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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월드컵의 '불편한 진실'…<디스트릭트 9>은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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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월드컵의 '불편한 진실'…<디스트릭트 9>은 현실

[해외시각] '경제적 아파르트헤이트', 스포츠 이벤트로 가려질까

지난달 개봉된 <인빅터스>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가 스포츠를 통해 인종갈등을 해소한 리더십을 발휘했다는 감동 실화를 거장 반열에 올랐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한 영화다.

이 영화에 따르면, 지난 94년 대통령에 취임한 만델라는 1년 뒤 남아공이 개최한 럭비월드컵을 국민통합 이벤트를 벌일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한다. 스프링복스라 불리는 남아공 대표팀에는 흑인선수는 단 한 명뿐, 나머지는 전부 백인이다. 당연히 남아공 흑인들은 국가 대항전에서도 다른 나라 대표팀을 응원할 정도로 '흑백갈등의 상징'으로 스프링복스를 증오한다. 당연히 정권이 바뀌자 스프링복스는 해체될 처지에 몰린다.

만델라는 백인들이 좋아하는 럭비 대표팀을 해체한다는 것은 백인에게 협조를 구할 여지를 없애는 것이라며 지지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도자로서의 결단'을 내려 오히려 스프링복스를 전적으로 지원한다.

결국 불과 1년만에 스프링복스는 연장전까지 가는 명승부를 펼치며 15:12로 사상 최강팀이라는 뉴질랜드를 극적으로 물리치고 우승한다. 그 비결은 만델라가 스프링복스 팀의 주장(맷 데이번 분) 등 선수 전원에 대해 목숨을 걸고서라도 영웅적인 성과를 올리도록 고취시킨 '마술같은 리더십'이었다.

럭비월드컵 우승이 국민통합 리더십?

하지만 이 영화에 감동을 느끼려면 '불편한 진실'을 외면해야 한다. 수백년 동안 곪아온 흑백갈등이 럭비월드컵의 극적 우승으로 해소됐을리 만무하지 않을까? 오히려 이런 '스포츠 이벤트'로 흑백갈등이 봉합된 것처럼 꾸민 얄팍한 '정치적 계산'의 결과는 사태 악화만 초래했을지 않을까?

오는 6월11일 월드컵 개최일을 불과 두 달 앞둔 지난 3일 남아공의 경제수도 요하네스버그에서 북서쪽으로 110㎞쯤 떨어진 벤테르스도르프 외곽 농장에서 일어난 피살 사건은 만델라 집권 이후 더욱 심해진 흑백갈등의 현주소를 드러내고 있다.

<AP> 통신 등 외신 보도에 따르면, 손도끼와 쇠파이프로 잔인하게 살해된 농장주 유진 테르블랑슈(Terre-Blanche·69)는 백인우월주의 조직인 아프리카너(네덜란드계 후손)저항운동(AWB) 창립자다. 표면적인 살해 동기는 흑인일꾼 2명(21세와 15세)이 임금 체불에 분노해서 저지른 것이다.

월드컵 개최 앞둔 백인우월주의 지도자의 피살

하지만 현지에서는 흑백갈등을 주도하는 세력의 극한 충돌을 배경으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테르블랑슈가 창립한 AWB는 백인공화국 건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다른 한편에는 줄리우스 말레마(Malema·29)가 주동하는 흑인 정치세력이 있다.

말레마는 집권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청년조직을 이끌면서 지난달 집회에서 '보어인들을 쏴라(Shoot the Boer)'라는 노래를 선창하며 남아공에서 백인을 몰아내자고 선동했다. 보어인은 남아프리카 초기 정착자인 네덜란드계 후손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 노래는 백인에 대한 증오를 부추긴다는 이유로 지난주 법원이 금지곡으로 결정했다.

하지만 말레마는 지난 3일 짐바브웨 수도 하라레를 방문한 자리에서 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의 백인토지 국유화를 높이 평가하며 "이제 우리 차례"라며 발언 수위를 높여갔다.

테르블랑슈의 피살과 말레마의 선동 발언 등에 대해 AWB의 앙드레 비자주(Visage) 사무총장은 "백인에 대한 흑인들의 선전포고"라며 "대응책을 5월 1일 회의에서 마련할 것"이라고 격분했다.

제이콥 주마(68) 대통령은 월드컵이라는 국제적 스포츠 이벤트를 앞두고 흑백갈등이 노골화되자 5일(현지시간) "선동가들이 인종 증오를 부추기려 한다"며 자제를 호소했다.

남아공 월드컵, '어둠의 축제'로 전락하나

하지만 이미 남아공월드컵은 통합은커녕 분열의 극한이 폭력사태로 터져나오는 '어둠의 축제'가 될 것이라는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 현재 남아공의 행정수도 프리토리아 등 대도시 빈민가의 흑인들은 월드컵이라는 국제적 행사를 계기로 격렬한 시위에 나서고 있고, 정부는 공권력을 총동원에 이를 틀어막기에 급급하고 있다.

이 때문에 요즘 남아공 월드컵 현지 취재를 준비하던 국내 언론사들은 마치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 기자를 파견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에 당황하고 있다고 한다.

취재기자단은 개별행동이 금지되고, 적색 신호등이 켜져도 멈추면 위험하다는 등 안전교육을 받고 있고, 아예 현재 치안 사정을 이유로 취재를 포기하는 언론사도 있다.

세계에 자랑할 축제를 앞두고 흑백 충돌이 격화되는 남아공의 현실을 이해하기는 언뜻 이해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남아공은 세계적으로 빈부 격차가 극심한 나라 중 하나이며, 인구의 10% 밖에 안되는 백인이 부의 70% 이상을 소유하고 경제권력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알면 이해못할 일은 아니다.

문제는 영화 <인빅터스>가 전달하려는 메시지와 달리 만델라 집권 이후 남아공의 흑백갈등은 더욱 심해졌다는 사실이다. 영국의 <인디펜던트> 칼럼니스트이자 저명한 진보논객 조나핸 해리에 따르면, 아파르트헤이트(흑백분리주의)에 대항한 만델라의 업적은 93년 노벨평화상으로 공인됐다.

하지만 만델라는 '경제적 아파르트헤이트'를 영구화하고 세계에서 가장 극단적인 경제불평등을 악화시켰다. 아파르트헤이트는 단순히 법적인 제도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만델라가 몰랐던 것일까, 아니면 알면서도 현실과 타협한 것인지는 섣불리 말하기 어렵다.

백인과 타협한 만델라의 경제정책

하지만 영화 <인빅터스>에서도 묘사하듯 만델라는 집권 즉시 백인의 협조를 구하고, 미국과 영국 등 서방세계를 돌아다니며 외자 유치를 호소했다.

1990년대 들어 남아공의 백인 지배계급은 국제적 압력 때문이라도 법적 체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 경제적 지배력만은 필사적으로 유지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사실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자체가 타협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가난한 흑인들로부터 빼앗은 토지와 각종 자원은 백인 엘리트의 것이라고 헌법으로 인정되었고, 결코 재분배되지 않았다. 또한 재무장관과 중앙은행장은 백인들이 계속 자리를 차지하도록 했다. 서방권 국가들과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WB)는 배후에서 이를 지지했다.

만델라는 이런 요구들에 모두 동의했다. 그는 모든 국민에게 깨끗한 식수와 무료 의료보험, 무상 토지를 약속했던 ANC(아프리카민족회의)의 자유헌장을 폐기했다. 그 결과 오늘날 남아공 인구의 10%에 불과한 백인들이 70%의 부를 차지하게 되었다.

조나핸 해리는 "만델라는 백인들의 이탈과 빈곤 악화를 막기 위해 이런 타협이 불가피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틀렸다"면서 "아파르트헤이트가 종식된 이후 평균 기대수명은 13년이나 감소했다. 흑인 실업률은 두 배로 뛰었다"고 폭로했다.

오늘날 남아공의 불안한 현실은 백인의 지배가 끝난 게 아니라 겉모습만 바꾼 채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라는 것이다.

외계인 다룬 영화 <디스트릭트9>은 실제 사건의 비유

지난해 10월 개봉한 영화 <디스트릭트 9>은 남아공 아파라트헤이트 정책이 극에 달했던 1960년대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외계인 집단거주지'로 비유한 '페이크 다큐' 형식의 고발이었다. 남아공 입법수도 케이프타운에서는 '디스트릭트 6'라는 지역이 실제로 있고, 이 영화도 이 곳에서 촬영됐다.

'디스트릭트 6' 사건은 1966년 당시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이 '디스트릭트 6'를 백인 전용 지역으로 바꾸겠다고 선언한 뒤, 1968년부터 시작돼 1982년까지 흑인 빈민 등 거주자 6만 여명을 강제로 쫓아낸 재개발 사업이다.

1979년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출생한 <디스트릭트 9>의 감독 닐 블롬캠프는 이 영화를 통해 '만델라의 위업'에 가려진 남아공의 현실을 고발한 것이다.

만델라는 집권 즉시 인종차별법을 폐지하고, '디스트릭트 6' 사건의 진상을 조사해 지난 2004년부터 일부 철거민들이 '디스트릭트 6'로 이주하는 토대를 닦는 등 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지난 99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올해 92세가 된 만델라는 2001년 이래 약 900명의 백인 농장주가 피살되고, 월드컵을 앞두고 또다시 백인 농장주가 살해되면서 흑백갈등이 첨예하게 불거지고 있는 현실을 착잡하게 볼 수밖에 없을 듯 하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최신호에서 만델라가 꿈꿨던 미래와는 사뭇 다른 남아공의 현실을 조명했다. 이 잡지에 따르면, 만델라의 집권을 계기로 흑백분리는 폐지됐지만, 인구 10%에 해당하는 백인과 소수의 신흥 흑인 부유층에 거의 모든 부가 집중됐다.

대도시 흑인 빈민들은 전기와 수도조차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해 달라고 요구하며 시위에 나서고, 남아공 정부는 협상과 진압을 병행하면서 사태 진화에 급급하고 있다. 또한 월드컵 기간 중에도 이런 시위가 진정되지 않을 경우 군병력을 동원해서라도 치안을 확보하겠다 발표하는 처지에 몰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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