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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 사나운 아줌마의 그 도깨비를 용납할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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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욕심 사나운 아줌마의 그 도깨비를 용납할 수 없는가?"

[김지하 시인의 '신경제론'] 도깨비-돈과 마음의 화해

고 노무현 대통령 쩍이다.
이 양반이 대통령 당선이 되자 바로 그 이튿날 사람을 보내 날 보자고 한 적이 있다.
내 대답은 딱 두 마디였다.

'날 보려면 자기가 오라고 해라'
'나랏일에 도움말을 원한다면 단 한마디다. 정치 이전에 경제부터 손대라!'

직후, 한 가까운 후배가 그 까닭을 물어왔다.
그때의 대답도 역시 두 마디다.

'그 사람 선거 전 기자회견 때 이런 말 한 적이 있다.

"미국 언제 갈 것인가?"
"시간 있으면 간다"

자신은 그게 퍽 멋있다고 생각했을는지 모르나 참으로 무식한 소리였다. 전쟁과 정치에서 불변의 법칙이 하나 있다. 그것은 <강약부동(强弱不同)>이다.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는 절대로 같지 않다. <호불호(好不好)>의 영역이 아니다. 누가 미국을 좋아서 가는가? 철부지 수준이어서 내내 걱정되었다.

이것이 하나이고 또 하나는 다음이다.
'나는 시인이다. 내가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어떤 경우에도 시인이 대통령보다 위에 있는 체제다. 자기가 찾아왔어야 한다.'

그는 그 뒤 내게 온 일도 없고 아예 내 말을 들은 일도 없다. 정치부터 손댔고 2년 뒤 경제에 손댔을 때는 이미 늦었다. 초장부터 정치타령 하니 그나마 국내에 고여있던 달러들이 놀라서 다 도망가 미국에 부동산 붐이나 일으켰다.

그 뒤 경제에 손댔을 때는 이미 늦은 데다가 경제를 제대로 아는 자가 주변에 단 한 사람도 없는 중에 부동산을 엉터리 마르크스 경제학 따위나 한답시고 때려잡으려다 도리어 저희들만 망가졌다.

그 부동산 북새통에 한 관료가 내게 물어왔다.
'부동산이 한마디로 무엇입니까?'
'도깨비요.'
'어떻게 잡아야 합니까?'
'도깨비를 연구하지요.'

후문을 들으니 그 관료가 돌아가 고인 앞에서 날더러 '미친놈'이라고 욕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스운 중에도 우스운 일은 그 뒤 부동산 잡는데 실패하고 완전히 다운된 고인이 큰 발견이나 한 듯이 외쳐 가라사대
'와! 부동산이라는 거 그거 완전히 도깨비다!'

그렇다.
부동산은 도깨비다.
부동산만 아니다.
주식, 대도시, 교통, 도시건설의 이동방향.
모두가 도깨비다.

그러나 도깨비중의 상도깨비는 무어라 해도 지난번 미국 금융위기 때 정체를 드러낸 카지노 자본주의, 이른바 '슈퍼·버블'이다.
한마디로 '거품 문 도깨비'다.

그것 잡으려면 카오스경제학 밖에 없는 셈인데 그냥 카오스 경제학이 아니라 '팬텀 카오스(phantom chaos)경제학'쯤 돼야 잡을 수 있을 게다.

그러니 귀신이론 공부해야만 그 경제학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귀신이 무엇인가? 결국 마음 아닌가!
그러니 미국 금융위기는 '마음과 돈 사이의 상관'인 셈이다.
마음과 돈.

드디어 인류사 전체의 숙제 중의 숙제에 부딪혔다.
하기야 카오스론만으론 어림없다.
도시건설의 무정부적인 팽창경향을 해결한다고 노벨화학상 수상자 '일리아 프리고진'의 비평형산일(非平衡散逸)이론, 즉 혼돈이론을 끌어다 적용했으나 실패하고 만 빠리시청의 경우도 있다.

프리고진 혼돈학 역시 물방울의 마음에 관한 연구였는데 문제는 그 정도 가지고는 어림없다는 뜻이었다. 그럼 무엇인가?

도깨비, 귀신, 마귀, 악귀 정도의 해괴망측한 마음작용의 차원을 본격적으로 공부 안하면 부동산, 주식, 대도시교통, 도시건설 등의 무정부상태, 나아가 커지는 자본주의나 슈퍼·버블 해명은 참으로 어림없는 이야기다. 해명 없이는 해결도 없다.

▲ 김지하 시인ⓒ인디코

나는 19세기 충청도 연산사람 김일부(金一夫)의 정역(正易)에 예언된 대로 올해 기축년(己丑年) 양력 7월 22일 동아시아 대일식(大日蝕) 때에 태양력 주기의 붕괴와 함께 율리우스나 그레고리오력(曆) 이후 내내 지구와 우주를 완강하게 지배했던 365일 1/4의 윤달(閏曆)이 사라지고 달 중심의 360일 무윤력(無閏曆) 정력(正曆)이 서며 하지(夏至), 동지(冬至) 중심의 극한(極寒), 극서(極署)가 아니라 춘분(春分), 추분(秋分) 중심의 겨울엔 온화하고 여름엔 서늘한 4천년 유리세게(琉璃世界)가 오기 시작한다는 후천개벽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세상의 윤달, 즉 '잉여'라는 이름의 카지노 자본주의와 슈퍼 버블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즉 '도깨비' 그 중에서 귀신에 속하는 '거품 문 도깨비'가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순진했던 것일까?
그처럼 혼이 나고도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가 마치 시장경제의 운명이라도 되는 양 여전히 살아서 판치고 이른바 현대경제학자들은 매일 입에 거품을 물고 더욱 더 소리높이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를 열변하고 있다.

결론은 내가 너무 순진했다는 이야기밖에 없는 것인가? 참으로 그런가?
그러나 이런 경우는 어떠한가?
이태리 과학자 '에밀리아노 포플러'의 글 '행성과 행성사이의 물의 존재에 대한 달의 충격력'에서 다음을 보자.

"달은 우주공간의 물의 존재에 관한 한 가장 중요한 장본인 자격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1700년대의 라이프니츠가 '세 개의 태양에 관한 전문 과학적 상상력'에서 창조한 태양의 '에너지·버블' 즉 '불'의 힘을 '씸톰·아우라(Symptom Aura)' 즉 예감영역의 '빛'의 광휘로 바꾸어 놓을 실질적 충격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증거가 다름 아닌 행성과 행성 사이의 물의 존재 가능성을 예시하는 '녹색 안개띠'가 바로 달로부터 뻗어나오고 있는 점이다.

이 '녹색 안개띠'야말로 달에 물과 생명생성의 가능성이 있음을 증명하는 지표인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말한 '씸톰 아우라'는 바로 달로부터 시작되는 현상이고 이것은 곧 태양의 '에너지 버블'을 지양(止揚)하기 때문이다. '에너지 버블'이 지양될 때가 참다운 종말이고 우주의 변동일 터인데 이 시기가 그리 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 다름 아닌 최근의 녹색 안개띠다."

이른바 '그린 포플러(Green Poppler)'라는 지표현상이다.
에밀리아노 포플러는 그 밖에도 거의 동일계열의 '화이트 홀'에 속하는 '옐로우 보우넛(Yellow Boanut)이나 '블랙 gpt지(Black Hetge)' 역시 머지않아 다가올 '에너지 버블' 지양사태의 조짐이라고 강조한다.
NASA 계열의 이같은 과학적 사례들은 과연 내가 아까 말한 19세기 김일부 정역의 무윤력 사태와 전혀 무관한 것일까?

나는 그저 순진하기만 한 것일까?
실제에 있어서 '에너지 버블'의 지양은 지구상의 여러 생명현상에 직·간접의 막중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럼에도 나는 그저 순진하기만 한 것일까?
2004년에 인도네시아에서 한꺼번에 26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쓰나미의 원인은 대륙판과 해양판의 대충돌 때문이었는데 또한 이 충돌의 근본 원인은 지구자전축의 북극방향에로의 이동복귀 때문이었다.
이제 와서 지구자전축 북극이동을 의심하는 서방 학자는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2004년경만 해도 그 과학적 사실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온난화에 역행하는 지구 냉각 즉 간빙기(間氷期)현상은 바로 이 지구자전축의 북극 이동 때문인 것이고 이 이동은 또한 라이프니츠의 '에너지 버블'지양 때문이었으며 그 지양은 또 달의 물 생성력 상승 때문이라는 것이다.
(2008년 5월 영국 <캔터버리 사이언스 위클리>에 실린 조나단 텔스워씨의 논평)


내가 순진하기만 한 것이냐고 거듭 묻은 까닭은 이 때문이다.
김일부정역에서의 이른바 '천지경위 삼천년설(天地傾危 三千年說)', 다시 말하면 주나라 성립 전후부터 지구자전축이 서남북방으로 삼천년 동안 기울었다가 후천개벽과 함께 본래대로의 위치인 북극 태음 쪽으로 복귀 이동함이 결코 과학적 사실무근이 아니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렇다.
달은 우주 내의 물의 작용의 상승을 통해 (라이프니츠는 아직 여기까지는 내다보지 못했다) 지구자전축의 복귀이동을 추동하였고 그 추동은 곧 태양 중심의 '에너지 버블' 즉 '불이라는 뜨거운 거품' 또는 '윤달이라는 이름의 잉여'를 달의 물 중심의 '무윤력'이라는 '씸톰 아우라' 즉 해맑고 밝은 예감의 영적인 빛의 세계에로 전환시키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나는 지금 분명히 묻고 있는 것이다.
19세기 김일부정역은 과학이 아닌 망상에 불과한 것인가? 동아시아의 모든 우주생명학적 패러다임은 그저 미신에 불과한 것이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버블이 불현상인 데 반해 빛은 정역(正易)이며 물, 즉 이 세상에서 가장 투명한 근원적 힘의 미묘한 드러남인 것이다. 그래서 동아시아 우주 정치 사상사의 근본적 지향은 '태양정치(太陽政治)'에 있었고 한민족 최고(最古)의 경전인 천부경은 이것을 '태양양명(太陽昻明)'이라고 명언(明言)하고 있는 것이다.
'태양이 높이 떠 한없이 맑고 밝은 것'을 말한다. 이것은 물과 불의 만남이다.
서서한 온난화의 극복이고 버블, 거품, 카지노자본주의 따위 365일 1/4의 윤달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대변동인 것이다.

그렇다.
빛은 불과 물의 변증법적 통일이 아니라 불과 물이라는 드러난 차원의 2진법적 변화, 격동 아래 깊이 숨어있는 불가사의한 '예감의 아우라'로서의 빛의 복승(複勝)과 그에 뒤이은 온 우주 공간 및 심층 무의식 속으로의 그 빛과 예감의 확충(擴充)'인 것이다.
거품이나 윤달이나 잉여에 대한 야수적 집착 따위의 범죄적 불길이 타오를 여지(이 또한 거품인데)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깨비는?
그렇다.
불과 물과 빛의 이 과정은 사실 온난화만큼이나 길고 참혹하고 지루한 길이다. 이 과정에 역설적으로 도깨비 연구가 도리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도깨비와 귀신연구에서 빛의 복승과 확충의 예감 및 아우라를 미리 내다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어떻게?
이제껏 강조해서 이야기한 달은 실제에 있어서 물을, 물은 암컷을, 암컷은 여성성을, 그것은 다시 모성을, 그리고 모성은 곧 현람(玄覽), 투명하고 순수한 어린이성(性)을 들어올린다. 이것이 노자의 현빈(玄牝)이고 주역 이괘(離卦) 즉 '빛'괘 속의 '검은 암소를 기름(畜牝牛)'이니 해월 최시형 선생의 주장인 현실적인 후천개벽의 뚜렷한 신기론(神氣論), 즉 우주생명학적 대변동 과정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곧 '빛'인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도, 즉 불의 버블이 사라지는 빛의 생성과정에 다름 아닌 물과 암컷의 어둠이 개입돼 있기 때문에 이 과정 전체의 진행에서 거꾸로 도깨비와 귀신 공부라 필수이고 불가피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물, 여성성. 빛으로의 개벽은 그냥 일직선 상승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 달이 지구로부터 멀어지고 있는데 그럼에도 태양열은 지난 11년간 내리 냉각되고 있다. 이것은 또 무슨 조짐인가?

우주적 '물개현상'이 문제가 되고 여신지배에서의 시커먼 '고르곤(Gorgon)이 문제가 되고 잉여착취의 삯꾼들인 강남아줌마부대의 '파스꾸지(Pascucci)'가 문제가 되는 것이 다 이 때문이다.

그래서 '흰 그늘'이 참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무의식의 불온한 침전물인 시커먼 그림자(Schatten)는 반드시 새하얀 자기성찰과 목숨을 건 기도(religio)가 전제될 때에라야만 원만하면서도 예리한 '흰 그늘' 즉 15세기 피렌체 르네상스의 브랜드 토오치인 'invienttamentliche ausbrachtheit(어스름한 그물 속에 문득 솟아오르는 희끄무레한 빛)'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검은 그림자가 어스름 그늘로 변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은 오랜 고된 삶을 산 사람만이 안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리 쉽지 않다는 말이다.
도깨비 공부는 그래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물, 그림자, 여성성, 물, 냉각의 달이 자꾸만 멀어지는데도 어째서 그 반대인 태양열은 내리 식어만 가는 것인가?

마치 독초 근처에 반드시 약초가 있듯이 도깨비의 귀신다움, 악마성 가운데는 우연치 않게 허방 잘 짚고 실속 없고 전혀 곱진 않아도 아주 밉지만은 않은, 공연히 장난질 치며 낄낄거리는, 소갈머리 없는 저 우리나라 도깨비들의 '귀신 웃음소리(鬼笑聲)'가 있고 이것은 의외에도 우리의 위대한 민중예술인 판소리의 최고봉 "괴기와 익살을 통한 숭고와 심오한 흰 그늘의 미학"으로 "산 높고 바다 깊은(山崇海深)" 최고의 미학 영역 쪽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과 똑같다.
'송흥록(宋興祿)소리' 이야기도 어려운가?
미학이야기라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주식이나 부동산 장사에서의 도깨비 체험의 이야기로 진행한다면 아마도 거품 문제는 오히려 쉽게 잡힐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다.

일본 오사카대학 카오스 경제학의 대가인 '시오자와 요시나리'씨는 거품이 한창 요란하던 수 년 전의 그 무렵, 헤지펀드를 일거에 때려잡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카오스 이론에 전념했다. 스스로 실패를 자인하고 난 뒤, 소문에 의하면, 술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 소문을 듣고 내가 속으로 혼자 중얼거린 말이 있다.
'그거나 그거나'
무슨 뜻인가? 속성자본이나 술이나 그게 그거 아니냐는 뜻이다. 둘 다 귀신작용 아니겠냐는 뜻이니 곧 '마음의 놀음'이라는 내 스타일의 짐작이었다. 마음의 놀음!

그렇다.
일확천금에 눈이 먼 마귀 같은 마음이나 그것을 한꺼번에 때려잡겠다는 과학적 야심에 실패했다고 술이라는 마약에 침몰하는 거나 똑같은 마구니현상 아니냐는 말이다.
아닌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의 참 목적은 돈과 함께 돈관련 과학과 그것의 직결된 마음 사이의 현상을 귀신 또는 도깨비의 작용과 비교할 수 있겠느냐 하는 점에 있는 것이다.
비교가 가능한가?
가능하고 말고다.
우선 요시노리씨의 전문인 카오스 경제학에서의 헤지펀드의 정체 규명에 동원된 비교와 비유의 체계에서 한번 그 단서를 찾아보자.
책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자본 자체가 사회적 책무와 조금이라도 거리가 멀어질 때 항상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 터무니없는 탐욕이듯이 속성자본 즉 헤지펀드는 애당초부터 그 발생자체가 막대한 초과이윤을 순식간에 긁어쥐겠다는 전혀 비정상적인 탐욕의 물결이기 때문에 바로 이로 인한 모든 거품 현상을 우리는 하나의 '악마'라고 감히 잘라 말할 수 있겠다. 이때의 '악마'란 칼 폴라니가 천민 자본주의적 시장의 악덕을 '악마의 맷돌'이라고 비유한 맥락에서의 바로 그 '악마'의 메타포일 것이다.'

'악마'가 분명히 전문경제학자의 말로서 속성자본, 헤지펀드의 비정상적 초과이윤 탐욕의 비유로 등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같은 거품경제의 카오스 즉 혼돈성과 악마현상의 비교는 과연 어떤 내용을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을까?

또 그 지식으로 과연 악마를 귀신현상으로서의 탐욕이나 자본현상의 카오스와 우리가 지금 도깨비란 이름으로 부르는 우스꽝스러운 돈관련의 마음현상과의 비교 내지 차이를 명확히 짚어내도록 도와줄 수 없을 것인가? 그리고 그 차이가 곧 거품을 근본적으로 극복해가는 자본주의 경제문명의 환골탈태과정의 과도기 현상들 가운데서 무언가 결정적으로 인정해선 안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불가피성 같은 것으로 용납할 여지가 조금은 인정될 수 있을 것인가를 알아내는 한 방편으로 될지도 모른다는 나의 의도와 희망 때문이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왜 나는 이런 구차스런 희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인가? 한꺼번에 악마든 도깨비든 없애버리자고 주장하면 그것으로 깨끗하지 않을 것인가!
그건 그렇다. 그럼에도 내가 이리 질기게 도깨비적인 거품, "거품 문 도깨비"이야기를 질기게 하고 있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파스꾸찌' 현상 때문이다.
'물개'라고도 했다.

파스꾸찌가 무엇인가?
맨하탄에서 시작되어 서울의 강남 아줌마들 사이에 일반화된, 주식장사, 부동산장사, 초과이윤탐욕의 대중적 유행을 말하는 것이다. 본디 15세기 이탈리아의 피렌체나 베네치아 같은 도시국가에서 희랍장사로 이익을 챙긴 여편네들이 그 많은 돈벌이로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던 데서 나온 집단적 별명이다. 그들의 요즘의 또 다른 별명은 '미세스 버블(Mrs. Bubble)'이기도 하다.

그녀들이 뭐가 잘났다고 봐주려 드는 건가?
바로 이 점이다.
요시나리의 '카오스 경제학'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를 행하는 전세계 모든 나라에서 한결같은 하나의 보편적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삼사만명 안팎의 거물 헤지펀드들 이외에 수없이 많은 소액 거품꾼들이 매일 주식 그래프 앞에 목을 매달고 있다. 그들의 대부분이 가정주부들이다. 그들을 어찌 해야할 것인가? 그들의 탐욕마저 슈퍼버블로 몰아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 정당성을 인정해 줄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하나의 길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전체 경제를 왜곡시키지 않는 제한된 차원에서의 소규모 초과이윤의 용납, 사랑스런 욕심이 인정되는 정도의 자제된 카지노 자본주의의 성립뿐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제학적 온건성이 과연 균형을 유지할만한 사회가 가능할 수 있을 것인가?

나의 카오스 경제학의 소망은 어쩌면 이같은 경제평화, 어쩌면 소심하기 짝이 없는 이같은 '돈과 마음의 화해'를 지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노무현정부가 퇴진한 뒤 어떤 경제전문기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만약 노정부가 부동산 투기를 그처럼 자본주의제도의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악마현상으로까지 보고 전면적으로 때려잡겠다고 팔 걷어부치지 않고 얼마큼은 가능한 일종의 필요악 수준으로 보고 조금 여유있게 느슨한 태도로 임했다면 사태의 본질을 더 잘 파악하고 더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도 있었다. 요컨대 너무 덤빈 것이다. 그 모습이 꼭 멧돼지 사냥 나온 시골 총잡이 꼴이었다'

일리 있는 코멘트다.
요컨대 아무도 협조하지 않았던 것이다. 즉 그 어떤 마음도 그 시골 총잡이의 서툴기 짝이 없는 숙청놀음에 일체 동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크고 작은 것 가리지 않고 모조리 때려잡겠다고 24시간 총궐기 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돈과 마음의 관계다.
아마도 헌법을 개정해서 노정권이 재집권했다면 혹시 그것을 잡는 데 성공했을는지도 모르겠다. 퇴임이 며칠 안 남아서야 그가 크게 깨달았다는 소문이니까 말이다.
'와'! 부동산이란 거 그거 완전히 도깨비라!'
이랬다지 않는가!

도깨비!
그렇다.
그것은 소수의 악마 이외에 거개가 도깨비였던 것이다. 악마와 도깨비가 어떻게 다른가?
악마는 순우리말로 그냥 '귀신'이다.
'귀신은 그 노는 곳이 사람의 대뇌 근처다. 대뇌에서 노는 귀신의 특징은 모든 사태를 정확히 예측하고 정확히 계산하며 참으로 정확하고 정확하게 제 귀신 역할을 수행한다. 그래서 귀신을 무섭다고 하는 것이다.
이조 중후기 사람 충주의 박용숙(朴龍淑)의 '설귀신운(說鬼神韻)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그렇다면 도깨비는 무엇인가?
'도깨비는 크게는 귀신(鬼神) 무리에 속하긴 속하나 신(神)보다는 귀(鬼)쪽에 가깝다. 신이 정치(精緻)한 대신 귀는 산만(散漫)한 것이 특징이다. 허방 잘 짚고 실수 잘하며 여기서 퍼뜩 저기서 번쩍하며 실속은 별로 없다.'
역시 이조 중후기 작가, 호질(虎叱)의 박연암(朴燕岩)의 말로 전해오는 한마디다.

우리는 보통 도깨비 역시 귀신현상으로 본다. 그러나 그때는 음산하고 무섭고 해(害)를 많이 끼치는 작용을 강조할 때다. 즉 귀(鬼)가 아닌 신(神)을 중심으로 둘 때의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가 보통 '도깨비' 운운할 때는 그 음산하고 무섭고 해를 많이 끼치는 현상 쪽보다 주책없고 종잡을 수 없고 허방 잘 짚고 웃기는 현상을 지적할 때가 더 많다.

해롭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주책바가지이고 분명 이롭지는 않으나 그리 악질적인 것만은 또한 아니라는 뜻이 강하다.
파스꾸찌의 거품이 다 그렇다는 것인가?
아니다.
악성과 독성이 거기 분명히 있다.
구분해야 마땅하다.
마치 달의 물기능이 모두다 태양의 강한 불(에너지 버블)보다 그 태양의 예감의 빛(씸텀·아우라) 작용을 강화하는 것만은 아닌 것과 같다.
달에는 '물개현상'이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에 있어서 달은 현재에도 지구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고 이 멀어지는 현상과 '달그늘' 즉 '물개현상'이 분명 연관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미학일반이나 상상력의 체계에서는 '그늘'이 아닌' '그림자'나 '어둠'으로 표상하는 현상인 것이다.

'그늘'은 흰빛과 융합하여 '흰그늘'이라는 이름의 조용하고 온화한 빛의 창조력을 가져오지만 '그림자(schatten)'는 강열한 자기 성찰이나 날카롭고 치열한 회개(religio)를 통해서만 그 혹독한 어둠의 병적인 영향력을 넘어선다는 것이 칼 융의 정신병리학의 임상적 결론이다.

그러면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많은 중산층 주부나 서민층 여인들이 혹하는 부동산 이익 따위의 소액재테크라는 도깨비 현상을 시커먼 그림자와는 분명 구별되는 '어스름한 그늘'로 보았을 때 비로소 그 그늘은 서서한, 그리고 온유하고 원만한 경제적 탕평(蕩平)에 의해 '흰그늘'로서의 도리어 창조적 활기의 영역으로 승화될 수가 있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노무현씨는 그랬어야 한다.
지금의 정부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래야 근본적으로 카지노의 카오스, 즉 귀신이요 악마현상인 수퍼 버블이 끝나는 것이지 돈에 결부된 인간의 일체 욕심을 마치 제가 무슨 철저한 종교가나 되는 양 일체 때려잡겠다고 발버둥치거나 탐욕에 흔들리는 돈 현상을 마치 19세기말의 저 정신 나간 혁명병자들 마냥 싸그리 숙청하겠다고 설레발쳐서 되는 일이 결코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또 그걸 조장하거나 고취시키자는 이야기 역시 아님은 누구나 아는 것이다.

프랑스의 한 경제논평가가 있다.
잘 안 팔리는 일종의 경제 신비주의자인 셈인데 그 이름이 '조안나 안젤리카(Joanna Angelica)'다. 여성이다. 최근이다.
왈,

"인류는 이제야 긴 긴 멀미나는 항해를 끝내고 참으로 옛 고향에 가까운 정든 포구에 도착했다. 그 작은 포구의 이름이 '따뜻한 시장'이다. 그 시장에는 일정한 가격이 없다. 사람에 따라서, 날씨에 따라서, 형편에 따라서 그 가격은 오르락내리락 한다. 가난한 이에겐 참으로 인정스럽다. 그러나 때로 몰인정한 바가지도 등장한다. 특히 욕심 사나운 아줌마들이 그렇다. 그렇지만 이렇게 낮은 곳도 높은 곳도 함께 있는 장터가 있는 이 포구가 사람들에겐 도리어 정다운 것이다. 이 포구의 이름을 잊을 뻔했다. 아시아인들은 이곳을 '신의 우물'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욕심 사나운 아줌마의 그 도깨비를 용납할 수 없는가가 나의 오늘의 지론이다. 그 까닭은 그때에 비로소 그 반대의 욕심 없는 따뜻한 경제가 도리어 누구나 용납하는 평범한, 그러나 참으로 살 만한 가치가 있는 '비단 깔린 장바닥'으로, 또는 '신시'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란 그런 것이다.
수더분한 들씀날씀마음 속에 비로소 부처님의 미소가 있는 것이지 칼끝 같은 마음엔 거꾸로 야박한 마구니가 발을 구르는 법이다.
더욱이 그 마음에 돈이 돌아다닐 때 더욱 더 그리 날카로워진다는 것이 예부터의 어른들의 말씀이다.

이제 달의 시절이 시작된다. 그러나 동시에 해가 불기운이 아닌 빛의 맥락으로 해맑아지기 시작하는 때다.
천여년 이상을 지배해온 율리우스나 그레고리오역(歷)의 윤달이 사라진다. 해의 거품 말이다. 그러나 보라!

달의 윤달 없는 360일. 밤과 낮이 똑같고 적도(赤道)와 황도(黃道)가 일치하며 춘분(春分) 추분(秋分)중심의 여름엔 서늘하고 겨울엔 따뜻한 유리(琉璃)의 세월이 앞으로 다가 온다고 하자. 실제 우주생명학의 흐름이 그 방향임엔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장사꾼들은 끊임없이 외쳐댄다.
'친환경 녹색성장이다. 저탄소지속성장이다. 그러니 탄소배출권 장사를 이제부터 시작하자.' 분명 옳지 않은 것이다. 더럽다. 그렇다고 국제적으로 이들을 한꺼번에 때려잡아 강제노동수용소에라도 보낼 것인가? 지금이 과연 그런 세상인가? 아니지 않는가! 분명분명 마음에는 안 든다.

그럼 어찌할 것인가?
귀신과 도깨비를 슬기롭게 구분하자는 이야기다.
'눈이 아픈 새하얀 초원과 컴컴한 지옥 같은 어둠 사이의 관계(이를 융의 이른바 <religio-schatten>은 이미 회복이 힘든 전병 그 자체다)'는 바로 귀신이요 악마다. 그러나 '어스름한 저녁 강물에 번뜩 희끄무레한 물결이 일어남(invienttamentliche ausbrachtheit - 야콥 브룩하르트의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심개념)'을 뜻하는 '흰그늘'의 도깨비는 고인이 된 화가 '오윤'의 낄낄대는 카오스·코미디언인 것이다.

도깨비는 실속 없는 헛욕심이다. 도리어 큰 부처님 마음에 이르는 한 계기일 수도 있다.(화엄경 입법계품. 해운비구 부분.)
여기에 대한 논의와 심각한 정치경제적 사량이 이제 시작되어야 할 때다.
마치 우리의 전통 5일장에서 비싸고 싼 구분이 딱 갈라지는 현상, 바로 그것을 어찌 볼 것이냐 그 말이다.

'귀신', '거품 문 도깨비.' 그리고 '도깨비.'
결국 이것이 도리어 카지노 자본주의 극복의 한 지름길인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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