 여성들의 섬세하고도 탁월한 소비 판단에 의해 형성되고 실행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이 문제는 그러나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경제에 있어서의 남성 가부장제는 정치나 가정이나 문화에서보다도 훨씬 더 혹독하고 날카롭기 때문이다. 돈이 왔다갔다 하고 권력이 요동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반대로 이것은 사느냐 죽느냐의 목전에 달린 결단이기도 해서 그리 미룰 수 있는 여유로운 것도 아니다.

'아니다. 그렇다(不然其然)'의 개벽적 판단은 이럴 때 내려진다. 그래서 경제에는 순 빠꿈이 같은 서구인들이 한꺼번에 바로 이 획기적 중심성 기능을 너도나도 다투어 여성 전문인들에게 넘기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 둘이 아닌 집단적으로.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이노베이션에서 이 영역은 어찌 생각해야 할 것인가?

아직 아메요코 문제가 료조나 레키조와 함께 결합되지도 않았고, 더욱이 '욘사마' 같은 문화 열풍과 일치되지도, 미국의 힐러리 권위에 대한 대규모 열광의 차원으로까지 비약할 기미도 아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불가능하기만 할 것인가?

참으로 여자들은 이노베이션이나 개벽과 같은 대변동 과정에서 남성 권위주의자들의 평소의 소신이나 희망처럼 그저 '그렇고 그런 것'에 불과할 것인가? 아직도 여전히 그런가?

* 이 글은 전 5회로 2-5회는 19-22일에 게재될 예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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