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중세시대의 스코틀랜드, 근대 초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의 민족주의를 살펴보았다. 그러면 여기에서 나타는 요소들은 일반적으로 근대민족주의의 전형으로 보는 프랑스혁명기 민족주의의 본질적인 요소들과 어떤 점에서 같고 다른가.
민족자결이라는 면에서 보면 중세나 근대초의 경우 모두 분명히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암묵적으로는 그것을 전제하고 있다. 반면 근대의 경우는 프랑스인권선언에서 보듯 민족자결을 문서에서 공공연히 주장했다는 점에서 그것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19세기 이후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들은 거의 모두 그것을 모방했다.
중세의 경우에는 민족주권의 개념을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근대 초의 경우에는 어느 정도는 이야기할 수 있다. 잉글랜드의 경우 영국혁명으로 왕이 처형된 후 명시적으로 민족주권을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민족이 주된 충성의 대상이 됨으로써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네덜란드의 경우는 17세기 후반에 원초적 형태의 인민주권설이 나타난다. 여기에서 조금만 더 나아가면 민족주권설이 될 수 있다.
프랑스인권선언에서는 민족주권이 분명히 표명된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그것도 군주주권이나 귀족주권과 어느 정도 경쟁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다른 것들을 모두 대치한 것은 아니다. 또 선언적으로는 큰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프랑스인의 소수에 불과했다.
따라서 민족주의를 규정하는 세 가지 개념에서 프랑스혁명기의 민족주의가 그 이전의 것과 다른 점은 그것이 명시적이라는 것뿐이다. 그 내용에서 질적으로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면 원리적인 면에서는 그렇다하고 실제적인 면에서 전근대와 근대 민족주의는 어떻게 다를까? 여기에서는 세 가지 요소를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는 근대적 민족주의가 되려면 민족의식이나 감정이 정치운동을 일으킬 만큼 강했고 대중적이어야 한다는 근대주의자들의 주장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즉 민족의식의 강도와 범위에 관한 문제이다.
중세의 경우에는 그것을 확인하기가 어렵다. 사료를 거의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 초 잉글랜드나 네덜란드의 경우에는 비교적 확인하기가 쉽다. 그래서 그 감정이 상당히 강하고 대중적인 지반도 넓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혁명기 프랑스에 오면 그 강도도 더 강해지고 대중성도 더 강화된다. 문제는 그 사이에 어떤 질적인 차이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혁명기 프랑스의 경우에도 그것은 아직 주로 부르주아지가 중심이 되는 소수의 전유물이었다. 그리고 그 민족의식이나 감정이 거의 전체 국민에게 확산되는 것은 19세기 말에 가서이다. 이것은 영국이나 다른 유럽국가들에서도 다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프랑스혁명기의 민족의식은 중세에서 시작하여 근대 초부터 점점 강화되는 전체적 이행과정의 한 모습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프랑스혁명기를 특별히 획기적인 시기로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두 번째는 왕조와의 관계이다. 근대주의자들은 민족주권이 말 그대로 현실화하려면 왕이 더 이상 민족의 구심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 일은 정말로 벌어졌을까? 별로 그렇지 않다. 18세기 말에 공화국을 건설한 중요한 나라는 미국과 프랑스뿐이다. 그 외에는 1차대전 때까지 모두 왕정을 유지했다.
영국의 경우 명예혁명 이후 왕권이 약화되고 의회가 정치의 중심이 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왕실이 민족적 충성심을 모두 잃은 것은 아니다. 특히 19세기 후반의 빅토리아여왕 치세기에는 여왕이 제국을 유지하는 상징적 존재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래서 왕은 1945년까지도, 전부는 아니라 해도, 영국민족주의의 중요한 하나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프로이센은 1806년의 예나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패배하고 그 지배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굴욕적인 상황에서 민족주의를 발전시켰다. 그 과정에서 프로이센 개혁을 주도했던 관리들, 전통적인 토지귀족들, 낭만주의 지식인들이 민족에 대해 가지고 있던 태도는 조금씩 다르다.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일인들이 통일된 이해관계와 의지를 가지는 민족공동체를 수립해야 한다는 데는 모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개혁관리들과 귀족들이 민족의 통합을 프로이센에만 제한하려 한데 비해 지식인들은 그것을 전 독일지역으로 확대하기를 바랐다.
또 개혁관리들은 합리적인 사회질서를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농노제의 해체나 군제개혁 등을 주장한 데 비해 귀족들은 자신들만의 특권이 계속 유지되기를 바랐다. 반면 프랑스혁명의 이념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지식인들은 보다 이상주의적인 면모를 보여 시민들이 법 앞에 평등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들이 다르기는 하나 프로이센왕에 대한 태도는 거의 동일하다. 모두 민족의 이익과 프로이센왕의 이익이 합치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세기 독일민족주의의 현실적인 과제는 민족주권과 군주주권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 두 주권적 존재는 프로이센이 통일 독일로 확대된 상황에서도 계속 상호작용을 하며 유지되었다. 1차대전에서 패배하고 왕정이 무너진 뒤 불붙은 민중적(völkische) 민족주의운동은 전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군주국가에서도 비슷하다. 러시아의 경우에는 1917년까지 짜르가 그 구심점 역할을 했고 일본의 경우에는 천황이 1945년까지 그 상징이 되었다. 심지어 공화국을 신봉하는 프랑스에서조차 군주에 대한 민족주의자들의 미련은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근대민족주의를 군주제와 완전히 단절시키려는 근대주의자들의 태도는 프랑스와 미국의 예를 주로 염두에 둔 것이나 그것은 근대 민족주의의 전형적인 모습은 아니고 오히려 예외적인 현상이다. 더구나 프랑스도 혁명기의 제1공화정과 1848-51년의 제2공화정 시기를 제외하고는 1870년까지 왕정을 유지했다.
세 번째는 종교와의 관계이다. 근대주의자들은 근대 민족주의를 철저하게 세속주의 위에 세우려고 시도한다. 근대사회를 산업화에 따른 개인주의화, 세속화, 합리화된 사회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겔너의 태도에서 매우 잘 나타나나 겔너만이 아니라 서양 사회과학, 특히 사회학의 일반적인 태도이다.
그러나 이것은 과장된 태도로 근대 민족주의도 사실상 종교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발전했다. 미국의 민족주의는 1789년 이후 1830년대까지 매우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프로테스탄티즘이다. 이것은 계속 이어져 21세기의 미국에서도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영국민족주의의 발전도 1790년대 이후 존 웨슬리의 복음주의와 밀접하게 결합했다. 독일민족주의도 경건주의와 결합하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프랑스혁명 당시 정교분리를 내세우고 카톨릭을 박해했으므로 일시적으로 세속성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나폴레옹 시대에 카톨릭이 다시 과거의 영향력을 거의 되찾았으므로 또 달라진다.
그러니까 민족주의와 종교를 분리시키는 근대주의자들의 이런 태도는 프랑스혁명기의 민족주의를 이념형으로 설정하고 그것을 아무데나 마구잡이로 적용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는 태도이다.
또 이렇게 민족주의를 종교와 분리시키려고 하는 다른 하나의 이유는 근대주의자들이 서유럽민족주의와 서유럽 이외의 민족주의를 작위적으로 구분하려고 한 데서 나온다. 서유럽민족주의를 자유주의적이고 합리적인 것으로 보고 동유럽이나 아시아, 아프리카의 민족주의는 권위주의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규정하려는 것이다. 종교가 비합리성을 가져오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과연 현대의 서양국가들은 종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합리적인 사회이고 그 국민들은 그렇게 판단하고 행동하는가.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21세기의 미국이 무력으로 이슬람국가들을 공격하고 이스라엘을 옹호하는데 그 밑바탕에 종교적 태도가 깔려있지 않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심지어 똘레랑스를 입에 달고 사는 공화국 프랑스 사람들조차 이슬람교도들을 차별하고 있지 않은가.
민족의식의 강도나 범위, 군주와의 관계, 종교와의 관계를 보면 획을 나눌 수 있는 시기는 프랑스혁명기가 아니라 오히려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시기이다. 이때에 오면 많은 나라에서 민족의식이 대중화되고 군주들과의 관련이 사라질 뿐 아니라 세속성도 더 강화된다.
근대주의적 해석을 하는 사람들은 이 시기에 볼 수 있는 현상을 18세기말이나 19세기 초까지 소급시키고 있다. 그들이 이렇게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것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민족주의의 왜곡된 상을 구체적인 역사현실보다 우위에 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공허할 수밖에 없다. 다음에는 민족주의를 만들어내는 요소들이 무엇인지 검토해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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